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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dosa): 분노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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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6-09-27 22:50 조회3,5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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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dosa): 분노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분노하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맞섰던 프랑스의 투사이자 외교관이었던 93세 스테판 에셀, 그는 자국의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며 젊은이들에게 “분노하라”고 외쳤다.

사회 양극화, 이민자 차별, 금권정치가 횡횡하는 현실에서, 무관심이야말로 죄악이라며 불의에 분노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그의 저서는 프랑스에서 ‘분노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와 유사하게 오래 전에 분노를 말한 시인도 있다. 19세기 러시아 시인 푸시킨은 현실이 고통스럽지만 슬픔에도 끝이 있기에 기쁨의 날이 곧 올 거라며,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했다.

명문 귀족계급 자제인 그는 반봉건ㆍ반차르 혁명에 동참해서 진보적 자유주의운동을 펼쳤고, 차르가 그의 작품을 직접 검열하고 오랜 유배 생활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격려하며 위안과 희망을 심어 주었고, 오늘날까지 러시아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존경받고 있다.

그런데 푸시킨의 말처럼 현실의 고통을 참고 견디면 희망찬 미래가 올까?

최근 우리 사회에는 ‘위험사회’ ‘혐오사회’ ‘피로사회’에 이어 ‘분노사회’라는 말이 등장했다. 우리를 분노케 하는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경주 지진에 무대책인 정부, 청년 실업, 세월호 사건, 사법부 비리, 사드 배치 등은 분노의 감정조차 마비될 정도이다. 또한 앞지르기를 했다고 야구 방망이로 앞차를 내려치는 남성,

집나간 부인 때문에 성당에서 기도하는 낯선 여성을 살해한 중국 관광객, 백화점 주차장에서 비정규직 청년에게 불친절하다며 갑질하는 여성, 대학 단톡방의 성희롱을 문제제기하는 여대생에게 분노하는 남학생 등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분노조절 장애자를 양산하고 있으니, 가히 오늘날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국민 정서가 ‘분노’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면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분노를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분노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분노는 사람들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상황을 변화시킬 참여 의지를 만들고,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억압적인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민중의 분노가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 등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분노할 일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

교육부 고위간부의 “민중은 개ㆍ돼지”라며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는 발언이나, 사드 배치 철회를 요구하는 성주지역 여성들에게 “술집하고 다방하고 그런 것들”이라고 말하는 성주군수의 발언에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분노가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하고 변화를 위한 사회 참여 의지를 북돋우고, 그 결과 정의로운 사회가 도래하면 나 자신도 행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분노를 무조건 억누를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분노의 물꼬를 올바른 방향으로 터 주어야 한다. 에셀이나 푸시킨의 삶을 보면 ‘분노하라’는 말은 ‘불의에 항거하여 참여하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에셀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인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행위라고까지 주장한다.

불교에서 분노(dosa)는 개개인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나타나는 불덩어리와 같은 것이므로,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사회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 받는다면, 분노해야 한다.

왜냐면 사회적 분노는 ‘만인의 이익을 위한, 만인의 행복을 위한’ 실천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앙굿다라 니까야』는 ‘팔재계’ 가운데 ‘불살생계’가 단지 살생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보호하는 적극적인 개념임을 가르친다.

사회적 분노는 “몽둥이를 내려놓고 칼을 내려놓는” 비폭력적 방식으로 “부끄러움을 알고 자비심을 일으키고, 일체의 생명을 이롭게 하고 애민히 여기며” 실천해야 한다.

정의로운 분노를 실천할지라도, 붓다는 일상에서 반드시 ‘사띠(알아차림)’를 놓치지 말 것을 강조한다. 분노가 탐욕이나 어리석음으로 변하면서 분노의 원인과 대상을 놓칠 수도 있고, 대상에 대한 증오심으로 스스로를 제어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자라면 불의에 분노하자. 행동하자. 그리고 깨어 있자.

그런데, 오늘처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김용택 님의 시처럼 정의의 분노도 내려놓고 잠시 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느라고 애들 쓴다. 오늘은 시도 읽지 말고 모두 그냥 쉬어라.
맑은 가을 하늘가에 서서 시드는 햇볕이나 발로 툭툭 차며 놀아라.”

-김용택 ‘쉬는 날’ 전문-


옥복연(불교포커스 2016.09.23 '여시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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