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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한인, 소환되는 기억과 현재적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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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3-09-14 14:19 조회8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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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한인, 소환되는 기억과 현재적 과제

김백영 (서울대학교)

『미나리』, 『파친코』, 『H마트에서 울다』 등 최근 몇 년간 재외한인의 이주사를 소재로 한 문학, 영화, 드라마 작품들이 연이어 국제적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디아스포라 한인들의 고난과 역경의 이야기가 이제는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작품으로 형상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750만 명에 달하는 ‘재외한인’은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문화적 혼종체이다. 과거 디아스포라 한인이 겪었던 고달픈 역사는 역설적으로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다문화·다인종 이주민 포용 문제를 시급한 사회적·국가적 과제로 제기하고 있다.

<그림 1> 신순남의 『레퀴엠(진혼곡)』 중 일부
출처: 국립현대미술관https://www.mmca.go.kr/

한류와 재외한인

최근 몇 년간 재외한인의 이주사를 소재로 한 문학, 영화, 드라마 작품들이 연이어 전 세계 독자들과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 미나리처럼 뿌리 내린 어느 재미한인(Korean American) 가족사를 담담하게 그려낸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2020), 4세대에 걸친 재일한인 가족사를 다룬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Min Jin Lee)의 2017년작 장편소설과 그것을 드라마화하여 전 세계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파친코(Pachinko)』(2022), 그리고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엄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한국 음식 이야기로 그려낸 한국계 미국인 뮤지션 미셸 자우너(Michelle Zauner)의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2022, 문학동네)까지.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국계 미국인 가족이 낯선 미국의 시골에서 농장을 만드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했으며, 조연을 맡았던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로 오스카상을 수상하는 등 아카데미상 후보작 발표에서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식민시기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 가족의 4대에 걸친 일대기를 다룬 『파친코』는 원작 소설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고, 2017년 뉴욕타임스, BBC 등에서 ‘올해의 책 10’으로 선정되었다.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겪어야 했던 멸시와 차별 속에서 그나마 그들에게 허용되었던 파친코 사업을 통해 삶을 영위했던 ‘올드커머 자이니치’들의 신산했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H마트에만 가면 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H마트에서 울다』는 엄마를 잃은 딸의 상실감과 작가 자신의 성장기를 통해 재미한인의 문화적 정체성과 세대 간 갈등 문제를 사소설적인 솔직하고 감동적인 문장으로 풀어내어 독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이들 작품을 ‘한류’에 포함할 수 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K-컬처의 힘을 실감할 수 있는 현상 중 하나임은 분명한 것 같다. 일본문화와 미국문화를 모방하던 과거 문화후진국 한국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바야흐로 한국 음악, 한국 영화, 한국 음식이 전 세계로부터 호감을 얻고 찬탄을 받는 선진 문화로 각광받고 있다. 과거 나라 잃은 열등한 피식민 하층민으로, 어눌한 콩글리쉬를 구사하는 냄새나는 유색인종으로, 끔찍한 전란을 겪은 극동의 가난한 분단국가 출신으로, 먹고 살기 위해 낯선 이국땅으로 이주하여 비참한 신세를 견뎌내야만 했던 디아스포라 한인들의 고난과 역경의 이야기가 이제는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작품으로 형상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돌이켜보면 해외한인의 수난사가 빼어난 작품성을 띤 예술로 형상화된 것이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중앙아시아 한인 화가인 신순남 화백을 들 수 있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핍박받는 고려인 수난사를 그림으로 표현해 영국 BBC방송에서 ‘아시아의 피카소’라는 극찬을 받은 고려인 1세대로 1997년에는 과천 국립미술관에서 기획전시가 개최되기도 했다. 신순남은 1937년 연해주를 출발한 가축운반용 화물열차에 20일 넘게 실려와 우즈베키스탄의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진 고려인 중 한 사람으로, 당시 그는 겨우 10살짜리 소년이었다. 그가 살아온 세월을 담은 97분짜리 다큐멘터리 『하늘색 고향』은 부모 없이 자란 이 소년이 유일한 혈육이었던 여동생을 강제 이주 직후에 잃은 상실감을 그림으로 승화시켜 가슴 아픈 가족사와 민족사를 캔버스에 새겨넣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핍박과 차별, 기아와 전염병으로 가족을 잃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채 세월을 버텨온 무수히 많은 소년 신순남의 ‘유랑기’가 담겨져 있다. 그의 작품 중 연작그림 『레퀴엠(진혼곡)』은 모든 수난사를 축약하고 있어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여기에는 모국 문화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바탕으로 조선 문화와 러시아 문화가 혼재된 양상으로 재현된 죽음과 애도의 이미지들이 형상화되어 있어 디아스포라 한인의 ‘초국적 문화정체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BTS와 블랙핑크에 열광하고, 김치와 김밥, 떡볶이와 비빔밥에 매료된 서구 청년들의 모습이나, 과거 변두리 소수민족 거주지였던 코리아타운이 인파가 몰리는 ‘핫플’이 되어 문화적 활기가 넘치는 모습을 보면 한류와 재외한인의 관계가 전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역도산(力道山; 金信洛)과 김희로(金禧老)의 무용담이나 장훈(張本勲; 하리모토 이사오)의 3천 안타와 조치훈의 ‘대삼관’에 열광하면서도 ‘조총련’이라는 기표에는 본능적인 레드 콤플렉스가 작동하여 움츠려들었던 암울했던 과거, 미국으로 떠나 연락이 두절되어버린 친지들을 그리며 『나성(羅城)에 가면』을 불렀던 지나간 옛 시절을 떠올려보면 오늘날 K-컬처와 재외한인의 괄목할 만한 위상 변화는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근현대 한인이주의 역사

외교부에서 발간한 『재외동포 현황 2021』에 따르면 2021년 현재 재외교포는 732만여 명에 달한다.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 거주 인구를 대략 7천 5백만으로 잡으면, 한민족 인구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하는 한국인들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재외동포를 지역별로 집계하면 중국에 2,350,422명, 일본에 818,865명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에 316만여 명이 분포하고 있으며, 미국에 2,633,777명, 캐나다에 237,364명으로 북미지역에 287만여 명이 분포한다. 그밖에 유럽에 677,156명, 남아시아·태평양지역에 489,420명, 중남미지역에 90,289명, 중동지역에 18,379명, 아프리카지역에 9,471명이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재외한인교포 수는 중국의 화교, 이스라엘의 해외유태인, 이탈리아 해외교포 다음으로 많아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규모의 해외교포 인구에 해당한다.

<그림 2> 2021년 재외동포 분포현황(193개국 732만여 명)
출처: 코리안넷https://www.korean.net/

이처럼 해외한인의 규모가 큰 것은 그만큼 가까운 과거 한민족의 역사가 고통과 수난의 연속이었음을 방증한다. 초창기 해외이주의 대다수가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조건에 떠밀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근대 이후 한국이 경험했던 국망(國亡)과 식민화, 분단과 전쟁, 독재와 탄압으로 인해 고향(고국)에서 살기 어려웠던 사람들의 아픈 역사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통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한민족 해외이주사는 크게 다섯 개의 국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국면은 조선시대 말기인 1860~1910년의 시기다. 세도정치를 배경으로 한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연이은 흉년으로 인한 기근과 빈곤으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민란이 빈발했던 시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한반도 북부지역 주민들 중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역(만주)이나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특히 1869년의 흉년으로 많은 농민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한 기록이 있다. 1902년에는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로 최초의 노동이민이 시작되었다. 이들 이민은 대부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 수급을 위해 신설된 수민원(綏民院)을 통해 최초로 정부의 보호하에 이루어진 집단적 노동이민이었다. 수민원을 통한 하와이 노동이민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면서 중단된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자 일부 우국지사들이 유민(流民)의 대열에 합류하여 러시아와 중국으로 이주하여 해외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두 번째 국면은 일제 식민통치기인 1910~1945년의 시기다.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저항하려는 많은 우국지사들이 한반도를 떠나 해외에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고자 이주했다. 특히 국권을 강탈당한 1910년과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이후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일부 엘리트층에 국한되지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청년들도 크게 늘어났다. 일제의 농업 식민화 정책으로 조선의 농업 생산성은 향상되었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항상적인 빈곤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이는 농민들의 집단이주의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기에 일본이 경제호황을 맞으면서 노동력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일자리를 찾아 현해탄을 건너가는 식민지 조선인들이 1920년대부터 크게 늘어났다. 처음 도일(渡日)한 사람들은 고향에 처자를 둔 농민들로 단기간 일본에서 돈벌이를 하고 돌아오려는 임시노동자들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노동자의 수는 증가했고 체류기간도 장기화되었다.

만주사변(1931) 이후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되고 일본의 만주 개발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만주의 농촌지역 개발에 조선인들을 활용하려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만주를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인식하여 만주로 이주하는 조선인들이 크게 늘어났다. 이 시기 만주지역으로 집단이주한 한인들은 약 50만 명에 달했는데 이들 중 절반 정도가 농촌지역 집단이주자들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제국 일본이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부족한 노동력 수급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일본열도는 물론, 일본의 해외영토 곳곳으로 조선인들이 노무자로 동원되었다. 동원된 조선인들은 광산, 건설현장, 군수공장 등지에서 일했으며, 일제 말기에는 부족한 노동력과 병력을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로 징발하는 징용과 징병 정책이 시행되기도 했다. 일제하 해외로 이주한 한인들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상당 수가 한반도로 귀환했지만, 현지에 잔류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1945년 8월 당시 일본열도에 거주하는 한인 인구는 약 230만 명에 달했는데, 이들 중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일본에 남게 된 약 60만 명이 재일동포의 1세대를 이루게 되었다.

세 번째 국면은 1945년~1960년대 초반까지다. 이 시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공식적인 이민정책은 수립되지 못한 시기에 해당한다. 1950~53년 6.25전쟁으로 수많은 전쟁고아가 생겨났으며,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면서 미군과 결혼한 여성과 이들이 출산한 혼혈아도 생겨났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하에 1950~64년까지 약 6천 명의 여성들이 미군 배우자를 따라서 태평양을 건너갔으며, 약 5천 명의 어린이가 미국의 가정으로 입양되어 도미(渡美)하였다. 당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학생들도 6천 명 정도로 집계되는데,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미국에 정착했다.

네 번째 국면은 1960년대 중반~1997년까지로 한국 정부가 이민정책을 수립하여 남미, 서유럽, 중동, 북미 각지로 집단이민과 계약이민의 흐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 이민정책의 목적은 잉여인구를 외국으로 내보내어 인구압력을 줄이려는 것과 교포 송금을 통해 외화벌이를 노린 것으로 요약된다. 1960년대 초부터 외화벌이를 위해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애초에는 3년 계약의 기술연수생 자격으로 이주했으나 8천여 명의 광부와 1만여 명의 간호사 대부분이 계약기간 만료 후 독일에 남았다. 이들은 이후 독일 이외의 유럽 각국에 흩어져 오늘날 유럽의 한인사회를 형성하였다.

20세기 한인 해외이주사에 획을 그은 것은 1965년 미국이 이민법을 개정하여 아시아인종에 대해 문호를 개방한 정책적 변화이다. 이때부터 미국과 캐나다로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늘어나게 되었으며, 중남미로의 이주도 시작되었다. 특히 북미지역으로의 이민자들은 대도시에 거주하는 고학력, 화이트칼라층이 많았다. 북미지역으로의 이민은 1970~80년대에 걸쳐 지속적인 증가세를 띠다가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을 정점으로 소강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재외교포 이민사에 또 하나의 큰 계기가 된 것은 베트남전쟁이다. 베트남에는 파월 한국군 장병뿐만 아니라 건설회사 노동자들도 적지 않게 진출했고, 베트남 주재 미국회사에도 많은 한인들이 고용되었다. 1975년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 중동지역 건설 붐이 일어나자 많은 건설회사 노동자들이 중동으로 이주하였고, 일부 사람들은 동남아시아 각국으로 분산하여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마지막 다섯 번째 국면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의 시기이다.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국사회가 발전하면서 ’88서울올림픽 이후 감소추세를 보이던 한국인 해외이주는 외환위기 이후 다시 증가세로 돌아서게 된다. 이 시기에는 미국으로의 이주는 상대적으로 줄어든 반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의 이주가 증가했다. 또한 종래 해외이민의 주종을 이루었던 가족초청 이주는 그 비중이 줄어든 반면, 사업이주와 취업이주가 본격적인 증가세를 띠게 된다. 이 시기에는 한국의 국력이 신장되고 글로벌화와 정보화가 본격화되면서 한국 기업의 해외진출과 해외유학도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재외한인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

이처럼 이주의 시기와 국면, 이주 지역에 따라 재외한인동포는 매우 다른 정체성을 띤다. 구한말과 일제 초기의 한인들은 주로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만주로 이주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대다수가 일본열도나 중국 만주 등지로 이주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남북미대륙과 유럽 등 서구문화권으로의 이민자들이 크게 늘어났다. 재외동포들은 제각기 이질적인 생활환경과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현지 문화와 혼합된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했지만, 대부분 거주국의 모범적 소수민족이 되었다. 특히 한인들은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유별나게 높아서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다음 세대의 세대간 계층 상승이동 비율이 높은 편에 속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구한말 연해주로 떠났다가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정착한 사람들, 국권을 빼앗기자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이국땅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은 사람들, 식민시기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 차별의 땅 일본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한 사람들, 전쟁으로 고아가 되어 영문도 모른 채 해외입양되거나 생계를 위해 기지촌 여성이 되었다가 미군 남성과 인연을 맺어 한국을 떠난 여성들, 외화벌이를 위해 간호사로, 광부로, 건설노동자로 해외에 파견되어 정착한 사람들 등등. 곡절 많고 신산했던 한국 근현대사의 한 귀퉁이에서 저마다 가족과 고향을 등지는 모진 결단을 내리고 모국을 떠나 낯선 이역만리에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야만 했던 이들이 오늘날 재외한인의 원류를 형성했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아 황무지에서 새 삶을 일군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한민족’, ‘동포’라는 개념, 혈연공동체의 뿌리찾기나 민족문화의 원형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도 좋을까. 식민화와 국망의 현실 속에서, 그리고 되찾은 국민국가의 공동체 의식을 결집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와 일국사적 관점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던 시절이 있었음은 수긍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재외한인’은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문화적 혼종체이다. 우리가 고답적인 ‘단일민족’ 신화를 고집한다면, 자본주의 세계경제 성립 이래 세계사가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되면서 형성된 전 지구적 이주와 이민, 문화적 혼성과 융합의 복잡다단한 현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한류 붐에는 열광하면서도 해외한인의 문화적 이질성이나 그들이 직면한 현실적 난관에 대해서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면, 국수주의적인 한민족사의 내러티브를 개방적인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로 확장하여 세계시민주의적 상상력의 원천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K-컬처의 문화적 확장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에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아 한국을 찾아온 다문화·다인종 이주자에 대해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과거 식민지 제국을 경영했던 서구열강들이 수많은 차별과 배제의 역사적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차츰차츰 갖춰온 다문화 포용의 제도적·문화적 장치에서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거나 배워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이제는 인구절벽이 바꾸기 어려운 굳건한 현실이 되어 이주민 문호개방 이외에는 현실적 대안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주민 포용 문제는 시급한 국가적 숙제로 제기되고 있다. 바야흐로 나/우리와 다른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의 진지한 존재론적 고민이 필요한 시대다.

 

 

>저자: 김백영, 출처: 2013.09.11  아시아브리프 3권 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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