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페미니즘] 제3강 “모르고 짓는 죄” : 자본주의 세계에서 양심 찾기 / 후기짱
페이지 정보
작성자 종교와젠더연구소 작성일22-11-30 12:24 조회1,037회 댓글0건본문
에코페미니즘과 자본주의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지는 강좌 제목!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역자이자 <19세기 허스터리> 대표 저자, 미국사 연구자인 최재인 강사님의 시원한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자본주의 체제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작동하고 있을까요? 오늘 이야기하는 큰 틀은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책에서 빌려왔음을 먼저 밝히는 바입니다.
‘경제’ 의미의 축소와 자본주의의 시작
밥을 하는 것은 노동일까요, 아닐까요. 생산일까요, 소비일까요. 경제활동일까요, 아닐까요. 국가는 가정에서의 활동은 노동, 생산, 경제활동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돈을 버는 일과 관련되지 않는다면 노동도 생산도 경제활동도 아니라고 합니다.
‘경제’의 어원은 management of household(가정 살림)에서 유래되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 가정 살림은 경제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19세기 이전의 가정은 생산이자 소비의 단위였습니다. 그에 반해 현재의 가정은 소비의 단위이지요. 18, 19세기를 거치면서 인구의 80%가 농민에서 임금생활자로 서서히 전환되었습니다. 다수의 생활이 자급제에서 시장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돈이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습니다. 변화의 배경에는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이 존재합니다. 공장을 통한 대량생산, 대량 유통, 대중 소비체제가 확립되면서 근대자본주의 체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자본주의를 연구하는 경제사학자들은 대부분 자본주의의 시작을 에스파냐와 포르투칼이 대항해시대를 열어나갔던 시기, 특히 콜롬버스의 아메리카의 발견이 대표되는 시대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아프리카 연안에 있는 상투메(현 상투메프린시페) 섬에서 포르투칼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포로로 잡아 상투메 섬을 비롯한 여러 섬에서 노예로 부리면서 설탕을 대량생산을 시작한 사건입니다. 궁정 관계자만 맛볼 수 있거나 약재로 쓰일 만큼 귀했던 설탕은 대중에게 퍼져나갔습니다. 상투메 섬에서 시작되어 호황을 누리며 확장되고 대중화된 설탕은 시장을 활발하게 합니다. 시장에 가려면 돈이 필요하고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한 활동에 나서기 시작하지요. 일상에서 시장에 의존하는 정도가 커졌고 동시에 아프리카에서는 노예사냥이 확산됩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비밀, 폭력
노예무역금지 이후에도 노예제는 계속 유지가 되었고 노예 밀매업은 계속되었습니다. 최소한 1850년대까지 350여 년 동안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잡혀 대서양을 건넌 일이 300여 년 이루어졌음을 감안할 때 그들이 낳은 후손까지 생각하면 수십억의 인구가 노예로 사용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유럽 대중이 그전에는 보지도 못했던 설탕의 맛을 보고 수백 년에 걸쳐서 단맛에 익숙해지고 중독된 일의 이면에는 폭력과 부당한 노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단 설탕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담배, 커피, 차 등이 노예노동력을 이용한 플랜테이션을 통해서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전 세계인의 생활을 크게 바꿔놓았습니다. 사치품이 대중소비제가 되고 세계적 차원의 시장을 만들었으며 큰 돈벌이가 되었습니다. 이 여러 가지 제품들 중 담배, 커피, 설탕, 코코아 등 주로 중독성 강한 기호품들이 세계시장을 만들어 간 부품이었습니다.
흔히 자본주의를 말할 때 그 관계의 중심에는 자본가와 임노동자 사이의 계약을 통한 생산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직장을 벗어나면 고용주와 임노동자를 벗어난 평등한 시민 관계, 합리적인 계약관계라고 설명합니다.
마리아 미즈를 비롯한 생태여성주의는 근대자본주의 체제의 기저에는 폭력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 초기에는 폭력적 과정을 인정하고 “자본주의는 피를 뚝뚝 흘리며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자유로운 임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약관계로 전개되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인 반면 마리아 미즈는 폭력적인 착취가 단순한 초기의 과정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작동방식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발전이 노예제, 식민지 혹은 가난한 나라에 대한 폭력적 착취에 기초해서 이루어져 왔으며, 또 한 나라 내에서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적 착취를 통해서 진행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자연 자원 역시 공동체의 민주적인 동의가 거의 없는 가운데 기업이나 관료에게, 유럽이나 미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축출되어 이른바 개발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한쪽에서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다른 한쪽에 대한 폭력적 착취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 사건, 마녀재판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만들어서 동물처럼 자연처럼 착취했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인 1400년대 말부터 1775년 무렵까지 유럽에서는 여성에 대한 대대적인 폭력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마녀사냥, 학술적으로 마녀재판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에 남아 있는 기록만 보아도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약 10만 명 정도가 마녀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그중 5만 명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재판 기록은 모두 처절한 고문의 기록이었으며 당시 처형은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되었고, 처형 이후에도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마녀재판의 희생자 중 여성의 비중이 약 80%였습니다. 러시아는 예외적으로 여성 비율이 35% 정도로 남성이 더 많았으나 이에 대해 러시아의 사학자들은 오히려 러시아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았기에 생긴 예외라고 말합니다. 여성이 마녀로 기소될 정도로 목소리를 높이거나 공동체의 눈에 거슬릴 정도로 밖으로 돌아다닌 여성들이 많지 않았던 것이지요. 35%라는 다른 나라와 다른 숫자의 뒤에는 이러한 반전이 숨어있습니다.
마녀재판 희생자는 여성, 빈민, 노인, 과부, 걸인, 목동 등 사회적 약자가 다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마녀 수사관들은 “여성성 자체가 마성을 띠며, 모든 여성이 마녀가 될 수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당시 마녀재판을 진행했던 책임자들이 어떤 여성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발언입니다.
마녀재판은 왜 발생했을까요. 상품경제가 들어오면서 마을공동자원들은 사유화되고 마을공동체가 함께 부양했던 약자들이 점차 거추장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생겨난 죄책감은 상대방을 죄인으로 만들면 해결이 되었지요. 실제로 가난하고 나이 든 여성들이 주로 마녀로 몰렸습니다. 마녀재판은 또한 출산에 대한 통제력을 정부가 가져가려고 했던 시도였고 그들이 보기에 불온해 보이는 여성들을 통제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일자리와 큰 돈을 제공하는 빌미로, 자연과 여성을 같은 범주로 묶고 과학적 기술의 통제하에 두려는 시도로, 또는 교회와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수단 등으로 마녀재판은 계속되었습니다.
마녀재판은 여성을 잠재적인 마녀로 내몰고, 관리와 규제의 대상으로 보았으며 사람보다는 자연에 가까운 열등한 존재라고 격하시켰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거치면서 지배 엘리트들은 여성의 몸을 탐구의 대상으로 보았고 필요한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마녀재판과 자본주의
그렇다면 이 역사가 자본주의와는 어떻게 연관되었을까요.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시장을 높은 임금의 안정적인 일자리와 낮은 임금의 불안한 일자리로 크게 양분했습니다. 여성은 후자에 속했고, 마녀사냥의 역사가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 1780년대에 대규모 공장단지가 들어서고 탄광이 개발되었을 때 그곳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70% 이상이 여성과 아동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공장은 가장 취약했던 돈이 절박했던 사람들이 상황에 쫓겨서 가야만 했던 곳입니다. 자국의 가난한 사람들 그중에서도 여성과 아동과 같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던 취약 계층에게 열등하다는 낙인을 찍어서, 백인 남성들에게는 제시될 수 없는 조건으로 가혹한 착취를 해왔습니다.
19세기의 가난한 여성이 착취를 당하는 동안 지배층에서는 새로운 여성상이 제시됩니다. 종교적 독실함, 순결, 복종, 가정에의 헌신성을 갖춘 여성이 진정한 여성이라고 하면서 이런 여성상을 ‘숭배’했습니다. 여성은 소중한 가정을 꾸밀 성스러운 존재라는 찬사의 이면에는 여자는 집에만 있어야 하며 여성은 자신의 욕망을 내세우면 안 된다는 말이 담겨 있습니다.
엘리트 계층인 백인 남성의 아내와 딸의 자리는 가정이었지만 여성 노예나 가난한 여성들은 밭에서 부려지거나 공장 노동자로 헐값에 일을 해야 했고, 이처럼 일을 하는 여성은 비정상적인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일반 시민에게는 할 수 없는 착취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가사노동은 일상적인 가사를 통해 매일의 노동력을, 그리고 출산과 육아를 통해 다음 세대의 노동력을, 즉 상품인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중요한 활동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도 노동으로서 그 가치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여성 노동 일반에 대한 태도로도 이어집니다. 여성과 여성 노동력을 자연 자원처럼, 공기나 물처럼 공짜로 혹은 아주 싼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는 통념이 확산되었으며 그런 통념의 배후에는 여성을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저임금 노동력”으로 만들어 수익을 보았던 자본가, 기업가의 이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
노동자에게 고용의 안정성을 보장하지 않으면서 낮은 임금으로 이용하는 경향은 21세기에 이르러 여성뿐만 아니라 노동자에게도 확산되었습니다. precarious와 proletariat를 합쳐 만든 21세기 신조어 ‘프레카리아트precariat’는 노동유연화로 고용안정성이 떨어지며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노동력을 뜻합니다. 고용불안이 커지고 상호 자동화 등으로 인해 필요한 노동력이 감소하게 되면서 프레카리아트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빙산에 보이는 일각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는 비공식 부분에 속하는 노동, 집에서 받아서 하는 노동, 아동 노동, 생계형 자영업 등이 있고 그 아래에는 주로 여성들이 많이 하는 가사노동, 식민지에 대한 착취, 자연에 대한 착취가 자리하고 있다고 봅니다.
미즈는 또한 자본주의 체제를 상품생산과 자본 축적을 목적으로 여성, 식민지, 자연을 대상화하여 폭력적으로 착취하는 체제이며, 생명(life)을 파괴하는 체제이고 지속될 수 없는 체제라고 주장하고 대안으로 자급경제를 제시합니다.
미즈가 자급경제를 말하면서 항상 강조하는 것은 성별분업의 폐지입니다. 지금의 성별분업, 즉 “남성 부양자/여성 가정주부의 성역할”은 없어져야 합니다. 자급경제로 방향을 잡으면 무상으로 해야 할 공공작업이 많이 생길 수 있는데, 거기서 성별분업이 일어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가사노동 역시 남녀가 함께 책임지도록 해야 합니다. 성별분업을 의식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 한 이는 지속될 것이며 서열과 억압과 착취가 있는 사회로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생태여성주의가 말하는 자급경제는 반세기 넘게 수출에 의존해왔으며 단기간에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어낸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너무 높은 벽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커피’를 포기하지 못 하지만 생태여성주의를 내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생태여성주의를 통해서 삶이 어떻게 상호 연결되어 있는지, 내가 수행하고 있는 가상노동이 어떻게 자본축적과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있으며 값싸고 쉽게 누리고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소비가 얼마나 폭력적인 자본주의 착취의 결과인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약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 자본주의의 생산, 재생산 구조를 더욱 강화하려고 하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고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일하면서 살아가야 할까요. 노동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이 진행되었으면 합니다.
19세기 말 영국 사회 기자였던 윌리엄 모리스가 쓴 공상소설, <에코토피아 뉴스>에서 미래인은 “노동의 대가는 삶이며 뛰어난 노동에 대한 대가는 ‘창조’”라고 말합니다. 미래의 유토피아에서 노동은 자기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거기에서 보람과 기쁨을 찾는 것이며 노동의 대가는 삶이라는 말의 의미를 종종 생각해보곤 합니다.
같은 세상도 누구의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이나 구조를 보고 그것을 설명할 때 그 구조나 상황에서 가장 크게 착취당하고 고생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문제를 보는 것이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바르게 세상을 보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혹은 통장에 쌓이는 것만 쫓기보다는 하루하루 생명을 이어나가는 삶 자체가 내 노동의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후기짱
조은빛님 : 저는 마을에서 (가볍지만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공동체 이루며 살아오신 동네 언니들, 여러 이웃들 덕분에 젊은이(가 아니려나^^;)지만 마을 공동체를 잘 누리고 있어요~ 저는 마을이모라고 불리는 걸 좋아하고 그렇게 소개하는데, 알고 배운 것으로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젊은이들도 “이거야.” 하며 같이 살자 하지 않을까, 바라요.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