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기생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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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2-12-06 17:22 조회3,754회 댓글0건본문
`2000년 성노예전범 국제법정'을 실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한 인물은 마쓰이 야요리(66)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일본 네트워크'(바우넷) 대표다.
그녀는 98년 유엔 인권회의에서 이 법정을 제안하고 2년이 넘는 준비기간을 거쳐 전쟁범죄를 다루는 최초의 `민간 양심법정'을 실현시켰다.
94년까지 33년동안 <아사히신문> 기자로 일했던 마쓰이는 73년 위안부 문제가 기생관광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한국 여성의 지적을 듣고 처음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마츠이 야요리는 ‘아시아 여성들의 모임’과 함께 1977년 ‘아시아와 여성해방’ 운동을 시작하며 기관지 <아시아와 여성해방>을 창간한다.
이 창간호에 실린 “아시아와 여성해방 우리들의 선언문”을 읽어보면,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가해’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하고 나아가 ‘가해자로서의 여성’의 정체성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가해자로서의 여성의 위치를 돌아보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의 여성해방도 없다’는 이 선언으로 시작된 일본의 ‘아시아와 여성해방’ 운동의 활동은 매우 활발하고 의미있게 진행되고 있다.
이들이 이른바 ‘기생관광’으로 불리는 일본남성의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원정 성매매’ 문제를 규탄하고 저지하는 활동을 벌인 것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 외 한국, 타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여성노동자에 대한 일본계 기업의 착취, ‘개발도상국’ 내 인구억제 피임시술 등을 지적하며, ‘아시아와 여성해방’ 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아시아와 여성해방’ 운동이 해온 모든 활동들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경제대국으로 아시아에 군림하며 아시아의 나라에 공장을 세워 앞다투어 이익을 챙기는 일본 기업들, 아시아의 관광객을 가장하여 돈 다발을 들고 성매매 관광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본남성들. 그 남성들의 출장가방에 콘돔을 살짝 넣어두는 것이 ‘아내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사회 분위기.
거슬러 올라가면, 아시아와 아시아 여성을 총으로 착취해 온 일본 제국주의 역사가 있었다. 우리는 일본 사회와 일본 여성이 이 점을 진지하게 반성하기를 원했다.
이처럼 여성들 스스로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가해’를 고발해 내는 ‘아시아와 여성해방’ 운동은 현재진행형이다.
또한 이 운동은 아시아에서 일본에 버금가는 경제력과 정치력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의 전쟁범죄에 깊숙이 개입해있고, ‘원정 성매매’를 비롯한 아시아 여성 성 착취에 앞장서고 있다.
마쓰이 야요리는 이러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국경을 넘은 ‘여성연대’,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여성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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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기생관광(Sexual Slavery in Korea)
1. 한국의 기생관광
기생이란 단어는 식민지 이전 조선에서 독립적이고 지적인 여성을 가리켰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조선 여성들은 일본군성노예로 끌려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군이 한국을 점령하면서 가난 때문에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게 되었는데, 이후로 한국에서 기생이란 용어는 prostitute로 바뀌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이후 일본의 공창제도는 처음에는 조선내의 일본인 거류지에 도입되었으며, 청일전쟁 이후 거류지의 일본인이 증가함과 동시에 거류지의 윤락가가 더욱 성행하였고, 일본당국은 한일 합방후 식민지 조선에 공창제도를 확립하게 된다.
식민지 조선에 실시된 공창제도는 애초에 조선 거류 일본민단이 유곽을 설치하여 세금을 확보하여 이를 민단의 재정 확보를 위해서, 또한 성병 관리의 효율적인 통제를 위하여 만들어졌으나, 식민지 여성의 성적, 인종적, 계급적 여성 착취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1) 일본 내의 공창의 연령 하한이 18세였지만 조선의 기생과 창기의 연령 하한은 만 15세,
2) 사창을 단속하여 공창에 편입시키면서 공창제도를 전국적으로 확대,
3) 일본과 달리 조선의 많은 유곽들이 시내에 산재해, 식민지 조선에 매음을 조장하고 공창을 대중화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이러한 공창 장려 정책은 청일 전쟁후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정책으로 이어지면서 식민지국 여성의 억압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후로 일본인들은 기생이란 용어를 다르게 사용했는데,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일본인들이 미국에 관광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한국 관광을 하였으며, 1973년 한국에 들어오는 오십만의 관광객중 80%가 일본인 남성이었다.
약 2000여명의 일본 남성이 매일 김포공항에 들어왔는데, 일본 여행사들은 “완벽한 기생의 서비스, 남성의 천국, 환상적인 남한의 기생파티”등의 문구로 관광객을 모집했는데, 일본남성들은 한국 기생의 자기희생적이고 헌신적인 모습을 좋아했다.
약 8000여명의 기생들 가운데 2000여명이 접객원 증명서(official registration certification)을 가지고 있었다. 이 증명서는 국제관광협회 요정과에서 요정에 나가는 여성들에게 발급해주었는데, 증명서를 발급하기에 앞서 이 여성들의 나이, 미모, 가정환경, 학력, 신원보증서, 주민등록등본 등의 신상조사서가 꾸며지고, 이른바 교양강좌 과정을 마쳐야 했다.
교육이 끝나면 증명서가 나오고, 이 증명서를 소지한 여성들에게는 관광요원 또는 종사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국 내에서 이런 노골적인 요정 기생 등록에 대해 논란이 생기자 당국은 “보건증”으로 대체시켰는데, 내용은 옛날 접객원증과 똑같고 발급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암시장에서 이 증명서가 매매되기도 했다.
요정의 기생들이 일본인들과 동침하고자 할 때 챙겨두어야 하는 증명서가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보건증과 비슷한 내용이 기입되어 있는 요정 측에서 발부한 증명서이다.
요정 기생들은 호텔 프론트에 가서 자기의 보건증과 함께 ‘딱지’로 불리는 요정발행의 증명서를 호텔 측에 넘겨주는데, 이 딱지가 바로 ‘전표’ 역할을 했다.
즉 호텔 측은 매춘을 묵인하는 대가로 요정 기생으로부터 받은 딱지를 모아 시내 각 요정별로 분류, 월말결재를 받아 현찰을 챙겼다. 기생관광은 한국의 경제 부흥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2. 기생관광에 대한 국가의 역할
해방과 분단, 건국과 전쟁등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매춘 문제는 정치적 이슈가 되지 못하였는데, 4.19나 5.16의 정치적 변혁과정에서 쿠데타 세력들은 ‘구악을 일소한다’는 명분아래 매춘 문제에 대한 관련 법규를 정비하게 되며, 1961년 윤락행위방지법이 제정된다.
이 시기는 급격한 산업화 정책으로 농촌경제는 파괴되어 갔으며, 농촌의 여성들은 가난이 지겨워서, 혹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었고, 그들 가운데 많은 숫자는 성매매산업으로 유입된다.
정부는 1970년대 경제개발을 위한 산업화를 통해 자본과 기술의 축적을 강조하면서, 정권 연장을 위하여 안보의 논리와 공업화, 도시화, 농촌 근대화를 주창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외의존적인 경제와 사회적 불평등은 자립경제의 걸림돌이 되었는데, 정부는 외채의 압박을 줄이고 무역적자폭을 해소시키기 위한 정책 자원으로 관광산업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또한 급격한 산업화 정책으로 농촌경제는 파괴되어 갔으며, 농촌의 여성들은 가난이 지겨워서, 혹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었고, 그들 가운데 많은 숫자는 성매매산업으로 유입된다. 한국 정부는 관광진흥정책에 입각하여 관광진흥법에 근거를 두었던 국제관광협회(현재 한국관광협회)에 요정과를 설치하고 관광기생들과 관광요정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개입한다.
사실상 이 부서의 업무는 매춘허가증이라고 할 수 있는 접객원 증명서를 발부하고 교양교육을 실시하면서 전국 관광기생들의 행정적 존재근거를 합법화하는 일이었다.
3. 국가에 의해 강요된 성매매 (state power compels prostitution)
일본 정부는 1945년 패전 후 일본 여성들이나 아이들이 성에 굶주린 미군병사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정부의 제정적인 후원과 미군 당국의 합의하에 성매매 여성들을 모집하고 미군의 오락을 위해 성매매 집장촌을 설립하였다.
이는 성매매 여성을 법과 질서, 공공 보건을 위한 도구로 정책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성병이 만연하여 많은 미군들이 성병에 감염됨. 1946년 점령미군사령부는 합법적인 성매매는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집장촌이 유지되었다.
=> 여성들은 점령군 남성들을 위해 정부에 의해서 희생양이 되었는데, 이는 한국의 성매 매여성과 유사한 억압의 형태.
4. 국경을 넘은 여성들의 연대
한국에서는 1973 한국 기독교 연합을 중심으로 기생 관광에 대한 비판 담론 등장. 무지하고 왜곡된 일본 남성에 의한 여성들은 오로지 부인이라는 이름의 가정내 하인으로, 혹은 남성의 성욕을 만족시켜주는 바걸이나 맛사지 팔러, 기생 등으로 나누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의 기생관광에 대한 죄책감도 없다.
일본 여성들은 한국의 기생에 대해 자신의 남편을 뺏어간 경쟁 대상으로, 혹은 성접대를 하는 외국 여성에 대해 우월성을 느끼기도 하면서 합법적 부인이라는 데 자부심을 가지기도 하는데, 일본 여성들은 문제의 본질을 보고 일본 남성의 남성우월주의를 깨어야 한다.
물론 기생관광은 일본과 한국의 정체 경제적 관계 속에서의 원인도 있지만, 한국을 경멸하는 것보다는 일본 남성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인간적인 경각심을 가진 혁명을 통해서만 기생관광을 끝낼 수 있다.
-이 글은 Matsui Yayori의 "Sexual Slavery in Korea"를 번역,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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