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正見, sammadiṭṭhi): '을들의 전쟁' 유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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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6-08-23 16:43 조회3,919회 댓글0건본문
“나 이대 나온 여자야.”
한 영화에 나왔던 이 대사는 우리사회에서 이화여대생의 자부심과 위상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최근 이대생들이 대학 본관을 점거 농성하면서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다.
발단은 고졸 여성의 학위 취득을 위한 미래라이프대학(단과대학)의 설립 추진이었다. 학생들은 ‘학위 장사’, ‘여성의 성역할’로 치부되는 뷰티ㆍ다이어트ㆍ헬스ㆍ요가 등 제한된 과목, 학생증원으로 인한 학습권 침해, 그리고 학교 당국의 일방적인 정책 결정 등을 이유로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이기적이라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소위 이대 ‘된장녀’들의 ‘학벌 프리미엄 독점’, ‘학교 이름으로 갑질’, ‘고졸여성 차별’ 등이 그 이유이다. 어쨌든 학생들은 농성을 통해 ‘설립 철회’라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지만, 학교의 명예를 훼손한 총장 사퇴를 요구하며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이대생의 시위는 1980~90년대 운동권 문화와 사뭇 달랐다.
학생회가 아니라 개별 학생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된 농성은 이대생만으로 한정하고, 참석자들의 민주적 토론과 SNS 소통으로 지지자를 확대해나갔으며, 경찰과의 대치 상태에서도 운동가요가 아닌 소녀시대의 노래를 불렀고, 농성장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의 채증에 대비해서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1600여명의 경찰이 교내에 들어와 학생들을 강제로 끌어낸 ‘폭력 진압’은 80년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 미디어비평 전문지 '미디어오늘'은 지난 7월 18일 "보수언론이 '외부세력 개입' 프레임을 의도적으로 키우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사진제공=미디어오늘. |
또한 최근의 시위는 교묘하게 구성원들 간의 분열을 조장하여 ‘갑ㆍ을의 전쟁’이 아니라 ‘을들의 전쟁’을 유발한다.
지도자에게 저항하는 구성원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이해 당사자가 아니면 모두 ‘외부 불순 세력’ 혹은 ‘전문 시위꾼’으로 낙인찍는 외부세력 차단프레임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이 프레임에 의하면 권력은 자신의 잣대로 선악을 판단하고, 조직원과의 소통이 아니라 복종 여부로 ‘선’과 ‘악’ 혹은 ‘우리 편’과 ‘적’으로 나눈다.
그리고 ‘우리 편’인 집단원만을 보호하며 ‘적’인 상대편을 처벌하기 위해 공권력을 동원한다. 이대 총장이 학내에 공권력을 불러들인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붓다는『앙굿따라니까야』에서 화합하지 못하는 집단을 “다툼이 생겨나고 논쟁을 일삼고,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라고 했다. 소통하지 못하는 집단은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소통할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여덟 가지(八正道) 방법 가운데 ‘정견(正見, sammadiṭṭhi)’이 가장 먼저 나온다. ‘바른 견해’란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발생할 때 그것이 무엇을 조건으로, 왜 발생했는가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고 아는” 정견(正見)은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이대사태는 왜 발생했을까? 총장 개인이나 이대생들의 이기심을 탓할 수 있을까?
대학 졸업을 미루며 일자리를 찾지만 ‘취업 절벽’에 부딪혀 알바를 전전하거나, 졸업장을 손에 쥐는 순간 등록금 융자 때문에 빚쟁이로 전락하기도 한다. ‘흙수저’와 ‘헬조선’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갑자기 학생이 증원되면 줄어드는 장학금과 열악한 학습 환경 등으로 재학생들은 절박감을 느낄 수도 있다.
교육부는 재정 지원을 미끼로 대학의 정원이나 학과목 통폐합까지 간섭하고, 재정 자립이 어려운 사학들은 학교의 명예나 교육의 질보다 교육부가 제시한 30억 지원금이 더 절실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이 이대사태로 폭발했으나, 정부나 학교측은 외부세력 차단프레임으로 문제의 본질을 덮고 구성원들을 분열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구성원들은 바른 견해로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성주 사드반대 집회에서 성주 군민들은 사드가 성주를 포함한 한국 내 어떤 지역에도 설치를 반대한다며 분열 프레임을 극복했다.
이대 집회에서는 졸업생들이 “내가 외부세력이다”, “언니 또 왔다”며 시위에 동참하고, 학부모들이 생필품들을 기부하면서 저항의 순혈주의를 이어갔다. 모든 시위 참가자들이 함께 토론해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수평적인 저항 방식은 놀라운 확장성을 보여주었으며, 1만 여명의 대규모집회로 이어졌다.
붓다는 『쌍윳다니까야』에서 어리석은 자와 슬기로운 자의 차이를 가르친다. 어리석은 자는 잘못을 잘못이라고 보지 못하고, 잘못을 잘못이라고 보고나서도 참회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잘못을 지적해도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반면에 슬기로운 자는 스스로 잘못을 알고, 참회하고, 타인이 잘못을 지적하면 이를 수용한다. 이대 총장이 집단원의 요구를 수용해서 ‘설립 철회’를 발표한 것은 슬기로운 처신이었다.
그리고 이대생들이 수평적인 소통으로 이끌어 낸 승리의 경험들은 학생들은 물론 학교, 더 나아가 국가를 민주적으로 개혁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옥복연(종교와 젠더연구소장)
불교포커스(2016.08.20 ) '여시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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