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간 대화로 성평등한 세상만들기-한반도 여신】 우리 여신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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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교와젠더연구소 작성일23-08-23 11:10 조회726회 댓글0건본문
<종교간 대화로 성평등한 세상만들기 제 7강 -한반도여신>
우리 여신의 탄생
<두 여신학자 그리고 아카데미 할미>
남산의 타말파 연구소에서 한국의 여신들이라는 주제로 일곱 번째 종교 간의 대화가 열렸다.
첫 강의를 맡은 김신명숙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 여신학 박사다. 필자는 2016년 네덜란드 소피아 여신 연구소 애니 반더미어 소장이 한국에 왔을 때 경주 유적지와 국립박물관 등을 김신박사와 동행한 적이 있다. 두 여신학자는 헤어졌던 자매가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고, 알, 구멍, 달, 새, 나무 등 천지를 온통 여신의 흔적이라고 함께 기뻐했다. 필자는 그들이 코에 붙이면 코걸이, 귀에 붙이면 귀걸이처럼 이것저것에 여신의 의미를 과장하는 것이 아닌가 의아했다. 사람들은 구약의 아세라여신 등, 여신 이야기는 그저 우상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왜 여신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후 필자는 김신박사를 포함해 페미니스트 학자들과 <다시 태어나는 여신> 등을 번역하며 <아카데미 할미>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여신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강의는 그 연장선에서 이해한 것이다.
<신은 남성의 얼굴을 가졌다>
기독교는 오랫동안 여신을 대표적인 우상으로 비판해왔다.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1512)라는 작품속에서 신을 늙은 백인 남성으로 그렸을 때 사람들은 감동만 했지, 이 그림이 신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막아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듯하다. 예수는 자신을 사회의 작은 자와 일치시켰다. 톨스토이는 거리의 아이와 과부의 모습 속에서 신을 찾았으며 루터도 나무, 별, 새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다. 신학자 몰트만은 아우구슈비츠 수용소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신을 찾는다. 신은 어머니, 아버지, 아이, 이방인, 노동자, 퀴어, 고난받는 자, 햇살 그리고 나무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흑인예수, 퀴어예수, 민중의 하나님... 권력 있는 늙은 백인 남자가 신이 아니라는 반란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여신의 흔적들>
종교는 사회의 정치 문화 경제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치를 제공하고, 인식론의 기초가 되는 존재론의 영역이다. 페미니스트 김신명숙 박사가 여신연구에 몰두한 것은 가부장이라는 사회제도를 판 갈이 하는 급진적 운동이다. 김신박사는 단도직입적으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여신신앙이 보편적이었다고 소개한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80%가 여산신이었으나 가부장제 사회에서 산신이 할아버지로 바뀌었다, 여전히 노고산(老姑山), 대모산(大母山) 등의 이름에 여신의 흔적이 남아있고 봉화산 도당 내부에는 산신할머니와 동자상이 모셔져 있어 이곳의 산신도 여신이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신박사는 한국의 여신은 개인의 복을 빌어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호국신이었다고 소개한다. 국가 제도나 정치에 여성적 힘이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로 들렸다. 아테네의 아테나 여신, 독일 게르마니아 여신, 프랑스 혁명에 등장한 자유의 여신이 있듯, 경복궁 뒷산의 백악산은 서울을 지키는 지산이며 수호신 정녀부인 있었다. 임진왜란때 정녀부인 사당이 없어졌고 지금은 남자산신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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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신명숙 박사가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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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녀부인의 남편인 국사신은 남산의 국사당에 모셔졌는데, 1925년에 일본인들이 남산에 신궁을 지으며 산정상에 있는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겨버려 정녀부인과 국사가 더 이상 마주보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김신박사는 강릉 단오제때 대관령 국사성황신과 국사여성황사를 만나게하는 제례를 지내며 축제를 하는 것처럼 서울의 정녀부인과 국사신이 만나는 축제 등을 열어 여신문화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디 그뿐이랴, 전쟁, 지배 그리고 착취라는 가부장적 위계적 가치가 지배하는 국가를 돌봄과 나눔 그리고 생명을 중시하는 여성적 가치를 회복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겸재의 백악부아암(負兒巖)도를 보면 중간에 삐죽 나온 바위가 보이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아이를 업고가는 여인 바위로 불렀고 여신신앙의 흔적이다. 서울의 부암동은 여신을 의미하는 부침바위로 유명한데 모두 파괴되었고 이름만 남았다. 인왕산의 부침바위는 자연의 거대한 알구멍을 지닌 바위여신으로 여겼는데, 불교화되어 선바위라 부른다. 선불교의 선자로 바꾸고 형상도 중이 장삼을 입고 있는 모습 같다느니 하는 서사로 바꾸어버렸다고 김신박사는 비판했다.
< 바위와 알구멍>
서양에서 고대 여신상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 남성 인류학자들은 가슴과 엉덩이가 강조된 조그마한 신상이 섹스토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집을 떠나 연구할 수 있는 용감한 여성 인류학자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먹을 것도 귀하고 교통도 발전하지 않았고 그 많은 노동을 직접 해야 하는 시기에 여자들은 뚱뚱할 수 없다.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하는 것은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숭배한 흔적이라 해석했다. 상징언어가 여신상에 나타난 것이다.
가부장적 유교사회가 여신문화를 요사한 것으로 비판하고 파괴할 때, 민중문화는 노골적으로 그것을 표현하기보다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김신박사는 특히 나무와 바위에 나타난 여신의 상징성을 설명했다. ’바위에 보면 구멍이 있다. 그것은 성혈이다. 전국 곳곳에 알구멍, 알바위, 알터가 있다. 구멍은 여성의 몸 한가운데 있는 그 구멍이다. 생명이 만들어지고 태어나는 그곳‘ 구멍은 여신 신앙의 흔적이다. 또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알도 여신신앙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어디에 가도 민중들은 그곳에 돌탑도 쌓고 기도를 했다.
사람들은 여성성기를 말하며 불편해한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성기를 모욕하는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을 감시하고 부정하고 착취하고 도구화하였다. 그러나 김신박사는 여성성기가 성스러운 것이라 재차 강조한다. ’고대 시대에는 여자의 몸에서 일어나는 창조, 재생산을 보고 신비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가부장제 사회는 창조를 여성의 몸이 아니라 말로 이뤄졌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비판했다. 마지막에 우리는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자궁속을 상상하고 기억하며, 여자들의 몸이 갖는 그 창조의 연결을 다시 경험하였다.
<Cancer into Dancer>
쉬운여자, 미류
아름다운 흐름, 아름다운 몰입, 미류 이미숙박사에겐 무슨 이야기든 무슨 부탁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쉬운여자다. 상대방이 쉽게 대할 수 있는 존재,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가 중요하게 여겼던 품성이다. 그는 무엇이든 긍정하고 칭찬한다. 만약 내가 날고 싶다고 해도 그는 응원할 것 같다. 값싼 칭찬일까? 그의 무한 긍정, 무한 응원, 무한 포용에는 삶의 이야기가 있다. <몸 꿈 춤 공간 미류>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꽃다운 스물 여덟에 유방암 3기 판정을 받고 3일만에 가슴제거 수술을 받았다. 잃어버린 한쪽가슴은 그의 삶에 균형을 깨뜨리며 그를 침몰시키려 했다. 그는 암재발, 한쪽가슴에 대한 트라우마로 움추린채 <백경 모비딕, 1851>을 연구해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에게 백경은 신성, 페미니즘 그리고 에로티시즘의 이야기였다.
<From Cancer to Dancer>
그러나 여전히 한쪽 가슴이 없는 몸은 풀어야 할 숙제였고 극복해야 할 산이고, 그를 저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무거운 돌이었다. 그는 타말파 연구소로 유학을 가서 표현예술치유 집중 훈련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해갔다. 안나 할프린의 배움을 통해 몸을 움직이며 세포하나, 발끝, 손끝의 움직임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신비한 몸을 만났다. 콤플랙스였던 그 몸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박사는 2022년에는 코로나를 뚫고 아프로디테 여신의 탄생지인 사이프러스를 찾았다. 그는 여신의 포옹을 받고 30년의 유방암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삶은 문학속의 여신에서 가슴속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만나고 자기 자신이 여신이 되는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몸에 대한 콤플렉스는 모든 여자의 숙제다. 그가 어리든 나이들든, 늘씬하든 뚱뚱하든 가부장제 사회는 늘 ’도달할 수 없는 몸‘을 여성들에게 요구한다. 이미숙박사의 여행이 어디 그만의 여행이겠는가? 용감한 전사처럼 고단한 여행을 피하지 않고 지나온 그가 우리들 앞에서 우리와 소통하는 춤을 이끌고 있다.
이박사는 춤을 추기전 중앙에 꽃을 놓아 우리를 축복했다. 우리는. 태양이 남성의 상징이라는 편견을 깨며 선댄스를 추었고, 느릅나무 댄스 (Elm Dance)를 추었다. 1986년 체르노빌 핵사고 당시 인간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인공구름으로 핵분진을 모아 느릅나무 숲으로 이동시켰다. 핵비를 맞으며 죽어간 느릅나무와 그곳의 생명들과 연결하는 추모하는 춤이다. 그리고 희랍인 조르바 댄스를 추며 엇박자와 반전의 춤으로 주춤하고 후퇴하지만 유쾌한 인생을 표현했다. 암에서 춤으로 나아간 그는 여신을 기억과 유물에서 우리들의 삶 속으로 불러내고 있었다.
출처: 당당뉴스 2023년 08월 18일, 최형미(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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