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간 대화로 성평등한 세상 만들기 】 무교: 성을 극복한 신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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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3-07-27 09:37 조회772회 댓글0건본문
【종교 간 대화] 무속에서 여자들은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
요즘 무속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무속인을 가까이한다며 우려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임을 자처했던 이승만 대통령이나 이명박 대통령은 뭐 그리 잘했을까? 무속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위안부 할머니 위령제도 하고, 민족굿회 활동도 해온 무당 이지녀는 억울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더욱 무속을 싫어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한다. 정치가는 그의 정책과 도덕성으로 비판해야 한다, 종교와 결탁해 사람들을 동원하고 이용했다면 그것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소문만 무성하다. 막연한 오해와 혐오 속에 있는 무속과 종교 간의 대화의 장을 열었다. 무당 이지녀는 자신의 신당, 북두칠성당 마당에 마고할미와 북두칠성(北斗七星) 별자리를 그려 새롭게 단장하고 우리를 맞았다.
무속에서 여자들은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
여자들이 하면 뭐든 아마추어 취급한다. 공장서 일하면 단순노동 ‘공순이’라 하고, 여자들이 요리를 잘하면 ‘집밥’이라 하고, 여자들의 돌봄노동은 아무나 데려다가 적은 임금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본다. 남자들이 노동시장에 들어설 때 쉐프나 장인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무속에는 어떻게 여자들이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주변화 된 영역이니 여자가 있었고, 여자가 했으니 개도 안 물어갈 서러운 자리는 아니었을까?
무속이 처음부터 차별받은 것은 아니다. 김덕묵 한국외대 초빙교수는 단군을 무당의 시초라 소개한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신을 섬기기에 무당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신라시대에는 임금을 차차웅(次次雄), 자충(慈充)이라 하였는데 방언으로 무(巫)를 의미했다. 특히, 남해왕 3년에 박혁거세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데 남해왕의 누이동생 아로(阿老)가 제사를 주관하였다. 한국의 여사제가 등장한 것이다. 선덕여왕도 무속과 연결되어있고, 지리산 성모, 제주도 할망도 모두 무속의 자취다.
조선시대에 무당 탄압은 본격화되었다. 재미 무속학 박사 이인희는 경국대전을 인용하며 성종16년에 굿판을 벌이는 사람을 모두 능지처참시키는 법이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반공사상으로 사람을 잡은 것처럼, 성리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세운 조선은 무속과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을 형사범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역병이 돌면 치병을 맡겼고, 가뭄이 들면 무당을 불러 기우제를 올리게 하고 보상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활인원이라는 무당 수용소를 만들어 그들을 몰아넣었다.
일제강점기에 총독부는 무속을 미신행위로 여겼다고 김덕묵 교수는 설명한다. 일본이야말로 무속의 나라다. 하부의 수많은 무속으로 천황제가 유지된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의 무속을 그냥 두지 않았다. 민족문화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다. 우리 것을 없애고 일본무속을 심으려 수많은 곳에 신사를 세웠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친일파들을 그대로 고용했다. 같은 사람들이 이번에는 근대화를 방해하는 사회악으로 무속을 몰아냈다. 효율과 성장만 강조되었던 1970년의 새마을운동 때 무속은 더 곤욕을 치렀다. 여전히 무속은 차별당하고 있다. 무당은 두 걸음 물러나고 한 걸음 나아가며 여기까지 왔다.
무속의 사상은 조화다
종교 간의 대화를 진행하면서, 불교도, 기독교도, 유교도 자신들의 의례를 진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당 이지녀는 굿판을 열어 모두를 초대했다. 무속은 세상의 모든 것에서 신령한 영성을 찾는다. 한이 맺혀 죽은 자까지도 신령한 존재가 된다. 하물며 예수며, 부처며, 공자야 말할 것도 없다. ‘오늘 이곳에 여러 종교인들이 왔다고 하니 신령님이 기쁘다고 하신다’. 불교, 기독교, 유교, 천도교가 모두 함께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를 축원했다. 무속은 종교차별을 하지 않는다. 힘이 없으니 어떻게 차별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거대 종교들은 왜 폭력적이고 차별적으로 되었을까? 김 교수는 무교의 사상을 조화라고 소개한다. 조화는 서로에게 기대며 연결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미래의 대안 사상으로 등장하는 에코페미니즘 사상과 닿아있었다.
공동체 만신
사람들은 무속이 개인의 복만을 빌어주는 기복신앙이라고 얕잡아 본다. 무당에게 공동체가 있는가? 사제로서 공동체를 위한 예언자 역할을 하는가? 개인의 복과 공동체의 운명은 나누어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지만, 오랫동안 무당은 어민의 무사함과 풍어를 비는 대동굿을 했고, 마을의 평안과 생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마을 굿을 했다. 마을 공동체의 핵심 역할을 했다. 이지녀 무당은 거친 어부들 앞에서 호령을 하는 무당이 너무 멋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굿이 끝나면 무당들에게 술을 따르고 노래를 하라고 청한다며 속상해했다. 높게도 오르고 낮게도 엎드리며 무당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무당, 만능 예술인?
거대종교의 사제들은 강단에서 설교나 설법을 하고 경전을 읽고, 종교 사상을 설파하며 깨달으라고 말한다. 교리가 발달한 종교일수록 오랫동안 논쟁한다. 정치적 이권 다툼일 때도 있지만 그들에겐 언어가 중요하다. 이지녀 무당은 입은 옷부터 달랐다. 잿빛 한복을 입고 우리를 맞았다. 처마 앞으로 노리개가 아니라 해와 달과 칠성을 손수 수놓아진 긴 천을 늘여 뜨려 덧입었다. 한복으로 이렇게 멋을 부릴 수 있다니 신기했다. 본격적으로 굿을 시작할 때 청가사 홍가사 도안이 있는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복을 담는 자주 바랑을 걸쳤다. 더운 여름날 신당에 서른 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포개어 붙어 앉았다. “천하부정, 지하부정 하늘이 울어 터왕터전, 한맺히고 원 맺힌 것 풀어다오. 대한민국 어지럽게 하는 모든 권력의 부정, 천지에, 자연에 있는 부정을 걷어 주오” 부정문을 노래할 때 상할아버지가 저음으로 ’맞아요‘ 라고 흥얼거리며 추임새를 넣었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무의식을 위로하고, 흥겨운 듯 삐리리 울리는 나팔소리는 현실 의식을 깨웠다. 무당 이지녀는 ’몸이 아픈 사람, 나랏일로 마음이 아픈 이들의 칼이 쑥쑥 들어온다며 밖으로 나가 칼을 던져 풀고 들어왔다. 악한 세력과 싸우며 그들의 목을 베었던 힌두교의 칼리 여신이 떠오른다. 이지녀 무당은 도포자락을 날리며 춤을 추고 참가자 하나하나 머리를 쓰다듬으며 축원했다
이지녀 무당은 또다시 옷을 갈아입고 술과 사과 배 그리고 돈을 띄운 물 항아리 위에 올라가 용사슬을 탄다. “동해 서해 용왕 용태부인 물애기씨 농사로 물을 맑히듯 자연도 깨끗게 하시고 가정도 맑히소서.” 그리고 참가자들에게 떡과 과일을 나눠주며 복떡 팔이를 한다. 이지녀 무당은 말한다. “기독교도 스님도 다양한 종교인들이 와서 기운이 만만치 않다 세상에 이런 날도 왔구나. 기쁘다 행복하다 도와준다 받들어준다. 종교는 달라도 윗대에 가서 만나니 신은 하나다.” 배타적인 기독교를 비판한 종교철학자 존 힉(John Hick)의 주장이기도 하다.
무속을 민족예술로 박제하지 말라
김동리는 무녀도에서 무녀의 집을 잡풀이 무성하고 지렁이와 늙은 개구리가 구물거리고 사람의 인연이 끊이진 도깨비 굴 같다고 묘사한다. 무당혐오의 글이다. 이지녀 무당의 집은 정갈했고, 온갖 종류의 꽃이 피어있었다. 2층 신당에는 여러 장군과 신들의 그림들이 있었다. 이지녀 무당이 직접 그린 것이다. 사형틀이었던 십자가를 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던 기독교인들처럼, 불상을 보며 깨달음을 얻는 불교인처럼 삼신할미나 무서운 얼굴을 한 장군이 그려진 마지그림을 보면서 두려움도 없어지고 위로도 받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굿에 우리나라 민속문화가 서려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어촌, 농촌, 마을의 공동체의 문제뿐 아니라 그 사회의 제도의 그물 속에서 고통 받았던 개인의 삶을 미주알고주알 들어왔던 무속 안에 민중 백성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지녀 무당은 무속을 그저 과거의 문화유산으로만 여긴다고 비판한다.
무속을 살아가고 있는 이지녀는 소리꾼이고 무속인들의 신들을 그려주는 마지화가다. 손수 지은 한복이며, 바느질 공예도 놀랍다. 그는 종합예술인이다. 이지녀 무당은 예술인이라 불리기보다 무당이라 불러달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무당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넘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무속은 그에게 박제된 민속문화가 아니며, 추상화된 역사도 아니다. 날마다 삶에 새 힘을 주는 거룩한 땅이었다.
‘지녀 누나’
굿에는 너무 많은 손이 간다. 떡을 하고, 술을 담그고, 순서에 따라 옷을 갈아있고, 북과 장고와 피리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 바쁜 일들을 발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은 지녀 무당의 남편이었다. ‘누나는 어디있지?’ 그가 이지녀 무당을 부른다. 장구를 치는 상할아버지도 그를 ‘누나’라고 불렀고 첫 번째 강연을 했던 김덕묵 교수도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다. 가까운 사람들을 챙기며 살았던 이지녀 무당의 삶이 엿보인다.
며느리 춤추는 마당
마지막 순서는 이지녀 무당과 숭거타령을 불렀다. 바닷가에서 만선을 기원하며 복을 비는 의례다. 이지녀 무당이 한마디 하면 참가자가 받아 한마디 불렀다. 종교 간의 평화, 후쿠시마 오염수, 민주주의,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공동체가 된 참가자들 알고 있었다. 굿의 마지막은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이다. 속풀이 한풀이가 굿에선 중요하다. 걱정도 근심도 털어버리고 함께 춤을 추었다. 망가지면 어떠랴, 누가 흉을 보랴. 몸으로, 손으로, 발로, 목소리로 의례를 진행하며, 몸을 쓰지 않으면 깊은 것을 알 수 없다던 이지녀 무당의 말은 우리를 춤추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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