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ar Calendars 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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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5-05-23 16:37 조회92회 댓글0건본문
음력
Lunar Calendars
돌과 바위에 새겨 넣는 도구가 처음 발견된 것은 B. C 300,000년 경 부터였다. 이것은 두 번째 유럽 간빙기에 초기 네안데르탈인인 호모사피엔스의 출발 시기와 거의 유사하다. 이처럼 돌에 영구적으로 새긴 것은 시간을 만든 사람, 음력을 만든 자로 짐작되는데, 여성에 의해 새겨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주 초기에 톰슨(Thompson)이 기록한 것처럼, “인간은.... 그녀의 우주를 상징적인 형태로 축소하였다.”
B. C. 3만 년 전 구석기시대로 추정되는 수천 개의 유사한 돌과 뼛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매우 초기 네안데르탈인들이 고심하여 돌에 새겨둔, 오랫동안 종종 특정한 자국들과 흠집들로 표시된 복잡한 결과들이 새겨져 있었다. 많은 ‘선사시대인들’은 장식이 되어 있는 이러한 표시들을 없애버렸다(이러한 주장은 오늘에서야 분명해졌다). 그러나 미국의 고고학 작가인 알렉산더 마샥(Alexander Marchack)은 섬세하게 체계적으로 새겨진 이러한 마크들을 연구했고, 이 마크들이 조그만 홈으로 다른 깊이, 넓이, 그리고 모양으로 신중하게 만들어진 것을 발견했다. 하나의 조약돌이나 뼈에 있는 스크레치들은 다른 모양의 도구들로 만들어져 있었다. 마샥은 마크를 새긴 사람이 새로운 도구로 달의 각 주기 변화를 따라 새로운 각도로 잘라졌다고 결론지었다. 뼈 한 조각의 한 면에 6개월이 기록되어 있었고, 다른 면에는 6개월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시스템은 네안데르탈인이 B. C. 30만 년 전 바위에 새긴 이후 지속되어오던 세련된 방식이었다. 이것은 사실적인 데이터를 기록하기 위한 완벽한 표기법이다. 시간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순환을 기록한 이것은 B. C. 4천년 후, 근동 주변에서 보였던 소위 “실제 기록(true writing)”이 있기 전에 유럽의 수십 곳에서 사용되었다. 이 표식, 그리고 이것이 기록된 음력은 여성의 발명이다.
마샥은 시간을 표시하기 위한 달의 칼렌다 막대의 다른 형태들에 대해 연구했다. 뼈에 새겨진, 아마도 나무 다음에 나타난, 이 칼렌다 막대는 정교한 “음력의 기록”이었다. 마샥이 위네바고 추장의 1828년 초상화에서 발견한 어떤 칼렌다 막대는 네 면이 있거나 여러 면을 가진, 길이가 53인치나 되었다. “수평의 마크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져 있고, 그 위에는 작은 초승달 모양과 점들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막대들은 음력으로 한 해를 표시한, 달이 복합적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양력으로 기록된 해가 의례의 시간들이 표시된 음력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마샥은 적어도 5개의 음력 막대를 다른 세 인디언부족들로부터 찾았다.
이러한 막대는 구석기시대 B. C. 5만 년 전부터 동굴 그림들에서 나타난다. 여성과 샤먼들이 이것을 들고 있었다(그리고 후에 마술사들의 지팡이가 되었다). 아베 브레우일Abbe Breuil은 이 막대를 남성의 힘이나 지배력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명령하는 지휘봉(le baton de commandement)"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사실, 이 막대는 음력을 측정하는 도구로, 여성이 달의 주기를 뼈나 돌에 새기는 도구에서부터 시작했다.
톰슨(Thompson)의 말에 의하면 “지휘봉의 주인은 힘센 남성이 아니라 산파였다.”
산파. 물론 아기의 성장 과정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그녀의 직업이고, 이는 모든 임신한 여성들을 위한 일이었다. 인류학자들은 특히 여성들에 의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 사이에서, 여섯 시베리안 부족에서, 그리고 북아메리카 유록인디언들 사이에서 음력이 유지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과거와 오늘날 시베리안 사이에서- 가나산스Nganasans, 엔테스Entses, 돌간스Dolgans, 처키Chuckchi, 코락스Koryaks, 케츠Kets- "임신 기간은 정확하게 음력으로 10개월이다.". 그리고 안전하고 충분한 기간의 출생을 위한 개월 수를 음력으로 표시하는 방식을 유지하는 것은 항상 여성이었다. 유록인디언 여성들은 생리 달력을 사용했다(그리고 이것은 지구의 반대쪽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도 분명하게 발견된,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유록인디언 여성들의 셈은 10의 숫자에 닿을 때까지 두 개의 바구니에 ‘월별’ 막대를 각 음력 달에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초기의 수렵채취 시대의 활동 중에서도 출산일을 매우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이 계산은 낙태를 할 때에도 유용하게 활용했다.
톰슨(Thompson)이 말한 것처럼 ”매우 남성 중심적인 인류학자들이 주장하는, 살인자인 남성을 찬양하는 것보다, 생리와 음력, 그리고 산파술로 추측하는 것이 인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더욱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이해가 된다. - 분명하고 간단하게 이해가 되지만 이것은 그동안 쉽게 간과되었다. 인류는 불복종이라는 범죄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성서적 이해는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지능이 이기적인 살인자와 약탈자, 그리고 자기 과시라는 행동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자본주의자인 다윈 신봉자들Darwinian의 주장도 잘못이다. 인간의 삶과 인간의 두뇌는 발명, 발견, 그리고 홀로 사냥하는 남성 사냥꾼을 통해 발전했다는 남성중심적인 인류학자들의 믿음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삶은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인류의 문화와 지능의 발달은 여성이 임신을 유지시키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성들의 경험과 함께 시작되었다.
권력의 표식의 일부로 음력 막대기를 소유하고, 도끼와 목걸이 팬던트를 함께 가진 위네바고Winnebago 인다언 추장은 고대 여성의 힘으로부터 뺏은 지배력을 보여준다. 톰슨Thompson은 사제들과 샤먼들은 항상 여성처럼 옷을 입고 여성 특유의 마술을 가지고, 출산과 생리 의례의 시작을 알리는 의례를 전세계에 있는 원주민 남성들이 모방했다고 지적한다.
“사실 지휘봉은 남성이 빼앗아서 가부장적인 문명화인 군사문화로 이어져서 것인데,
왜냐면 그것은 고대 가장 여성적인 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석기시대의 초기에, 여성-네안데르탈 여성- 은 달의 주기가 특정한 길이를 가지고 있어 정기적으로 반복되고, 그 주기는 하루나 이틀 안에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B. C. 3만 년 전의 크로마뇽 여성은 음력으로 한 해에 대한 개념을 알았고, 음력 달력을 사용했다. 구석기 말(B. C. 약 10,000년 전) 그들은 한 해의 계절, 달의 주기, 동물이나 새, 물고기가 해마다 이주하는 시기를 예측할 수 있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주거생활을 하며 정착하면서 달력을 만들었고, 해와 달을 관찰하고 종교적인 의례를 위해 스톤써클(열석)을 만들었다. 이는 다른 방식일 수 있다. 아마도 돌멩이로 고정된 형태를 보이는 중심부는, 음식을 채취하거나 사냥을 하는 사람들이 정착중심의 농업사회로 대체되면서 만들어진 제의적인 천문대 위치라고 할 수도 있다.
여성이 상징적이고 축약된 기호법, 관찰적인 과학과 초기 수학을 발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초기 여성의 인식 과정은 자연과 실재 경험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자연과 소외되거나 ‘자연을 정복하기’를 원하는 욕망을 가지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자연과 매우 조직적이고 유기적인 관계였다. 또한 상호 유기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는 자연 세계와 협력하기를 원하면서, 개인과 인간 공동체에서도 주기를 관찰하면서 상호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대에 나타나는 가부장적 종교와 문화가 함유하고 있는 금기, 장벽,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운 마음 상태였다.
이러한 여성과 달의 화합이 주는 암시는 여성이 기본적으로 자연의 주기에 대한 최초 관찰자이고, 모든 후기 과학적 관찰에 의해 만들어진 주기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여성은 그녀가 겪어왔던 내적 과정과 자연의 외적 과정 사이에서 상호 반응을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아차렸다; 여성들은 더욱 영적인 인식을 만들고 대상과 주체가 서로 공감적인 반응을 보냈다; 그녀는 모든 유익한 허브와 식물들을 위한 분류법을 만든 영적 과학자이다; 그녀는 꽃들이 피는 시기에 대한 비밀을 안다.
관찰한 시스템으로부터 관찰자를 분리하는 세계관, 종속적인 시스템으로 분리하는, 그리고 대상화하는 것은 여성이 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녀는 화이트헤드(Whitehead)가 유기체와 가공의 철학에서 재발견하고자 했던 “몸과 함께함(the withness of the body)”을 표현한다. 여기 소크라테스시대 철학보다 앞선 철학이 있다; 데카르트가 실재를 마음과 물질로 분리시켜 철학과 교회 사이에 있는 생명의 줄을 잘라 자를 때, 사건을 확대하거나 만들어내면서 현실을 분리해낼 때, 여성은 “성스러운 어머니 교회(성모 교회)”가 된다. 로셀의 비너스 혹은 오늘날 과달루페 처녀가 초승달과 함께 그려진 이유는 여성과 달이 동일한 신비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 신비는 실재이고, 실재했고, 모든 고유한 실재의 신비로움은 관찰되고, 연구되고, 숙고되었고, 최초에 실재로 존재한 진짜 인류의 기원과 함께했다. 신비로움은 힘과 혼란의 공포나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았지만, 인간의 지능이 발달함에 따라 여성의 관찰은 지혜에 의해서 제의적인 요소로 기꺼이 사용되었다. 바바라 워크Barbara G. Walker가 쓴 『여성의 신비와 비밀의 백과사전』The Woman's Encyclopedia of Myths and Secrets에서 mathesis(Ma-thesis)의 뜻은 “어머니의 지혜”, 그리고 원시나 현대 언어로 “ma"는 ”mather"를 의미한다. 최초의 천문학자와 수학자, 즉 “배운 어머니”는 여성이었다.
아프리카 앙골라의 달종족은 분쟁이 있는 경계에서 긴 거리를 재기 위한 방법을 발견한 한 소녀의 이야기를 한다. 그녀의 매일의 일과 가운데 가죽끈으로 만든 오두막에 작은 가지로 문을 짰는데, 손톱 크기의 넓이로 이것을 쟀다. 그녀는 매우 긴 거리를 커버할 수 있는, 소가죽을 잘라 매듭을 만들어 연결하고, 모든 소가죽은 비슷한 길이의 띠로 만들어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띠들은 그녀 부족에서 측정하는 기본 단위로 사용할 것을 그녀는 제안했다. 아마도 저장된 음식의 양을 측정하거나, 농사짓는 해에 사람들이 하루를 기준으로 해서 얼마나 먹일 수 있는지의 양을 알기 위해 측정하기도 했는데, 이는 신석기 여성들이 수학적 계산에 매우 중요한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일상은 이러한 것에 기초했다.
기하학과 인간의 이미지는 원래 우주의 몸이라는 동일한 신성한 이미지의 두 가지 다른 표현이었다. 숫자는 감각적인 문제로부터 나타난다. 고대사회에서 숫자는 항상 실재로 존재하는 것에서부터 발견되었고 인간의 표현을 구체화시켰고, 축약된 보편성이나 “대상화”의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돌 유적을 만든 사람의 거석을 재는 단위는 인간 보폭의 길이인 2.72피트였다. 전통적인 고대의 측정도구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몸의 일부분을 기초로 하는데, 예를 들면 발자국, 뼘, 손가락 길이 등이다.
“수학”이라는 중국 단어인 수안suan은 B. C. 약 600 년 경에 등장한 용어로, 봉건제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음력을 측정하는 단위는 점차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그 과정은 아마도 B. C. 약 2500년 경 바빌론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서구의 예술적 창조에서, 우리는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수적인 시스템을 탐구하기 위해 사용된 이상적인 형식과 측정 가능한 기구라는 전통을 물려받았다. 이 전통은 거석시대의 철학을 넘어서 수학적 신비주의를 발명한 피타고라스(B. C. 약 550년)로 거꾸로 추적할 수 있다. 아마도 그의 지식과 그의 방식 또한 트라키아의 현명한 여성들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그 이후에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수학이 자연을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라고, 자연에 내재된 것이라고 믿었다. “모든 사물은 숫자이다”, “숫자는 첫 번째 원리이고, 자연에 있는 사물들의 가장 기초이다.” 그래서 서구 사회에서 묘사하는 것은 물질로부터 요약된 것으로, ‘객관적인 시스템’으로 정의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는 종교와 의례의 영역에 “논리적 추론”(유기적인 추론이 아니라)을 소개했고, 이후에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학자들과 서구 사회에 의해 발전한 “지적인 논리학”의 기초가 되었다. 이 수학과 신학의 조합은 고대 그리스, 지중해 유럽의 개혁과 근대 시기에 종교적인 철학을 규정한다. 결과적으로 “신”은 더 이상 직관이나 환상적인 비전을 가진 것이 아니다. 심오한 존재론적인 경험이 아니라 “설명이 가능한” 합리적인 기계의 종류가 등장했다.
플라톤, 성 오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등은 모두 선천적으로 이 숫자적인 철학을 이어받았고, “영구 불멸”한 논리적인 숭배와, 정적이고 완전히 초월적이고 초연한 아버지신의 “신성한 영혼”을 나누었다. 육체와 대지로부터 추상화된 아버지 신은 일상적인 숫자만큼 호소력이 없는 것이다. 순수한 숫자number는 단순한 삶의 가장 복잡한 세계보다 항상 더 큰 의미를 갖는다. 3백 년 동안의 유럽마녀 사냥 시기의 이성 중심적인 신학은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고대 여성문화를 억압하는 법적인 수단이자 사제들의 무기였다. 중세 학자들은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바늘 끝에서 춤을 추는지에 대하여 끝없이 논쟁하고 매우 진지하게 토론했다; 엄청난 고문을 하는 동안, 사제들과 시민 판사는 또한 여성 희생자가 고용한 도깨비들의 정확한 숫자, 악마와 성교한 시간, 그의 “남근”의 정확한 사이즈와 길이 등에 대해 과도하게 질문하면서 추적했다. “숫자”에 대해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기괴하고도 가슴 아픈 과정의 “합리성”과 “객관성”의 영향력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적 형식에서, 예를 들면 심리학적인 도구, 행동과학적인 용어, 측정 가능한 “온전함”과 “적응”의 개념 등 숫자number를 신성시하는 것은 여전히 “사회적인 비정상”이 아니라 힘의 도구로서 사용된다. 반대로, 동양의 신비주의는 -유럽의 비기독교 지향, 모든 곳의 근원적인 지향과 같은 - 수학이 우리들의 개념적인 지도, 즉 실재 그 자체의 추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실재의 한 부분을 깨닫는 도구로 이해된다. 실재는 달처럼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주기를 가지는, 차별이 없는 것이다.
출처:Monica Sjöö,Barbara Mor(1981),The Great Cosmic Mother: Rediscovering the Religion of the Earth, HarperOne,pp. 14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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