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간 대화로 성평등한 세상만들기】 유교: 하늘과 땅과 온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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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3-06-30 16:39 조회832회 댓글0건본문
유교와 성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할까? 유교는 고리타분한 과거의 유산이고 전형적인 계급과 가부장제를 정당화시키는 대표주자가 아닌가? 대학로 골목을 빠져나가 찾아간 성균관 앞에서 선비차림을 한 박광영(성균관 의례부장)과 한복을 입은 황상희(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이하 존칭 생략)가 우리를 맞이했다.
유교의 바티칸, 성균관
성균관의 고즈넉한 한옥 툇마루에 걸터앉아 하루가 시작됐다. “성균관은 바티칸처럼 유교의 대성전입니다. 조선시대 전국에서 진사고시에 합격한 진사와 생원들이 모여 공부했던 성균관에는 공자 맹자 등 현으로 동승한 16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라고 소개하며 박광영 의례부장은 우리를 서당으로 안내했다. 이황 이율곡도 모두 이곳 출신이다.
겉치레일까? 예를 갖추라
대부분의 종교는 마음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신이 마음속에 있다는 표현도 쓰며, 불교는 보이는 것은 허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교는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옷차림이 중요하고,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도 중요했다. 사람들은 쉽게 겉치레라 부를지 모르지만, 유교에서는 세상과 인간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예를 소중하게 여겼다
“거만해 보이니 문지방에 서지 말아야 한다. 뒷짐 지는 것은 포박한 죄인의 모습이니 배꼽 앞에 손을 모으고 남자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싼다. 양으로 음을 감싸는 것이다” 한석봉이 쓴 현판이 걸려 있는 사당의 돌계단을 올라갈 때도 성큼성큼 오르기보다 한발 오르고 발을 모았다고 또 한번 오르라며 이것을 합족이라 불렀다. 긴 옷가지에 걸려 넘어지지 말라는 실용적인 의미도 있지만, 느리게 걷는 구도자의 몸가짐을 엿볼 수 있었다.
신들의 세계, 문을 열다
묵직하게 닫혀있던 빗장이 열리고 우리는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창틈으로 들어온 빛에 위패들의 모습 드러났다. “유교가 돈이 없나요? 왜 전등 하나도 못 달았나?”라고 사람들은 묻는단다. 그러나 사당은 신들을 모시는 곳이다. 돌아가신 분들은 음의 속성이 있고 그것은 어둠이다. 어두워야 신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유교는 살아있는 사람을 예로 대할 뿐 아니라 죽은 이들에 대한 예까지 갖추고 있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죽음을 삶의 반대편에 놓은 사람들과 달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그곳에는 인류의 의식구조를 바꾼 5대 성인 중 한 분인 공자가 있었고, 원효대사 아들 설총, 최지원, 정몽주, 퇴계 등 39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박광영 의례부장은 공자님은 태양의 밝기로 모시고 나머지는 달의 밝기로, 별의 밝기로 모신다고 표현했다. 묘하게 위계적인 것 같기도 우주처럼 조화롭기도 하다. 사당의 제기, 외부의 소박한 단청까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사당 안 세수 대아에 물고기가 새겨져 있었는데, 물고기가 살만큼 정결하며 방심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유교의 종교언어는 사서 삼경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례와 전통 속에 상징의 언어로 살아있었다.
유교는 종교일까? : 황상희 교수 강연 중심으로
’유교는 종교일까?’ 지금도 가끔 듣는 논쟁이다. 그러나 이 질문이 처음 시작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였다. 일본제국은 오직 종교 단체에만 집회를 허용했다. 그 밖의 어떤 모임도 잠정적 범법행위가 되는 것이다. 당시 유교는 ‘향교’를 종교시설이라고 주장했다. 제사가 예배이고, 사서삼경이 경전이며 조상신 중 가장 높은 이름이 상제이고 무극이니 종교의 모습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총독부는 향교를 종교시설이 아니라 학교라 불렀다. 그러자 유교 정신을 가진 신흥종교들이 등장했다. 동학, 천도교 등도 이와 관련이 있다.
한민족, 종교적 민족
한반도는 고대부터 고인돌이 있었다. 동이전을 보면 영고라는 의례에서 왕뿐 아니라 남녀노소가 함께 천신에게 노래와 춤으로 제사를 지냈다. 우리는 예로부터 음주와 가무에 능했던 민족이다. 이것이 지금의 한류의 뿌리가 되지 않았을까? 라며 황교수의 목소리가 커진다. 유교가 조선의 국교가 되었을 때도 종교적 심성이 드러나 있다. 이색은 ‘상제가 굽어살피시리가’라는 표현으로 인격적 신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하늘 사상의 전통은 윤동주의 시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기를’ 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양도 유교의 종교성에 의해 건축된 것이라고 소개한다. 한양은 인의예지신 (仁義禮智信)의 정신에 따라 흥인지문(동대문), 돈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홍지문(북대문) 그리고 보신각이다.
유교의 세계관, 서로 손잡고 다정한 개체들이 살아남기
종교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존재론을 제공한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삶과 죽음이 무엇이며,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신화와 경전을 통해 이야기한다. “유교는 모든 세상이 무극 상제에게서 내려왔다고 본다. 강한자만 살아남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유교를 계급적이며 위계적이라 생각하지만, 황박사는 그것은 오해라고 설명했다. 유교는 하늘을 아버지로, 땅은 어머니로 그리고 그 사이에 동포, 우주적 가족 공동체를 이야기 한다. 그러니 관계와 공동체성이 중요하다. 아이가 태어나면 띠를 둘러서 함께 보호하는 마을 공동체가 가능했다. 경쟁으로 고립과 단절이 일상인 우리사회에 유교의 세계관은 답을 줄 수 있을까?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찾았던 <오래된 미래>를 유교는 간직하고 있는 거일까?
공동체를 지탱하는 감정, 효
지금 노인들은 자식들이 잘살면 그걸로 되었다고 말한다. 효를 기대했다가는 마음에 상처만 받고 갈등만 생긴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유교는 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전에는 노비가 효자이면 신분도 바꿔주고, 하늘로 갈 수 있는 덕목이 바로 효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창자가 끊어지게 소리를 내어 울었던 아들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그러고 보니 목숨을 버리며 효행을 했던 심청이가 왕비가 된 것도 유교의 효사상을 담은 이야기다. 지금은 효사상이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을 증폭시켰다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농업사회에서 늙어 힘없는 노인들을 존중하는 것은 약자를 존중하는 공동체의 모습이기도 하다.
유교의 남성성, 유약함이라는 덕
클라이드 프랭클린(Clyde W. Franklin)은 남성성의 변화 (The change of Definition)에서 남성성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한다고 주장한다. 중세에는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운 것이 이상적 남성상이었다면, 식민지 개척을 하던 근대를 지나며 남성성은 공격적이고 자율적인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다. 흥미롭게도 유교가 지배했던 조선에서 이상적인 남성성은 유약함이었다. 충신이나 효자에게 내리는 정려문을 하사하기 전에 관찰사가 조사단을 보냈는데 당시 기록에 따르면 대상자를 ‘질박하고 유약하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좋은 남성성은 꾸민데 없이 수수하고 부드러운 품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며 남성성은 바뀌어갔다고 황 교수는 설명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사람은 소가 무거울까 봐 함께 짐을 짊어지고 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황희정승은 동물의 감정도 소중하게 여겨 말조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유교의 남성성은 많이 왜곡되었지만 지금 공감하고 함께 하는 모습으로 세계의 남성성을 바꾸는 BTS는 유교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황 박사는 이야기한다.
생계부양자였던 여자들
조선시대 시문에 통달했던 여성 지식인 허난설헌은 조선에 태어난 자신을 애통해했다. 지금도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분리된 조선시대에 여성들은 가장 억압받은 존재로 여겨진다. 황박사는 유교에 기반을 둔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했다.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너는 나에게 딸, 아들, 벗 사내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는 글이 나온다. 당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뚜렷했을 때, 학문에 뛰어난 딸을 칭찬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가족에 묶여, 무능하고 수동적으로 시키는 일만 하는 억압받는 여성들이라 평가된다. 삼종지도는 아버지 남편 아들이라는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만이 여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시선은 오랫동안 서구페미니즘이 아시아 여성을 보는 시선이었다. 서구 여성들은 아시아 여성들을 존중하기보다 계몽의 대상으로 여겼다. 가족에 묶이고 남자들과 싸우지 않는 아시아 여성들을 계몽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서구 여성들은 척박한 삶속에서 억척같이 자식을 지켜내야 했고, 자신들과 함께 제국주의로부터 탄압받는 남자들을 적대적으로 대할 수 없었던 아시아 여성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황 교수는 조선시대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기대어 살았다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보살펴주었다고 주장한다. 가정경제의 주체였으며, 국가가 어려울 때 남편이나 아들에게 자신과 가족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라고 했다. 부유한 집 여성에겐 곳간의 열쇠가 있었겠지만 가난한 집 여성은 머리카락, 아니 허벅지까지 잘라 가족을 먹여 살렸다는 민담이 있지 않은가? 가난한 시기 공순이로, 양공주 청춘을 보냈던 여성들의 이야기, 저녁 늦게까지 일하는 식당 노동자, 밤을 새워가며 일하는 간병인 돌봄 노동자들이 머리로 스쳐 지나간다. 여성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생계부양자였다. 그들은 가족뿐 아니라 내 집 찾아온 빈객을 대접하여 집과 마을을 연대의 장소로 만들었다고 황 교수는 전한다.
유교를 너무 좋게만 해석하는 것은 신뢰성을 떨어뜨릴 수 있지 않으냐는 청중의 질문에, 황 교수는 이미 비판만 받아온 유교를 변론할 기회를 얻고 싶었다고 답변했다. 이후 최영갑(성균관 유도회 총본부) 회장은 죽음에 관한 장례문화를 자세하게 소개하며 삶의 연속성속에 죽음을 생각하게 했다. 이어 민혜원(여성유도회 중앙회) 회장은 유교 안에서 차문화, 예절, 의복 그리고 변해가는 유교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강의와 대화가 끝나자 우리 모두는 성균관 유생이 함께 공부했던 명륜당으로 향했다. “부부유별하며, 군신유의하며, 부부유별하며, 장유유서하며, 붕우유신하라.” 누군가는 여전히 부부유애라 읽을 것이다. 오륜을 함께 읊으니 시원한 소나기가 명륜당 마당으로 쏟아졌다. 퇴계에게, 율곡에게 손을 흔들었을 명륜당의 오래된 고목은 성평등을 외치며 찾아온 여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응원하고 있었다.
최형미(여성학자, 종교와젠더연구소 객원연구원) lhn21@womennews.co.kr , 여성신문 202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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