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간 대화로 성평등한 세상만들기-천도교】 종교개혁의 길을 제시하는 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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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교와젠더연구소 작성일23-09-14 15:35 조회703회 댓글0건본문
종교인들을 만나면 피곤하다. 일단 포교의 대상이 되면 자신의 것만 옳다고 여기며 암묵적으로 당신은 틀렸다고 강요한다. 그 의도가 아름다울지라도 폭력적이다. 이번 종교간의 대화는 서로에게 배우고 응원하는 시간이었다. 신당, 수도원, 사원, 교회를 횡단하며 우리는 서로의 뺨을 어루만지며, 포옹하며, 함께 먹고, 춤추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의 목적은 이 시대의 자유롭고 선한 일, 성평등을 도모하는 일이다. 지난 5월부터 시작된 <종교간의 대화를 통한 성평등한 세상만들기>의 마지막 만남은 도봉산 자락에 있는 천도교 훈련원 봉황각에서 열렸다.
독립운동기념관 같기도 하고, 근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곳은 의암 손병희가 세운 곳이다. 천도교인들의 신앙 훈련장이기도 했지만, 3.1운동에 참여한 민족 지도자들을 길러낸 곳이기도 하다.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 인내천 사상 등은 역사 교과서를 통해 익히 들었던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 예상했다. “어머나, 천도교가 이런 종교였어요? 정말 놀라워요“ 참가자의 소리가 들린다. 종교간의 대화를 진행하며 각 종단은 한결같이 ‘지금 우리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라고 호소했다. 주변화된 여성의 시선은 종교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한다. 기성 종교가 소수자 혐오의 주체가 되었거나, 여성 신도를 하대하거나 여성이 종교적 주체가 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아선다는 것이다. 처음 종교가 시작될 때는 그렇지 않았다. 가부장제, 자본주의의 때가 덕지덕지 붙어 신앙의 의미가 퇴색되고 왜곡되어 버렸다. 오히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더 위험하다는 말도 들렸다. 천도교는 마치 그런 우리에게 응답하는 것 같았다.
<동학, 천도교, 민중의 종교>
”천도교와 동학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강의를 시작하며 혜원당 김춘성 박사는 우리에게 질문했다. 천도교 제3교조인 손병희선생이 1905년 경술국치 때 동학을 천도교라 이름을 바꾸며 종교적 위상을 확보했다. 천도교는 동학의 맥을 잇는 종교다. 우리나라 근대에 등장했던 천도교는 교세가 가장 큰 종교였으며 사람을 변화시키는 종교였다. 시천주를 외우는 아녀자는 당당하고 어린아이가 도덕을 논하고, 상놈이 양반처럼 품위를 지켰다. 시장 거리에서 사람들은 속이지 않았다. 그들은 불의에 저항하며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근대사에서 가장 강렬하고 뜨거운 그 순간, 동학혁명, 그 횃불을 천도교가 이어가고 있었다.
< 일상에서 찾은 한울님>
종교는 겸손을 강조하고, 자비와 사랑을 이야기한다. 선각자들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집을 떠나 산속으로 광야로 득도의 길을 떠난다. 속세를 떠나 거룩한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그들은 배고픔과 외로움을 견디며 세상을 구하려 했다. 고행한 그들은 억울하겠지만 그 길이 너무 어려워 구도자들은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졌고, 어쩌면 그 시대의 엘리트들에게만 허용된 것이기도 했다. 김춘성(전)천도교종학대학원장)은 천도교는 달랐다고 이야기한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사람이 구도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며 수운 최제우 이야기를 꺼냈다. 최제우는 처음에 다른 구도자들처럼 일상을 등지고 집을 떠났지만, 득도에 실패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득도의 경지에 이르는 신비경험을 한다. “여보, 무슨 일이예요?, 아버지 왜 그러세요?”라며 김춘성은 그 당시 가족이 겪었을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최제우는 가장 먼저 부인을 포교했고, 세습 여종 두 명을 하나는 며느리로 하나는 수양딸로 받아들였다. 모든 인간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 사상을 그의 삶 속에 실천한 것이다. 시천주는 가장 근원적인 평등사상이다. 천도교는 일상을 변화시키며 세상을 바꿔 가는 종교다. 손병희는 옷을 검게 물들여 입었고, 단발하며 검소함과 단정함을 실천했다. 최시형은 땅에 침을 함부로 뱉지 말고, 집에 찾아오는 사람을 한울님처럼 대하라고 한다. 얼핏 보면 생활 도덕처럼 보이지만 시천주를 외우며 영성을 훈련하며 새로운 세상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움직임이다. 모든 사람이 구도자가 되니, 특별히 성직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교인들이 일정 기간 설교도 하고 사회도 본다. 여자들, 농부들, 장사꾼들도 설교단에 설수 있다. 신심이 깊어 감응을 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종교다.
<연민을 넘어, 시천주>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 시집와 귀먹어리로 벙어리로 장님으로 살라며 천대받으며 이름조차 없던 며느리를 한울님이라 불렀다. 시천주 사상을 외우고 품던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바로 그 시대의 여자들이었다. 최시형은 음식을 만들고 의복을 짓고 손님을 대접하고 제사를 감당하는 여성들이 더 많이 도통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남 구녀, 즉 남성보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로 도통하여 사람을 구제하는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설법하였다. 김춘성은 이러한 천도교를 돌봄과 모심이라는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일상속에서 구현하는 종교라고 소개한다. 여성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시대에 천도교가 동덕학교(동덕여대)와 같이 여성고등교육 기관을 운영 지원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 여성의 경험을 신앙적 실천으로 반영한 천도교>
국제협력단체가 해외에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 할 때 최종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라고 한다. 천도교에는 여성 이야기가 많다. 가장 억압받던 그들이 존중받아야 모두가 존중받는다는 것을 그들은 삶의 현장에서 깨달은 것이다. 여성회가 처음 조직되자 이들은 일상의 작은 변화를 실천했다. 염색옷 입기, 단추달기, 쪽머리 하기, 단발하기 등 살림과 생활을 경제적이고 깨끗하게 바꾸어 나갔다. 먹고 입고 생활하는 그 모든 것이 이들에게는 구도의 현장이다. 여성들의 경험이 신앙적 실천에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개인적인 일상에 머물지 않았다. 최시형의 딸 최윤은 천도교 성지 용담정에서 25년간 기거하며 폐허였던 그곳을 성지로 지켜냈다. 박현화(1901-1973)는 남북 단일 정부 수립을 위해 북한에 밀사 자격으로, 비밀 지령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일상을 지켜간 여성들은 역사적인 순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 천도교와 신여성>
이미 1906년에 부인 전도사 제도를 만들어 여성도 남성처럼 포교 일선에서 활약하도록 했다.손병희는 천도교보를 처음 작성할 때, 전국 교구에서 여자들도 남자처럼 이름을 짓게 하였다, 자기 성에 남편의 이름 한글자 그리고 끝으로 여자 이름 화(嬅)자를 붙였다. 출판사업을 통해서 여성을 위한 <부인>, <신여성> 등을 발행하여 여성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신여성은 여성의 사회진출, 여권신장, 의식계발 등, 여성노동과 여성 일자리 등 확대를 지속적으로 다루었다. 26%가 여성들이 집필하고 발간하는 등 여성들의 영역을 확장해 오고 있다. 여성운동이 빛나게 시작되는 그곳에 천도교가 있었다.
< 왜 천도교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을까?>
김춘성은 천도교가 종교임을 강조했다. 종교는 영성이 충만한 사람들이 많을 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물리적 힘과 논리보다 직관과 감수성을 지닌 리더십이 필요하다. 여성이 더욱 중요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어디 천도교에만 해당하는 일이겠는가?
<땅아끼기를 어머니 살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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