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arati): 여성혐오 혹은 묻지마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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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6-06-02 15:27 조회3,612회 댓글0건본문
‘내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단지 운이 좋아서다.’ ‘너의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이다.’ 지난 5월 17일 강남역 인근 상가 화장실에서 끔찍하게 살해당한 20대 여성을 추모하며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은 포스트잇의 내용들이다. 2~30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강남역으로 나와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글을 쓰고 추모제를 여는 등, ‘강남역 10번 출구’는 여성들의 추모와 저항의 공간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동안 매스컴이나 인터넷상에서 논란이 되던 ‘여성혐오’를 우리 사회의 가장 핫한 이슈로 만들었다. 사실 그동안 인터넷상에 ‘김치녀(돈 많은 남자만 좋아하는 여자)’ ‘된장녀(명품만 좋아하는 여자)’ ‘김여사(자동차 운전 시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내는 여자)’ ‘삼일한(여자는 3일에 한 번씩 때려야 한다)’ ‘맘충(개념이 없는 엄마)’ 등 여성혐오적인 용어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2015년 여성과 관련된 검색어 빅데이터 분석 결과 연관어 1위가 폭력·범죄·살인, 2위가 여성 혐오·여성비하였으니, 우리 사회에서 여성혐오가 확대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성을 싫어하고 혐오하는 여성혐오는 남성우월사상과 남녀 이중적인 성규범에서 출발한다. ‘여자에게 무시당했다’는 가해자의 말은 남자보다 열등한 여자에게까지 무시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의미를 포함하며, 이는 일부 매스컴서 이번 사건을 ‘강남역 화장실녀’라고 그 죽음을 비하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강남 유흥가에서 새벽에’ 발생했다는 일부 뉴스의 서술은 피해 여성을 ‘새벽까지 유흥가에 돌아다니는’ 나쁜 여자로 낙인찍는다. 착한 여자는 밤이면 집에 있어야 하는데, 밤에 나다니는 여자는 유흥가를 찾아다니는 나쁜 여자이므로 처벌받는다(죽을 수 있다)는 남성중심의 성규범을 여성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이다. 지금의 2~30대는 딸이라고 차별받던 4~50대와는 달리 남성과 똑같이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으며 성장해 왔다. 하지만 여풍(女風)을 불러온 알파걸들은 유리벽과 유리천장에 절망했고, 지하철이나 직장내 성희롱, 소라넷사이트처럼 일상에서 만연한 성폭력은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공포임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여성들의 공통된 피해 경험은 집단화된 강력한 연대로 발전하면서 여성혐오 반대를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다. 이 사건이 정신분열증에 의한 묻지마 범죄라거나 여성혐오범죄라는 주장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지금 젊은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여성도 남성과 평등하게 대우받고 안전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며, 그동안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구조적인 여성 폭력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경전에 의하면 붓다는 여성을 폭력으로 제압하려는 나라는 발전할 수 없다고 ‘밧지족의 일곱 가지 불퇴전의 원리’로 가르치셨다. 즉 아자따삿뚜왕이 밧지족을 정복하려 하자, 붓다께서는 밧지족이 자주 모이고, 화합하고, 법을 존중하고, 노인을 공경하고, 의례를 준수하고, 거룩한 님을 존중하며, “어떠한 훌륭한 가문의 여인들과 훌륭한 가문의 소녀들이라도 그녀들을 끌어내어 폭력으로 제압하지 않는다면” 결코 정복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여인들과 소녀들을 폭력으로 제압하면 번영할 수 없으므로 여성 보호는 국가 발전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여성혐오는 단순히 논쟁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다. 여성 혐오가 없으면 좋고, 있으면 할 수 없다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여성이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성혐오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붓다의 가르침처럼 국가가 앞장서 성평등한 법·제도를 만들어야 하고, 관습이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남녀 차별적인 가치관을 하루 빨리 평등하게 고치는 다양한 노력들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불자라면 국가가 여성혐오 극복에 앞장서도록 요구해야 한다. 또한 일상에서 자행되는 여성혐오에 동조하거나 묵인해서도, 침묵해서도 안된다. 여성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여성혐오에 분노하고,여성혐오를 혐오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내 가정에서, 내 일터에서부터,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 옥복연(현대불교 2016.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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