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등한 배려(Samānattatāya): 촛불집회는 정말 비폭력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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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7-11-17 07:12 조회3,803회 댓글0건본문
동등한 배려(Samānattatāya): 촛불집회는 정말 비폭력적이었나?
사진=‘페미당당’ 페이스북. |
‘장수풍뎅이연구회’ ‘민주묘총’ ‘국경 없는 어항회’ 등 지난 촛불집회에 등장했던 깃발들은 물대포와 화염병이 사라지고 시위문화가 유쾌하게 진화했음을 보여주었다.
누적 인원 1685만, 참여단체 2300개. 설마 탄핵될까 반신반의했지만 비폭력으로 정권을 교체했고 사람들은 ‘촛불 1주년’을 기념했다.
적폐를 청산하라는 광화문 개혁파와 정권 교체를 축하하는 여의도 파티파로 나뉘었지만, 자신들이 이뤄놓은 성과에 모두들 뿌듯해 했다.
그런데 촛불시위는 정말 비폭력이었을까? 아니었다.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 군중들 속에서 성추행과 언어폭력, 외모 비하 등에 시달렸으니 여성들에게 그곳은 여전히 젠더폭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터였다. 백만 명의 시위 중에 ‘엉만튀(여자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가는 성추행)’, ‘슴만튀(여자 가슴을 만지고 도망가는 성추행)’ 제보가 인터넷에 등장했고, 성추행 가해자가 체포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인터넷에서는 이상한 변화가 나타났다. “중요한 시기에 일을 망치지 마라”, “기어 나와 분탕치는 김치녀”, “메갈 물타기”, “선동하지 마라” 등등. 단지 성추행 당한 것을 말했을 뿐인데, 졸지에 같은 편에다 총질하는 무개념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요즘 여자들은 너무 주장이 강해서 조그마한 피해도 못 참는다거나, 국가 운명이 걸렸는데 성추행이 뭐 그리 대수냐며 그냥 참고 넘어가라거나, 엉덩이 좀 만졌다고 닳느냐며 유별나게 난리라거나,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하필 지금 문제를 만드느냐는 등의 반응이 다수였다.
‘나도 당했다’며 위로받으려 했던 여성들의 상처에 소금을 팍팍 뿌리는 격이었다. 여성문제는 중요치 않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남성들의 동맹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부추겼고, 피해여성들은 그래도 세상에 나쁜 남자보다 괜찮은 남자가 더 많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다시 광장으로 나와야 했다.
촛불시위 주최측은 여성, 외모, 장애 등에 대한 차별을 배격하자며 질서 있는 저항, 비폭력 저항을 내세웠다. 성추행에 대해 순간적인 실수나 철딱서니 없는 남자들의 놀이였다고 남성들은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적나라한 젠더 갈등을 지켜보며 여성들은 광장에서 마주치는 남성이 과연 ‘입진보(말만 진보)에 꼴보수’가 아닌지, 혹은 ‘잠재적 성추행자’가 아닌지 빛의 속도로 판단해야만 했다.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을 위한 광장에서 성추행이 정치적 셈법에 따라 은폐되거나 묵인된다면, 과연 여성 인권이 있기나 한 것인가?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는 말로 현대인의 삶을 비유했다. ‘신성한 인간’이라는 뜻을 가진 이 용어는 범죄를 저질렀거나 결함이 있어 신성한 재단에 바칠 수 없는 존재를 말한다.
이 용어는 오늘날 폭력적인 정치에 노출된 채 아무런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사람을 칭하기도 하는데, 마치 성추행 피해사실을 ‘말하기’를 금지당하고, 권리를 침해당해도 처벌을 요구할 수 없는 광장의 여성들과 유사하다.
여성 인권 없는 민주주의는 가당치도 않은데, 성추행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은 공감하고 배려하는 ‘집회 인권’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성차별적인 가치관이나 태도 등을 고치는 것은 쉽지는 않기에, 정부는 연 1회 이상 직장인 성희롱예방교육을 법으로 의무화하고 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하면서까지 성평등을 감시한다.
그렇다면 성차별적인 생각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붓다는 『맛지마니까야』의 ‘사유 중지의 경’에서 자기 안에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일어나면 다섯 가지의 사유 과정을 활용하라고 가르치셨다. 이를 성차별의식 극복과정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마치 숙련된 목수가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제거하는 것처럼, 사소한 일상에서 여성을 위한 배려들을 생활화해서 성평등을 습관화해야 한다.
둘째, 나쁜 생각은 악하고 불건전하고 비난받을 만하고 고통을 유발한다고 지속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성차별적인 생각을 한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하고 그 결과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생각하며, 스스로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세 번째는 마치 눈 있는 자가 안 보려고 눈을 감거나 다른 곳을 쳐다보는 것처럼, 성차별적인 생각을 멀리하고 성평등한 문화를 자주 접해야 한다.
네 번째는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의 원인을 분석해서, 그 흐름을 끊고 중지시켜야 한다.
이렇게 해도 나쁜 생각이 없어지지 않으면, 다섯째, 붓다는 “이빨을 이빨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를 악물고 혀를 깨물 정도로 철저히 노력하라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사를 보면, 성차별은 심각한 사회문제였지만 여성 이슈는 항상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났었다. 1970~80년대는 군사독재정권 타도가, 그 다음은 민주화가, 또 그 다음은 대통령 탄핵이 우선 순위였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 사회에서 성차별은 굳건하게 뿌리내렸고,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은 여전히 젠더폭력으로 고통 받고 있다.
오늘날 시위문화는 과거 20대 남성 중심에서 전 세대 남녀가 참여하는 광장문화로 진화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지난 촛불광장에서 성추행사건들이 있었노라고 인정하자. 피해여성들이 실컷 말하라고 마이크를 내주고 진지하게 들어주자.
그들의 아픔을 공감해주고, 성추행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임을 선포하자. 그리고 평화로운 집회라고 말해도 창피하지 않고, 성숙한 시위문화라고 말해도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도록 최소한, 적어도, 광장에서만큼은 성추행을 추방하자.
옥복연(불교포커스, 여시아사 중에서, 201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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