On Mirrors, Mists,and Murmurs Toward an Asian American Thealogy아시아계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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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5-05-23 18:11 조회89회 댓글0건본문
On Mirrors, Mists,and Murmurs Toward an Asian American Thealogy
아시아계 미국인의 여신학을 향한 거울, 안개, 그리고 중얼거림
카미노미치Kami no michi, 일본에서 신토라고 불리는 영혼의 길에 대한 이야기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Amaterasu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이자 바다와 지하세계의 신인 스사노오Susanowo는 여동생이 가진 생명을 부여하는 엄청난 힘을 전복하려고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보다 낮은 단계의 신이었고,죽은 어머니의 땅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에 불행했다. 그는 분노하여 자신의 대변을 뿌려서 아마테라스의 신성한 직조장을 더럽히고 관개 수로를 파괴한다.
아마테라스는 고토다마(kotodama, 言霊, 말에 깃든 영적인 힘)를 중얼거렸다. 고토다마는 선한 의도로 가득 찬 관대한 말인데, 스사노오가 이를 사악한 행위로 해석하여 의심할 여지를 주었다. 그녀는 친절했지만 그의 파괴적인 행동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그는 망아지의 가죽을 거꾸로 벗겨서 직조 홀에 던져 여러 명의 신성한 직조공들을 죽게 만들었다. 아마테라스는 천상의 동굴로 도망가 문을 잠갔다. 밤, 겨울, 잠의 안개가 땅 위로 내려앉고, 태양의 여신은 분노에 차서 침묵하고 은둔을 계속한다.
아마테라스의 은둔은 땅에는 재앙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겨울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천상의 신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애원도 그녀를 밖으로 나오게하지 못한다. 신들은 스사노오를 그들의 공동체에서 추방함으로써 그를 처벌한다. 그들은 동굴 입구에 있는 나무에 거울을 걸어둔다. 여신 아메노우즈메 근처에서 시끄럽고 음란한 축하 행사같은 샤머니즘적 영적 트랜스(trance)을 준비하는데, 이는 만물이 잠든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파티이다. 아마테라스는 이 소음에 당황한다. 호기심에 찬 그녀가 굴 밖으로 나타난다. 그녀가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에 매료되어 서 있을 때, 신들은 동굴로 돌아가는 길을 밧줄로 막는다.
거울은 신도에서 가장 신성한 상징물 중 하나이다. 귀중한 장식과 정확한 이미지로 유명한, 전설적이고 아름다운 거울은 여러 세대에 걸쳐 어머니에게서 딸에게 전해지는 소중한 유산이다. 좋은 거울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고, 그 빛나는 힘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준다. 이 지혜는 자기 인식과 지식에서 나온다. 진정한 거울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을 알 수 없다. 그리고 거울이 없다면 우리는 침묵의 동굴에 머물게 된다.
이 나라에서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의 역사는 침묵의 동굴로 강제로 후퇴한 것이다. 신학교에서 훈련받은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은 신학아카데미 전당에서 도망쳤다. 남성들의 활동은 아시아계 미국여성의 정체성에 깨진 거울만을 남겼다. 나오미 사우스워드Naomi Southard와 나는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을 위한 여신학적 터전이 부족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우리는 신학교 생활을 대부분 혼자서 해왔기 때문에, 우리가 배운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하거나, 우리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신학적theological 거울의 부재에 대해 조용히, 대부분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는 등, 소외와 사투를 벌여왔다.
우리는 종종 우리 교회와 지역 사회에서 외로운 여성 목사이며, 때로는 유일한 아시아계 미국인이기도 하다. 소외, 외로움, 분열 속에서 우리는 정의, 온전한 관계, 고통, 치유, 평화에 대한 신학적 관심사를 실천하고, 종종 갈등과 파편화된 경험의 세계를 통합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우리의 신학적 작업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우리 자매들이 접근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을 교육하는 데도 사용할 수도 없다. 기존 신학의 다양한 소란스러움들은 우리들 눈에 띄게 하거나 발언하도록 유혹하지도 못했다.
1978년 첫 모임에서, 사역하는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은 이전에 말도 제대로 못하고 종종 외로웠던 우리들의 개인적 경험과 연결되는 신학, 우리의 삶을 반영하고 사역을 활기차게 할 수 있는 신학에 대한 탐구를 공유했다. 우리가 처음 말을 할 때 우리들은 스스로 놀랐는데 ,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침묵했었다. 우리는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노력하면서 더 명확한 이미지를 찾았다. 그 공동체는 우리의 가장 진정한 거울이 될 수 있지만, 우리를 몇 마일에 걸쳐 갈라놓아서 혼자만의 외로운 보석처럼 흩어져 있었다.
침묵의 동굴에서 나오려면 우리는 산발적으로만 존재하는 커뮤니티에서 거울을 찾아야 한다. 그 여성그룹의 일원으로서 나도 신학교와 대학원에서 배운 신학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각각이 나를 인종, 성별, 언어, 문화의 안개 뒤로 흐릿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시아계 미국여성의 신학을 말로 표현해야하는 과제에 대해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나오미 사우스하드와 내가 썼듯이, 아시아계 미국여성은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일신교를 추구하며, 삶의 신성한 차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허용하고... [그리고] 아시아 종교에서의 신성한 존재와 다시 연결되도록 해주는 아시아문화의 한 단면을 되찾을 수 있는 신학적 개방성을 추구한다."
이 글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아시아계 미국인 여신학적thealogical 관점의 중요한 관심사를 말씀드리겠다. 나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안개 속에서 솟아오르는 신학적 관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맥락과 특수성의 힘, 즉 정체성의 거울mirrors of identity은 물론 공동체의 원칙에 대한 우리의 영적 갈증, 즉 말의 중얼거림을 모두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이다. 나의 생각은 많은 아시아계 미국여성들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민,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의 경험과 여신학적 탐구에서 나온다.
나는 중국 유교와과 인도 불교의 영향을 받은 문화의 하나인 일본 출신이지만, 그 문화 또한 고유의 문화이기도 하다. 나는 또한 어머니 쪽에서는 일본인, 출신 국가와 모국어가 일본인이고, 아버지 쪽에서는 푸에르토리코인인 혼혈이다. 나의 어머니는 미군 점령 하에 있던 수만 명의 일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백인 미군과 결혼했고, 우리는 내가 여섯 살 때 오키나와에서 이주했다. 나는 일본계 미국인인 잇세(Issei)라고 불리는 사람이자, 절반은 일본인이 아닌 일본 태생 미국 시민인 핫파(Happa)이다. 나는 모든 아시아계 미국여성을 대변하려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도 우리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말을 꺼내기 시작한 것뿐이다.
고통, 공동체, 치유의 여신학(thealogy)
나는 자매들과 함께 인종차별, 성차별, 경제적 착취, 편협한 민족주의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투쟁에 힘을 실어줄 여신학을 창조하기 위한 거울을 찾는다. 우리의 삶을 긍정하는 여신학을 창조하려는 탐구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모든 세계, 즉 문화적, 정치적 복잡성 속에서 우리를 연결하는 신성한 이미지와 영적 깊이를 추구한다. 우리는 생명을 주는 지혜로 우리 세계를 묶는 여신학을 추구한다. 그 연결 안에서 우리는 고통, 공동체, 치유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통합하려고 노력한다.
우리 여신학에서 고난은 다른 사람보다 더 강력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가부장적으로 고난을 짊어지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순교가 아니며, 우리의 영혼과 인격의 향상을 위해 피학증적으로 고난을 견디는 것도 아니다. 신에 대한 정통 의존성. 고통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정당하게 거부되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을 포용하고 인정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파괴된 세상을 치유하기 위한 모든 창조물의 고통이다.
고통 받는 세계와의 이러한 연대는 온정주의적인 구조 작업이 아니다. 우리의 책임은 다른 사람들이 고통 받는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고통을 줄일 수 있는 곳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치유와 해방을 위해 연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 데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임파워먼트를 위해 들어주고, 붙잡아주고, 지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고통의 포용은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인식을 통해 드러나는 분노와 슬픔은 타인과의 지지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도록 이끈다. 고통을 포용하지 않으면 사랑과 친밀함도 없고 지혜와 연민도 없다. 슬픔과 치유를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듣고,고통받는 모든 사람과 연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고통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 우리의 관계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우리를 치유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다른 사람들과 매우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 계시에서 우리는 육화incarnation의 의미, 즉 신성한 영spirit과 다른 생명들이 우리 존재 안에서 구현된다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은 대속적 죽음이나 자기희생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어떻게 고통 받는지, 또 다른 사람과 함께 고통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연대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십자가와 해방에 관한 우리의 언어는 서양적으로 들리지만, 우리의 말은 다른 저의를 가지고 있다. 고통에 대한 아시아계 미국인의 접근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관점을 서구 기독교에서 대승 불교로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고통의 의미에 대한 아시아계 미국인의 독특한 신학적 기여를 드러낸다. 불교 신자들은 고통이 치유되기 전에 고통을 경험하고 인정하기 위해 자비롭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통을 치유하려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불교신자 조안나 메이시Joanna Macy는 저서 『핵시대의 절망과 개인의 힘Despair and Personal Power in the Nuclear Age』에서 사랑하고, 희망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 절망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은 모든 고통을 기능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미국인의 성공에 대한 지배적인 집착과는 반대된다.
“우리에게는 삶의 진실을 말해 주는 거울이 부족하다....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자신감은 미국인 성격의 특징이자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움과 고통을 알고 있다는 인정은 “체력은 물론 역량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8 우리 자신이 고통받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죄책감이 있고, 비애국적이며, 의심스럽고, 무력하고, 당황하고, 너무 감정적이거나 실패했다고 느낄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메이시에 따르면, 우리는 재난을 유발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의 고통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은 자기 회의, 쾌락주의적 또는 강박적 치환displacement 활동, 수동성, 우리의 고통에 대한 심리적 투영, 파괴적 행동, 소진, 지적 무관심, 고통스러운 정보를 받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소외된 이중적 삶을 살게 한다. 우리는 고통 대신 이러한 옵션을 선택한다. “종종 그 고통을 헤쳐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치유되기 위해서는 기꺼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 누구도 [세상에 대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텅 빈 공간에 혼자서 존재하거나 스스로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 . . 현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를 통해 흐르는 물질, 에너지 및 정보의 흐름과 분리할 수 없으며, 서로 연결된 열린 시스템으로 우리를 지탱한다. 불교도는 아프고 신음하는 우주 전체의 고통을 포용하려고 한다. 고통을 부정하는 것은 생명을 주는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을 끊고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메이시(Macy)가 주장한 것처럼, 우리의 근본적인 상호의존성은 종으로서 인간의 생존에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거치면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그것은 생명과 다른 모든 존재와의 상호 연결이다. 그것은 우리의 개별적이고 분리된 존재가 생겨난 살아있는 그물이며, 우리는 그 안에 서로 얽혀 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피부를 넘어서 세계의 나머지 부분과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하며 확장된다. 불교도들은 윤리적 행동의 핵심으로 강렬한 내면의 자기 인식에 초점을 맞추고, 조화와 아름다움, 우주의 아름다움이라는 더 큰 미적 맥락에서 연민과 지혜를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러한 아시아계 미국인 사상의 불교적 저류가 치료적, 미적, 윤리적인 영역에 대한 관심을 서로 경쟁적인 영역과 학문으로 분열시키는 경향이 있는 서구 기독교에 많은 것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시아계 미국여성의 여신학적thealogical 관심에 불교의 저류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나는 불교 역시 가부장적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자체로 여성혐오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교도들은 개인의 내적 영역과 우주 영역 사이에 있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분석에 약하다. 불교에서는 사회 분석이 부족하여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모호하거나 권위주의적으로 변한다. 불교도들은 종종 여성이나 아동 학대나 빈곤과 같이 발생하는 고통과 예방 가능한 고통, 그리고 죽음과 같은 삶의 흐름 속에 있는 고통의 차이를 분명히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분석이 부족하기에 고통에 대한 불교적 언어는 숙명론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아시아계 미국인에서 일본의 ‘시카타 가나이’(shikata ganai 어쩔 수 없습니다) 개념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표현은 불의와 억압의 국면에서 중얼거리는 말이다. 인간 조건에 대한 불교와 기독교의 분석적 결함은 감정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경향성에서 서로 만난다. 인간의 열정(친밀감, 분노, 애정, 감정적 고통)은 그들의 분석에 통합되지 않는다. 대신에 몸이 마음과 의지보다 낮은 존재로 거부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결핍은 페미니즘, 특히 사회적, 정치적, 심리적 이론을 결합하고 열정과 몸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페미니즘이 분석에 강한 지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불교가 무시하는, 초월적이거나 개인적인 관계가 아닌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가부장제의 핵심이 억압, 탄압, 제도화된 폭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해 왔다. 그들의 작업은 가부장제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이 심리 내부 과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우리 모두를 억압하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앨리스 밀러(Alice Miller)는 억압과 폭력의 생산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의 감정, 특히 고통을 억누르고 투사하도록 가르쳐, 대규모 폭력을 재생산하는 사회적 힘과 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심리적인 억제는 사회적 억압이 된다. 우리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사람*의 억압이나 고통에 대한 대리적인 동일시를 통해서는 일어날 수 없다.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은 이를 강조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고 다른 모든 사람의 대의를 떠맡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Barbara Deming과 Audre Lorde는 사랑과 분노를 통해 자신의 열정의 뿌리를 탐구하면서 다른 사람을 향한 불의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것, 즉 데밍Deming이 "분노를 비유적으로 표현함, 또는 다른 사람의 분노와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그러한 독선적인 분노는 그 자체로 우리 자신의 고통을 강화하는 현실에 대한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고통 속에는 우리를 치유하는 지혜와 연민으로 이끄는 자기 지식의 힘이 있다. 우리 삶의 진실을 보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온전해지거나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은 외로움과 고통에 대한 우리의 부드러운 중얼거림을 듣고, 우리 자신을 비춰주는 자매들의 공동체에서 비통함을 말하고,우리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우리 자신의 여정에서 이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러한 반영을 모든 고통을 포용하는 방법으로 이해한다. 세상과 함께 고통 받을 수 있는 능력은 우리를 모든 피조물의 공동체 의식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나는 고통을 인정하면서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점은 십자가 중심의 고통이 아니라 공동체, 모든 피조물의 글로벌 공동체, 중심의 고통이다.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들은 공동체의 유대가 아무리 약해졌더라도 신성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많은, 종종 멀리 떨어진 세계와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현실을 안고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많은 미국인보다 더 큰 글로벌 의식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이러한 인식은 인종차별 사회에 의해 우리에게 강요되지만 그것은 힘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더 넓은 연결을 보고 우리의 상호 연결을 파괴하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은 심오한 통찰력으로 이러한 공동체 의식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내 몸의 모든 세포는 고대인과 대화한다. 나는 태초부터 있었던 모든 믿음(신앙)의 움직임을 내 몸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문자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으로도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영향을 느낀다. 글로벌 공동체를 긍정하는 아시아계 미국 여신학을 향한 길을 만들기 위해, 나는 내 인맥에 대해 뿌리가 있다고 느끼는 모든 장소를 찾아본다.... 나는 이념적 순수성을 기준으로 출처를 검토하지 않고, 기독교와 이교도, 서양과 동양을 구별하지 않는다. 이 접근 방식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나오미 사우사드(Naomi Southard)와 나는 아시아계 미국여성들과의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 종교에서 영적인 자원을 개인적으로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40) 그들은 종종 금지된 땅을 밟는 것처럼 머뭇거리며 말했지만, 거기에서 힘과 고결함을 위한 내면의 영적 자원을 발견했다. 우리 중 일부는 여성 중심의 활동과 영적 깊이를 지닌 아시아 종교의 샤머니즘적 자원을 자아와 영적 이해를 위한 자원으로 사용한다.
로버트 엘우드(Robert Ellwood)는 수평적 우주론을 지닌 초기의 평등주의적 샤머니즘 종교에서, 수직적 우주론을 지닌 남성 중심의 성직자 중심 종교로의 전환이 일본의 가부장제 부상의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엘우드는 많은 아시아계 미국여성들이 직관적으로 느낀 바를 주장한다. 우리 영성의 고대 샤머니즘적 뿌리는 우리의 육화된 경험을 확실하게 증명한다. 여성 무당들은 자신의 지혜를 인도하고 말하는 영혼의 존재를 내부적으로 느꼈다. 남성 지배로의 전환은 주로 남성인 신들의 승천과 하강을 포함하며, 그들은 계시하는 꿈속에서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이야기한다.
영과 육, 지혜와 감정, 사람과 본성의 친밀함은 사라진다. 샤머니즘은 하나님을 멀리 있고, 냉담하고, 징벌적이며, 소외된 존재로 보는 신학에 대한 교정본을 제공한다. 토착 아시아영성은 초월적 아버지의 신학이 아니라 육화된 영적 여신학a thealogy of the incarnate spirit이다. 나는 치유하는 육화된 영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보편적 추상과 교리가 아니라 내가 살고 움직이고 내 존재가 속한 특수하고 양가적이며 다양한 세계에 대한 나의 사랑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에 영감을 주고 강화하는 유대 관계를 발견한다.
영spirit의 구현은 영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자연 세계는 우리 삶의 뿌리이다. 강, 바다, 나무, 꽃, 새, 동물, 풍부하고 때로는 무서운 힘을 지닌 지구 자체, 모든 관능미, 촉각적 즐거움 및 기쁨을 지닌 인간의 몸. 땅은 우리가 영의 감동을 받는 통로이다. 샤머니즘적 치유의 트랜스는 감정, 사고, 감각의 통합을 통해 정신을 드러낸다. 트랜스는 우리가 교리와 믿음의 인지적 측면에 집중할 때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부분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를 모든 창조물과 연결시켜 주는,변화시키고, 힘을 실어주고, 활력을 주고, 온전하게 만드는 정신을 발견한다. Nelle Morton은 유사한 치유 트랜스 상태를 설명한다. 그녀는 여신과 오래전에 죽은 어머니의 환상을 보고, 그로부터 치유와 힘을 얻는 말을 듣는다.
그녀의 환상은 그녀 속으로 녹아들어 그녀의 느낌을 온전하게 만든다. 우리 자신의 이러한 가장 깊은 곳을 탐험하기 위해서는 통제하지 않고,명확한 목적이나 최종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은유적 여정에 대한 Morton의 설명처럼, 결말은 미리 정해질 수 없다. 통제하지 않고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며,파괴와 증오에 대한 우리 자신의 능력에 직면할 뿐만 아니라 사랑과 연결의 씨앗을 발견한다. 아시아계 미국여성이 아시아영성의 문화적 자원을 탐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낭만적이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시아영성을 만드는 것은 피해야 한다.
우리가 샤먼 의례를 찾을 때 이러한 고대 전통이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전달되고 변형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주의를 주고 싶다. 우리의 탐구에서 중요한 것은 미묘한 여성혐오와 여성공포증의 이면에 있는 우리 조상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가부장적으로 침묵시키는 것에 대한 의심의 해석학이다. 이 가부장적 가면은 아마테라스 전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아마테라스의 전설에는 토착 샤먼과 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봉건적 황실 혈통을 강요한 것에 대한 변명을 담고 있다.
본래 동지 축하행사였을지도 모르는 행사가 정치적 권력 장악을 위한 행사로 바뀌었다. 전설은 남성이 지배하는 황궁에서 여신의 부재를 정당화한다. 태양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휴식은 남성의 공격성에 맞서 침묵으로 바뀌는데, 이는 유순한 아시아 여성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이다. 우리는 불친절한 신학의 세계로부터 침묵하고 후퇴하는 우리의 반응을 재고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적인 말을 말할 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우리 어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구하는 치유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온화함과 관대함의 말인 고토다마kotodama를 계속해서 중얼거린다면, 우리는 또한 비통함도 말해야 한다. 오직 고통에 대한 완전한 자기 인식과 그 고통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때에만 우리는 연민을 가지고 모든 창조물의 공동체를 위한 치유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들의 중얼거림은 우리를 지탱해 주었고 우리 자신의 고통과 기쁨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거나 이상화하지 않는 거울을 찾을 수 있는 지점까지 우리를 데려왔다. 우리가 각각의 세계에서 발견하는 억압과 사랑의 층위에는 명확하거나 쉬운 적들도 없고, 신이 부여한 어느 편side도 없다. 우리 자신의 삶과 모든 창조의 공동체를 치유하고자 할 때, 우리는 끈기, 정직, 관대함, 희망을 복원할 것이다.
*저자: Rita Nakashima Brock
미주리주 컬럼비아에 있는 스티븐스칼리지의 여성학과장이며, the Disciples Peace Fellowship의 회장.
최근 Crossroad에서 출판된 Journeys By Heart: A Christology of Erotic Power의 저자.
*출처: Judith Plaskow, Carol P. Christ(1989), Weaving the WisionWeaving the Visions: New Patterns in Feminist Spirituality, San Francisco : Harper & Row, pp.235-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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