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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영광과 수난의 역사 가로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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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4-03-07 11:20 조회6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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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불교사의 흥망성쇠에서 배운다


한국불교, 영광과 수난의 역사 가로지르다


1. 서언

한국불교 1,700년 역사를 시대적으로 구분하면 전래 · 발전기(전래-신라 중대), 유지·침체기(신라 하대-고려 시대), 쇠퇴기(조선시대-승니 도성출입금지 해제), 그리고 회복기(승니 도성출입금지 해제-현재)로 나눌 수 있다. 한국불교의 역사에서 흥성(興盛)의 시대로 볼 수 있는 시기는 전래 · 발전기와 유지기로 삼국시대에서 고려 중기까지이다. 반면에 쇠퇴의 시대는 침체기와 쇠퇴기로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는 불교의 국가적 수용과 더불어 사회 적 실천이 뛰어났다. 많은 승려의 교학 연구에 힘입어 중국불교와 다른 독창성도 창출하였다. 그리고 불교 대중화의 영향으로 다양한 계층의 적극적인 신행이 행해지면서 고대불교를 융성하게 하였다. 고려조 역시 국교로 숭상하였으며, 많은 의례와 법회를 통해 사회적 저변을 넓혔다. 또한 승과와 승직을 통해 불교를 제도권으로 수용하여 체계적인 관리를 하였다. 그리고 천태종과 조계종 등 종파가 설립되어 교리적 체계와 사상적 범주를 넓혔다.

그러나 고려말 유입된 유교가 조선조에 국시(國是)로 숭상되면서 불교가 배척되었다. 교세와 사회적 역할이 약해진 불교는 사회 를 선도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하였고, 대중들의 기복신앙으로 명맥이 유지되는 쇠퇴의 시대를 걸었다.광복 후 한국불교는 일제에 의해 훼손된 정체성과 승풍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고,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통해 현대적 불교문화를 발전시켰다. 반면에 지속된 종단 갈등은 불교의 사회적 역량을 축 소시켰다.

우리가 지난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통해 당면한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얻 는 데 있다. 한국불교는 다시 흥성의 시대로 도약하여야 하는데 미 래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등불이 되는 것은 지난 역사의 교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불교 흥망성쇠의 배경과 교훈을 살펴보는 것은 새로운 시대로 가기 위해 현재의 좌 표를 확인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2. 한국불교 흥망성쇠의 배경과 양상

1) 한국불교 흥성의 배경과 양상

(1) 전래·발전기의 흥성 배경과 양상

앞서 제시한 한국불교 시대 구분에서 전래 · 발전기와 유지기가 흥성의 시대이다. 시기적으로 삼국시대, 통일신라 그리고 고려 중 기 무렵이다. 고려불교가 1170년 무신의 난 이후 급격하게 퇴조한 다는 점에서 1097년 의천에 의해 천태종이 설립되고, 뒤이어 조계종이 설립되는 12세기 초이다. 이 기간 한국불교가 흥성의 시대가 될 수 있었던 배경과 양상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국가적인 수용과 군주의 사회적 실천이 뛰어났다. 불교가 전래될 때 삼국의 군주와 신하들은 전교승(傳敎僧)을 성문까지 나가 맞아들일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궁중에 머물도록 하였고, 짧은 기간에 사찰을 창건하고 수행자를 배출하였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불교사상에서 얻을 수 있는 국가적인 이익 때문이었다. 불교의 업설과 전륜성왕 사상을 통해 자신들이 통치자가 될 수 있는 당위성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수 있고, 새로운 내세관으로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주들은 불교의 이념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면서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은 황룡사 장육존상을 조성하며 신라는 부처님과 인연이 있다는 불연국토사상(佛緣國土思想)을 강조하였다. 그런 의식으로 신라인들은 전쟁에 나가는 것은  곧 부처님의 나라를 지키는 성스러운 일로 여겼다. 싸움에서 자신의 생명이 끝 나면 바로 부처님의 세계에 왕생한다는 신앙적 귀의처를 갖게 되었 다. 이런 신앙적 염원은 민중의 단결심을 이끌어 훗날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

불교 의례 역시 국난 극복에 도움을 주면서 사회적 토대를 굳건히 하였다. 문무왕 때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자 명랑법사를 불러 불교의 힘으로 타개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명을 받은 명랑은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문두루비법으로 당의 군사를 물리쳤다.

두 번째, 구법승을 비롯하여 많은 승려의 교학 연구는 중국불교와 다른 독창성을 창출하였다. 삼국의 많은 승려는 중국과 인도로 불교를 배우러 갔다. 그들은 불교를 연구하면서 때론 중국교학 발전에 기여하였고, 멀리 인도에서도 삼국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한국 불교학의 독창성 역시 이 무렵에 이루어졌다. 국내에서 활 약한 원효, 경흥, 그리고 태현은 한국불교 안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3대 저술가이다. 연구 저술의 서명으로 볼 때 불교학 전체가 연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불교학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역량이었다. 원효는 경전의 중요한 내용을 정리한다는 의미로써 종요(宗要)라 는 표현을 썼다. 이런 원효의 연구를 당나라 고승들은 해동소(海東 疎)라고 부르며 존중하였다. 《금강삼매경소》는 당나라 승려에 의해 이것은 보살의 경지에서만 나올 수 있는 저술이므로 당연히 논 이란 명칭을 붙여야 한다고 해서 《금강삼매경론》으로 불렸다.

경흥은 신문왕 때 국사였다.《법화경》을 비롯하여  《열반경》《반야경》 《무량수경》 《미륵경》 그리고 《금광명경》 등 많은 경전의 주석서를 집필하였다. 많은 저술에도 불구하고 현재 전해지는 것은《무량수경연의술문찬》 3권과 《삼미륵경소》 1권뿐이다. 태현은 경덕왕 때 고승이다.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쳤던 원측의 제자 도증(道證)이 귀국하자 그에게 배웠다. 교학 연구에 투철하였 던 그는 다방면으로 학식이 뛰어났다. 특히 원측에서 이어지는 유식학에 뛰어나 유가조(瑜伽祖)라고 불렸다.

세 번째, 불교 대중화에 힘입어 다양한 계층의 적극적 신행이 형성되었다. 불교 대중화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교화 활동이다. 전래 초기 불교 신앙은 왕실과 귀족이 중심이었다. 불법의 심오함을 배울 수 있는 곳도, 교리를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주는 고승도 드물었다. 서민들을 위해 활동하는 수행자가 나타나면서 불교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대중화의 주역으로 혜숙, 혜공, 대안, 그리고 원효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승려가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생활을 멀리하고 시골 촌락, 조그만 절, 시골 장터에 머물면서 그곳의 주민들을 교화하였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불교의 진리를 알려주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신라의 대중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불법을 알게 되었다. 

그런 활동에 힘입어 신라의 불자들은 현재의 몸으로 부처가 되고 싶은 염원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현신성불신앙(現身成佛信仰) 으로 수행의 주체는 수행자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성불의 목표를 이룬 모습에는 신분과 여건에 좌절하지 않고 신앙적 성취를 이루어내는 진실함이 담겨 있다. 이런 신라인들의 구도적 자세는 불성을 찾아 성불하는 불교의 지향점과 일치하는 신행이라 할 수 있다.

(2) 유지기의 흥성 배경과 양상

유지기에 해당되는 고려 초 불교 흥성의 배경 역시 앞선 고대불 교와 같이 군주의 신앙심과 고승들의 노력이라 할 수 있다. 918년 6월 왕위에 오른 왕건은 혼란한 후삼국 시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불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919년 3월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면서 법왕사, 자운사, 왕륜사, 내제석원, 사나사, 보제사, 신흥사, 문수사, 원통사, 그리고 지장사 등 10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불교에서 10은 만수(滿數)를 상징한다. 다함이 없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의미이기 때문에 불보살의 가피로 고려의 번영이 영원하기를 바란 것이다.

왕건은 신라 말 도선국사의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에서 많은 영 향을 받았다. 우리나라 지형에서 악하고 흉한 지역에 사원과 탑을 세워 지세를 눌러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는 사상으로 고려 시대 사원 창건과 불탑 조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죽음을 앞두고는 후손들에게 훈요십조를 남겼다. 이 가운데 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은 제1조, 제2조, 그리고 제6조였다. 자신이 정립한 불교 정책의 지속을 기대한 것이다.

고려조 수행자 역시 적극적인 구법과 교화 활동으로 고려 사회와 불교 발전에 기여하였다. 중국 구법을 마친 현휘(玄暉)는 태조의 요청으로 국사가 된 후 충주 정토사에 머물면서 법을 펼치며 선교 융합을 도모하였다. 경보(慶甫)와 찬유(璨幽) 등도 중국으로 가 조동종 개창자인 동산양개의 제자에게 수학하였다. 그들에 의해 그런 선풍이 전해져 고려초 선종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고려 초 승정과 교단 통일에 기여한 사람은 균여(均如)였다. 일찍부터 화엄에 조예 가 깊었던 그는 후삼국 시대 분열되었던 화엄종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광종 19년(968) 왕사가 된 탄문(坦文)은 귀법사(歸法寺) 에 주석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는 교종과 선종 양쪽의 지지를 받아 광종 26년(975) 보원사로 돌아올 때 양종의 승려 1,000여 명에 게 영접받을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광종은 승과와 왕·국사 제도를 실행하여 불교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였다. 승과는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왕 · 국사는 국정에 자문하고 민심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승과를 통해 선발된 선승을 중국 오월 지역에 유학을 보냈다. 혜거(惠居) 와 문도 영준(英俊) 그리고 석초(釋超)와 지종(智宗) 등이 수학하 고, 선종이면서 교학과의 융합을 지향한 법안종을 유입하였다.

고려의 교학은 중국불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오월왕 전숙(錢 俶)이 고려에 천태 관련 전적을 요구하자 광종 11년(960) 전적과 함 께 제관(諦觀)을 보냈다. 그는 중국에서 10여 년을 보내며 《천태사 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하여 중국 천태학 중흥에 기여한 뒤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그 무렵 의통(義通) 역시 중국에 들어가 천태학을 연구하여 중국 천태종 16조가 될 정도로 활약이 컸다. 그 역시 귀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고려조 천태종과 조계종이 설립되었다. 각각의 소의 경론과 수 행 실천이 체계화되어 종파적 특색을 형성하였다. 의천은 흥왕사에 서 《고려교장》을 발간한 후 1094년 해인사, 1096년 흥왕사, 그리고 1097년 국청사가 낙성되자 주지로 부임하였다. 이곳에서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왕의 명으로 천태종에 참여한 승려가 700여 명, 직접 의천의 문하로 찾아온 승려가 300여 명이었다. 그런 교세에 힘입어 숙종 5년(1101) 교종과 선종에 국한되었던 승과에 천태종이 포함되었다.

그 후 선종도 소의 경전과 종지 종풍을 표방하며 종파 설립을 본격화하였다. 선종은 선적종(禪寂宗)으로 지칭되다가 인종 10년 (1132) 무렵까지 조계업(曹溪業)으로 불렸다. 그후 명종 2년 (1172)에 세워진 대감국사 탄연의 비명에 ‘고려국조계종굴산하단 속사대감국사’이라 해서 조계종 명칭이 등장하고 있다. 그가 의종 12년(1158) 입적한 것으로 볼 때 활동 중에 조계종이 설립되면서 거기에 속했던 것을 의미한다.

그에 앞서 조계종 설립에 공헌한 승려들을 보면 혜소국사(慧昭國師) 담진(曇眞)이 1076년 중국 유학하여 임제종의 도진 문하에서 수학하고, 중국 황제 신종에게 법원 대사라는 호를 받고 문종 34년 (1080) 귀국하여, 예종 2년(1107), 왕사에 이어 예종 9년에 국사로책봉되었다.  이런 활동을 문도들이 계승하면서 자연스럽게 조계종 설립의 분위기를 조성하였을 것이다.

담진의 제자 탄연과 지인도 조계종 설립에 기여하였다. 탄연은 숙종 9년(1104), 승과에 합격하고 이후 조계종으로 활약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인종 9년(1131), 대선사가 되고, 인종 23년(1145), 왕사로 임명되어 조계종을 이끌며 후학을 제접하였다. 지인 역시 선종의 발전에 노력하였다. 당시 원응국사 학일도 선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볼 때 조계종 설립에 힘을 보탰을 것으로 짐작 된다.

2) 한국불교 쇠퇴의 배경과 양상

(1) 고려조 불교 쇠퇴의 배경과 양상

고려조 불교의 쇠퇴는 1170년 무신의 난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예후는 그보다 앞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고려 건국에 도움을 준 지방 호족들은 점차 중앙의 문벌귀족으 로 성장하였다.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적 재원을 가진 귀족이 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사회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불교계를 악용하였다. 많은 토지를 후손에게 세습하고 싶은 귀족들은 원당을 세웠다. 원당의 주지는 당연히 귀족의 자손들이 맡았다. 이곳에 토지를 기증하여 사원전을 만든 것은 세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자연의 아들 덕소가 현화사의 주지를 맡자 이곳은 인주 이씨의 원당처럼 되었다. 이자겸의 아들 의장이 수좌로 임명된 후 현화사 주지를 맡았다. 그런 관계가 형성되면서 사찰의 경제권은 점점 사유화되고 악용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벌귀족의 불교계 장악은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대토지와 노비의 소유는 풍족한 생활을 보장하였다. 호화롭고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국가의 불사는 불교계 안에 과소비의 풍조를 가져왔다. 

고려 시대 무신의 난은 1170년 보현원에서 무신들이 문신들은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의종을 폐하고 거제도로 귀양 보내고 왕의 동생 익양공(翼陽公)을 명종으로 옹립하며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다.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불교계를 이용하였다. 정치권력과 밀착된 불교계는 점점 부를 축적하였고, 지나친 사원경제는 대중들로부터 비난받았다. 그런 모습에 의식있는 승려들은 불교 본연의 모습을 상실하였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내었지만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승정의 문란이 지속되자 유교가 전면으 로 등장하였고 유학자의 비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충선왕은 왕위를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북경에서 만권당(萬卷堂) 을 개설하여 많은 책을 수집하는 한편, 고려의 유학자를 불러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복위 후에는 공자를 모시는 석전(釋 奠)을 정례로 하였고, 설총과 최치원을 유종(儒宗)으로 받들며 유학을 확장하였다. 고려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유학자는 안향과 이제현이었다. 그들은 불교의 윤리보다는 유교의 윤리를 더 높이 평가하고 불교 비판에 앞장섰다. 안향은 왕에게 유교적 치국방향에 대해 조언하고 장학재단 양현고(養賢庫)를 설립하여 그 기금으로 공자를 모신 대성전을 세웠다.

이제현은 만권당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고려 사회에 유교의 위민사상과 실천윤리를 강조하면서 불교계를 비판하였다. 불교의 가르침은 효사상에 반하므로 이를 따르지 말고, 효와 인본주의를 함양할 수 있는 경서의 교육을 주장하였다. 이제현의 영향을 받은 이고와 그의 아들 이색은 불교에 우호적이었지만 본연의 자세에 어긋난 행위에 대해서는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이색은 공민왕 원년(1352), ‘중세 이래 승도가 더욱 늘어나 오교 양종이 이익을 위한 소굴이 되었으며 냇가와 산골까지 절이 많아지게 되었다.

승려들이 점점 비루해지고 놀고먹는 이가 많으니 이미 승도가 된 자들은 도첩(度牒)을 주어야 하지만 도첩이 없는 자들은 군대에 충당하여야 한다. 새로 창건되는 사찰은 모두 철거하고 철거하지 않으면 즉시 수령에게 죄를 묻고 양민의 출가를 금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색의 영향을 받은 정몽주 역시 유교는 음식과 남녀의 문제 등 일상의 일을 행하는 데 있음을 밝히고, 상대적으로 불교는 관공적 멸(觀空寂滅)을 종지로 삼기 때문에 평상의 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인식의 정몽주는 뒤에 왕사 임명에 반대하였고, 불교를 배척하다 처벌받는 유생들을 변호하였다.

정도전은 우왕 초 원나라 사신 영접을 반대하다 회진현으로 유배 되었다. 사면 후 삼각산 아래에 움막을 짓고 경서를 강의하면서 이 단을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공양왕이 즉위한 후 사찰을 궁궐보다 더 높게 세우고 법석을 여는 것을 비판하는 한편, 불사의 비용을 줄이자고 주장하였다. 실권이 없던 공양왕은 자신의 불안한 위치를 떨치기 위해 더욱 불교 신앙에 의지하였다. 김초는 그런 불교 숭배에 대해 일상을 무시하고 괴이함을 좋아하는 것으로 평가절하하였다. 그로 인해 천재지변이 일어나면서 정사가 바르지 못하고, 형벌이 제도에 어긋나 고, 인재 등용이 적절하지 못해 백성들의 원통과 억울함이 산적하고, 그리고 나라의 재정이 안정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성균관 생원 박초 역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불교에 대한 소견을 상소하였다.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군신 간의 윤리, 부자간의 윤리, 부부간의 윤리가 이 세상의 기본 윤리인데 불교에는 그런 윤리의식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배불 상소에 불교계는 제대로 대응할 힘이 없었다. 공양왕은 2년(1390) 2월 찬영(粲英)을 왕사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성균관 박사 정몽주는 불교의 가르침은 평상의 도가 될 수 없으니 믿지 말라고 건의하였다. 좌상시 윤소종과 대사헌 성석린은 대궐 앞에 엎드려 반대하였다. 공양왕은 왕사 임명에 주저하였고 개성에 왔던 찬영은 궁궐에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불의 분위기 속에서 비판의 소리를 낸 것은 오히려 유학자였다. 이색의 문하였던 이첨이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색 역시 사대부들의 주장이 선대의 법을 허무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 들의 태형을 상소하였다. 이런 주장에 힘입어 공양왕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김초의 죄를 물었다. 그러나 형조와 정몽주의 반대로 대신을 능욕한 죄만 처벌받았다.

(2) 조선조 불교의 쇠퇴의 배경과 양상

조선조 불교의 쇠퇴는 국가적인 배불정책에 기인한다. 1392년 7 월 건국된 조선은 유교를 치국이념으로 삼았다. 군주와 관료들은 유교를 확고히 하기 위해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조선조 배불정책은 태조 때 시작하여 중종 때 대부분 완결되었다. 태조가 즉위하자 관료들은 출가를 억압하기 위해 강력한 도첩제를 주장하였다. 양반의 자제로 승려가 되려는 자는 오승포 100필, 양인은 150필, 천민은 200필을 소재지 관사에 바치고 도첩을 발급받아 출가하는 내용이었다.

재정적 의무를 주어 마음대로 출가하는 자를 엄하게 다스리려는 목적이었다. 이 제안은 전면적으로 실시되지 않았지만, 불교계를 장악할 목적과 국가 경영을 위한 양인 확보를 위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불교 배척의 분위기가 거세지면서 무(無)도첩승들이 증가하였다. 비용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이 임의로 출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의도적으로 국가의 세금이나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 불가로 들어가는 자가 있었다. 그들의 비행은 사회적인 문제가 되 었다.

관료들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오는 불사의 금지를 청원하였다. 승도의 민폐와 비행 사례를 들어 단속과 함께 도첩제의 엄격한 적용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불사에 사용되는 비용을 아껴 국가 재정을 비축하자고 건의하였다. 승려들의 구재 행위도 금지되었다. 이는 승려들이 중앙과 지방의 대소 관사와 결당하여 사원 관리나 인경(印經) 등의 불사를 계기로 관사나 백성들에게 물품을 징수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었다. 사원경제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희사를 금지하여 불교 세력을 축소 하려는 의도였다.

연등회와 팔관회 그리고 백고좌법회 등 불교 의례의 폐지 주장도 이어졌다. 태조는 이에 대해 도당에 명하여 시설된 연원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금지에 대해 어떤 조치도 하교하지 않아 전면적으로 실시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선을 건국한 지배층은 일반 대중 속에 뿌리내린 불교 의례마저 없애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은 새로운 도읍 건설과 종묘를 조영하는 데 승려들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농민을 동원하면 농사의 어려 움이 있는데 승려들은 가정이 없어 공사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 속에는 다분히 승려에 대한 멸시와 함께 억불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건국 초기 불교 배척은 후대로 이어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태종은 즉위하면서 다음과 같은 불교 배척을 강행하였다.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국유로 몰수하고 군자(軍資)와 관사(官舍)에 분배하였다. 강력한 도첩제 실시, 왕사, 국사 제도의 철폐와 함께, 11종의 종파를 7종으로 축소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능사 제도를 금지하였다. 이와 같은 태종의 배불 정책을 이어받은 세종 역시 미진한 부분까지 완결 짓는 철저한 억압과 배척의 정책을 폈다. 7종의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합하였고, 내불당 철폐, 연소자의 출가 금지, 그리고 사대문 안에 비구와 비구니의 출입을 금지하는 도성출입금지 등을 실시하여 태종보다 더 심한 배불정책을 폈다.

이런 조선조의 배불 정책은 세조 때 잠시 흥불의 분위기로 멈추었으나 그 뒤 성종, 연산군, 중종 역시 배불의 기조를 이어갔다. 성 종은 간경도감을 폐지하고,26) 경국대전을 완성하면서 법적인 차원 에서 불교를 배척할 수 있게 되었다. 연산군 역시 사원경제의 몰수와 출가 금지 등을 통해 불교를 억압하였다. 중종은 조선조 불교 쇠퇴를 완결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군주이다. 가장 먼저 행해진 배불 정책은 전통적으로 왕실에서 행하던 불교 신앙의 혁파였다. 왕실은 불교를 배척하면서도 기신재는 관행처럼 사찰에서 실시하였다. 중종이 즉위하자 이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처음에는 거부하였으나 10여 년의 논의 끝에 결국 중종 11년(1516) 6월 폐지되어 왕실의 불교 신앙 전통이 단절되었다.

두 번째, 사원경제의 혁파였다. 이제까지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할 때 왕실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사찰은 제외되었다. 그러나 중종 때 양종의 노비와 전지를 몰수하여 내수사에 속하게 하였다. 그 후에도 사찰의 전답을 몰수하여 그 지역 향교에 속하게 하였다. 왕실과 관련이 있음을 상징하는 왕패가 있는 사찰 가운데 능침이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사찰의 노비들은 관청에 소속시켰다. 

세 번째, 승과를 폐지하였다. 조선조 승과는 미약하게 계승되다 가 연산군 때 와서 미루어졌다. 중종 2년(1507) 정묘에 실행되어야 할 승과가 실시되지 않았다. 승과의 폐지는 인재의 등용 면에서도 타격이지만 조선조에서 승려가 속한 종파의 구별을 어렵게 하였다. 조선조 승과는 선교 양종으로 응시하는 것을 근거로 승려들의 소속 종파를 구별하였다. 그러나 승과가 폐지됨으로써 선종과 교종의 구 별이 불분명하게 된 것이다.중종 11년(1516) 12월 경국대전의 도승조가 삭제되었다. 도승조는 세조 때 조선의 통치를 법제화하면서 국가적으로 출가를 인정하 는 상징이었다. 이런 조항이 삭제되었다는 것은 법적으로 승려가 되는 길마저 없어진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재정적 수탈을 넘어 총체적 탄압을 받았다. 전국 사 찰의 중창을 엄금하였고 《동국여지승람》 소재 이외의 사찰은 모두 혁파되었다. 도성 내에 존재하던 원각사 재목을 가져다 공관 수선에 사용하였다. 군역을 피해 출가한 승려들을 대대적으로 추쇄하여 군적에 보충하는 조치들이 이어졌다.

3. 현대 한국불교의 상황

1) 현대 한국불교의 발전 양상

1876년 개항으로 한국에 진출한 일제는 침략 의도를 감추기 위해 일본불교를 앞세웠다. 한일합방 이후 사찰령으로 한국불교를 통제 하였다. 그 결과 한국불교는 자주권을 상실하였고, 전통적인 의례가 변질되면서 친일불교의 한계에 갇히게 되었다. 1945년 8월 광복 후 종권을 인수한 혁신 인물들은 일제에 의해 변질된 한국불교 전통을 회복하기 위해 8월 21일 조선불교혁신준비 위원회를 구성했다. 종단의 명칭을 조선불교조계종에서 조선불교로 바꿨다. 행정구역인 13개 도에 따라 교구를 두고 교무원을 신설하였다. 중앙에 총무원, 심의기관, 그리고 감찰 기관을 설치하였다.

조선불교는 일제강점기 식민정책과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변질된 한국불교를 회복시키려고 하였다. 1946년 10월 교정 박한영은 해인사에 재단법인 가야총림을 세우고 11월 6일 조실로 효봉을 위촉하였다. 효봉은 1946년 7월 송광사 삼일선원에서 3년을 기한으로시작한 정혜결사를 해인사로 옮겨 함께하였다. 총림은 특별선원과 보통선원으로 나누어 정진하면서 강원까지 부설하여 도제를 교육하였다. 한국불교의 교지인 원효 성사의 동체 대비 대승행원과 보조국사의 정혜결사의 성적등지를 체관하기 위 하여 수선실을 두었다. 다음 강학실을 두어 이행상응(理行相應)과 선교상즉(禪敎相卽)에 입각하여 수학의 핵심이 되도록 직절교학 (直絶敎學)을 전수하였다. 그리고 범패회를 두어 진감국사 이후 옛날부터 전해지는 한국불교 범음 전통을 교육하였다. 그런 노력의 결과 1947년 음력 3월 43명이 구족계를 품수하였다. 총무원은 총림을 재단법인으로 하여 교단 수행기관으로 삼았다. 사무국장 1인, 주지 1인, 법주 1인, 강사 1인, 범패사(梵唄師) 1 인, 그리고 약간의 사무원을 두었다. 

그러나 1950년 6·25가 발발하 자 가야총림은 더 이상의 운영되지 못했다. 이 무렵 성철에 의해 교단 차원의 모범총림과 별도로 봉암사결사가 추진되었다. 선종 본래의 종풍을 살리고 옛 총림의 법도를 이 땅에 되살리려는 생각이었다. 1947년 가을 뜻을 같이하는 도반들과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할 것을 약속 하였다. 봉암사 결사는 처음 성철을 비롯하여 자운, 운봉, 보문 4인이 시 작하였다. 그 후 보안, 법응이 참여하여 10여 명으로 늘었다. 1948년 청담을 비롯하여 향곡, 월산, 혜암, 법전, 성수 등이 참여하여 20 여 명에 이르렀다. 그 후 3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들은 부처님 법대로 살려는 엄격한 실천궁행을 하기 위해 공주규약(共住規約) 을 제정하였다. 당시 승가의 분위기에서 본다면 획기적인 일이었지만 이런 시도 역시 6·25 전쟁 때문에 중단되었다.

전쟁이 다소 소강상태에 이른 1952년 봄 대의(大義)는 만암에게 수좌들의 수행 공간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1953년 10월 금오가 비구승들이 마음놓고 수행할 수 있는 사찰을 요구하면서 정화운동이 태동하였다. 여기에 1954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1차 유시가 더해져 본격화되었다. 오랜 시간 지속된 정화운동은 1962년 2월 12일 마침내 불교재건 비상종회가 개회되어 종단을 대한불교조계종으로 하는 등 종명과 종지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3월 25일 수정된 종헌을 재차 확정 공포하였고, 1962년 4월 1일 중앙종회는 종정에 비구측의 이효봉, 총무원장에 대처 측의 임석진을 선출하였다.

그 후 비상 종회 의석수 배분 문제로 다시 양분되었지만 통합종단 설립은 한국불교 정체성 정립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고 종단의 포교 정책과 신행 단체의 조직과 활동의 결과 19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한국불교 교세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런 추세에 힘입어 한국불교의 문화적 역량도 크게 발전하였다. 역점을 둔 사업은 어려운 한문 경전을 대중들이 읽기 쉽도록 번역하는 역경이었다. 1962년 11월 제5회 중앙종회에서 3대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학교에 동국역경원을 두었다. 7월 개원식을 하였고 초대 원장은 운허가 맡았다. 이후 1984년 11월 재단법인 동국역경사업진흥회가 설립되었고, 1995년 역경후원회 창립 등을 거쳐 2001년 마침내 고려대장경 완역이 이루어졌다. 역경과 더불어 1970, 80년대 이후 불교계에 많은 출판사가 설립되어 다양한 학술서적과 교양서적의 출 판이 이루어졌다. 교세 성장과 불자들의 지적 욕구가 반영된 결과 였다.

해외 포교도 활발하였다. 초기 대표적인 수행자로 서경보, 숭산,그리고 구산을 들 수 있다. 서경보는 1966년 필라델피아에 조계 선원을 세워 한국불교 사찰의 효시와 미국포교의 첫걸음을 열었다. 숭산은 1972년 10월 프로비던스에 홍법원을 세웠다. 홍법원은 이민자와 한국 유학생 그리고 불교에 관심이 있는 미국인들의 수련도량 역할을 하였다. 구산은 1972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카멜시 근교에 삼보사를 설립하였다. 1973년 3월 LA 최초의 한국 사찰인 달마사 개원 법회에서 설법하는 등 미국 사회에 한국불교를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그 외에도 1967년 삼우, 1969년 고성, 70년대는 계정, 법안 대원, 도안 등이 미국 사회에 한국불교를 포교하였다.

1990년대 불교방송(BBS)과 불교TV(BTN) 등 불교만을 방송하는 방송국 설립도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1994년 개혁종단 이후 독립된 포교원이 1995년부터 신도 등록을 체계화하고, 이런 기반으로 1997년 3월 새롭게 중앙신도회를 창립하였다. 21세기 현재 대중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은 것은 연등축제와 템플스테이이다. 연등축제는 국내인과 외국인 구별 없이 수십만 명이 참여하고, 대형 조형물이 제작되면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축제로 자리매김하였다. 템플스테이 역시 수행과 전통이 살아 있는 공동체를 개방하여 호응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불교문화가 세계적인 문화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2) 현대 한국불교의 침체 배경

20세기 한국불교의 발전 양상 저변에는 갈등과 침체가 병존하고 있었다. 1995년 포교원 조사에 의하면 학교와 출판 등에서 타종교에 비교할 때 현저한 열세로 나타났다. 사회적 역할 역시열세를 면하지못하고있었다. 이젠 신도의 수도 타 종교에 뒤지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은 조계종의 오랜 종권 다툼으로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커졌고, 신세대의 탈종교화 현상이 겹 치면서 생겨난 결과이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종단 갈등은 종정과 총무원장 간 권한 다툼이었다. 

1962년 4월 시작된 통합종단 종헌에는 종정은 비구 측이 맡으며 총무원장 및 각 부장의 임명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종단의 인사와 재정을 총무원장이 결정하면서 양측의 대립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갈등은 1966년 종정과 총무원장 모두 퇴진하는 것으로 끝이 났으나 전임 종정이 다시 종단과 갈등을 일으키며 1970년 7월 끝내 총무원장으로 취임함으로써 세간에 종권 갈등을 각인시켰다. 1970년대 이후 종단 갈등 역시 종권이 원인이었다. 1973년 총무 원장은 강력한 종권을 유지하려고 종정과 자주 부딪쳤다. 이때는 예전과 달리 종정과 총무원장 양자 구도를 넘어 종회와 원로회의 등이 포함되면서 다자간 분쟁으로 바뀌었다.

종정과 총무원장 간의 갈등은 종정 중심제로 종헌이 개정되면서 끝이 났다. 그 후 종회는 종정에게 집중된 종권을 견제하였다. 양측의 갈등은 1978년 1월 종정이 사퇴하고, 종회가 종헌 종법을 개정 하여 다시 총무원장 중심제가 되었다. 그러나 사의를 표명했던 종정이 서울고등법원에 종정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 판결에 불복하고 이의 신청을 하면서 종단의 권력 분쟁은 다시 악화되었다. 그러자 종회 측은 3월 10일 개운사에 임시 총무원을 개원하고 종정 측의 조계사 총무원과 대립하였다. 그 후 1980년 2월 대법원이 종정의 가처분 집행 취소 결정에 대한 재항고를 기각하여 개운사 측이 승소하면서 권력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1983년에서 1998년까지 15년 사이는 분규의 시대라 해도 좋을 만큼 종권 다툼을 둘러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주지직을 둘러싸 고 갈등이 불거진 신흥사 사태는 개혁을 기치로 내건 비상종단을 출 범시켰으나 반대파에 의해 좌초되었다. 이 과정의 물리적 폭력 사태는 불교계의 치부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비슷한 일은 서의현 원장의 3선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충돌, 송월주 원장의 3선 연임을 둘러싼 문중 간의 갈등으로 이어져 불자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이와 같은 종단의 갈등은 현대사회에서 불교의 내적 성숙과 대외적 활동에 장애가 되었다. 먼저 1950년대 초 시작되어 1970년 5월에 분종으로 끝난 정화운동은 불교계로 하여금 현대화에 필요한 신행 체계를 정립하고 지도해야 하는 기회를 상실하였다. 그 결과 한국불교는 기복불교가 만연하면서 20세기 사회적 후진성을 면하지 못했다는 혹평을 들었다. 

그런 후진성이 계속되면서 1950년대에서 1960년대의 한국불교의 사찰, 교직자, 그리고 신도 수는 1920년대에서 1940년대와 별 차이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70년대 어느 정도 증가하였지만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신앙자의 질적 구성과 사회적 역할을 비교하면 크게 열세였다. 이런 흐름은 19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1994년 불교를 믿는 종교인구 가운데 대학 졸업 학력 이상이 20.2%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1997년 조사에 의하면 10.8%로 조사되었다. 고학력의 신도 비율이 현격히 줄어든 것이다. 이런 지표는 한국불교가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소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1995년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에서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포교 청사진’이란 제목으로 상세한 조사를 하였다. 그에 따르면 종교단체가 설립한 학교를 비교할 때 전문대학 이상에서 불교는 개신교와 천주교에 비해 현저하게 열세이다. 특히 유치원 초등학교 그리고 중 . 고등학교의 학교 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각 종교가 발간하고 있는 정기간행물 통계 역시 불교계 상황은 매우 열악하게 조사되었다. 이것은 불자들이 서적을 통해 신앙적 깊이를 심화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불교계 포교자료 부족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한국불교의 성장력과 사회적 위상으로는 현대사회의 민주화를 이끌 수 없었다. 1969년 3선 개헌, 1971년 10월 유신헌법 을 지켜본 많은 지식인은 1973년 개헌을 주장하였다. 그러자 1974 년 1월부터 모든 개헌의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선 포하였고 이후 1970년대 말까지 9호가 선포되어 한국사회를 암울 하게 하였다. 이런 시국에서 다른 종교가 반정부활동에 참여할 때 한국불교는 오히려 호국불교를 앞세워 국가시책에 호응하여 사회개혁에 앞장서지 못했다. 불교계의 안일과 무기력을 목격한 젊은 불자들이 종단에 대한 비판과 함께 새로운 방향 전환을 요구하였지만 수용될 수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의식있는 대중들은 점점 불교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4. 결어-흥망성쇠의 교훈

한국불교의 흥망성쇠에서 먼저 흥성할 때의 배경을 살펴보면 정치, 사회적으로 불교를 수용하려는 의지가 크게 작용하였고, 그런 가운데 군주의 적극적인 실천이 사회적 토대 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쌓인 기본적인 토대 위에 수행자의 적극적 노력으로 교학 발전 및 신행 지도가 이루어졌다. 대중들도 불교가 제시하는 신행의 목표에 따라 실천하여 불교 흥성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 결과 흥성의 시대에는 다양한 교리적, 사상적 내용이 함 축된 불교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다.

반면 쇠퇴할 때의 배경을 보면 교단과 수행자가 계율에 벗어난 행위와 지나친 경제적 가치 추구에 따른 민심의 이반이 크게 영향 을 주었다. 또한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독점적 위치에 있던 불교가 유교의 등장으로 비판받으면서 사회적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뒤를 이어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이 극심한 배불정책을 펴자 신앙적 기반이 무너질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광복 후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한국불교는 일제의 통제로 변질 된 정체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반면 사회적으로 불교에 대한 호감을 반감시키는 행동도 많았다. 종권에 대한 바람이 커지면서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행동이 나왔다. 그 결과 현대사회에서 불교에 대한 호감도가 크게 낮아지게 되었다. 아울러 불교계 교학 연찬과 불교학의 저변 확대가 막히면서 불교 발전의 토대가 심각하게 저하 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불교의 흥망성쇠에 관한 배경을 살펴볼 때 순수하 게 종교적 가치를 추구할 때 흥성의 시대를 보낼 수 있었으며, 상대 적으로 사회적으로 호응받지 못할 때 쇠퇴 및 침체의 시대를 겪은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시 불교의 흥성 시대를 조성하려면 사부대중이 불교적 가치관에 따라 신행하는 순수성이 드러나야 하고, 아울러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 반대로 사회적 역할이 미진하 다면 탈종교화 현상과 합쳐져 사회와 대중으로부터 거부당하는 또 다른 쇠퇴의 시대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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