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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영광과 수난의 역사 가로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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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4-12-13 10:40 조회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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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영광과 수난의 역사 가로지르다


1. 서언

한국불교 1,700년 역사를 시대적으로 구분하면 전래 · 발전기(전래-신라 중대), 유지·침체기(신라 하대-고려 시대), 쇠퇴기(조선시대-승니 도성출입금지 해제), 그리고 회복기(승니 도성출입금지 해제-현재)로 나눌 수 있다.

한국불교의 역사에서 흥성(興盛)의 시대로 볼 수 있는 시기는 전래 · 발전기와 유지기로 삼국시대에서 고려 중기까지이다. 반면에 쇠퇴의 시대는 침체기와 쇠퇴기로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는 불교의 국가적 수용과 더불어 사회 적 실천이 뛰어났다. 많은 승려의 교학 연구에 힘입어 중국불교와 다른 독창성도 창출하였다. 그리고 불교 대중화의 영향으로 다양한계층의 적극적인 신행이 행해지면서 고대불교를 융성하게 하였다. 고려조 역시 국교로 숭상하였으며, 많은 의례와 법회를 통해 사 회적 저변을 넓혔다. 또한 승과와 승직을 통해 불교를 제도권으로 수용하여 체계적인 관리를 하였다. 그리고 천태종과 조계종 등 종파가 설립되어 교리적 체계와 사상적 범주를 넓혔다.

그러나 고려 말 유입된 유교가 조선조에 국시(國是)로 숭상되면 서 불교가 배척되었다. 교세와 사회적 역할이 약해진 불교는 사회 를 선도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하였고, 대중들의 기복신앙으로 명맥이 유지되는 쇠퇴의 시대를 걸었다.

광복 후 한국불교는 일제에 의해 훼손된 정체성과 승풍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고,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통해 현대적 불교문화를 발전시켰다. 반면에 지속된 종단 갈등은 불교의 사회적 역량을 축 소시켰다.

우리가 지난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통해 당면한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얻 는 데 있다. 한국불교는 다시 흥성의 시대로 도약하여야 하는데 미 래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등불이 되는 것은 지난 역사의 교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불교 흥망성쇠의 배경과 교훈을 살펴보는 것은 새로운 시대로 가기 위해 현재의 좌 표를 확인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2. 한국불교 흥망성쇠의 배경과 양상

1) 한국불교 흥성의 배경과 양상

(1) 전래·발전기의 흥성 배경과 양상

앞서 제시한 한국불교 시대 구분에서 전래 · 발전기와 유지기가 흥성의 시대이다. 시기적으로 삼국시대, 통일신라 그리고 고려 중 기 무렵이다. 고려불교가 1170년 무신의 난 이후 급격하게 퇴조한 다는 점에서 1097년 의천에 의해 천태종이 설립되고, 뒤이어 조계 종이 설립되는 12세기 초이다. 이 기간 한국불교가 흥성의 시대가 될 수 있었던 배경과 양상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국가적인 수용과 군주의 사회적 실천이 뛰어났다. 불교 가 전래될 때 삼국의 군주와 신하들은 전교승(傳敎僧)을 성문까지 나가 맞아들일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궁중에 머물도록 하였고, 짧은 기간에 사찰을 창건하고 수행자를 배출하였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불교사상에서 얻을 수 있는 국가적인 이익 때문 이었다. 불교의 업설과 전륜성왕 사상을 통해 자신들이 통치자가 될 수 있는 당위성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수 있고, 새로운 내세관으 로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주들은 불교의 이념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면서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은 황룡사 장육존상을 조성하며 신라는 부처님과 인연이 있다는 불연국토사상(佛緣國土思想)을 강조하였다. 그런 의식으로 신라인들은 전쟁에 나가는 것은  곧 부처님의 나라를 지키는 성스러운 일로 여겼다. 싸움에서 자신의 생명이 끝 나면 바로 부처님의 세계에 왕생한다는 신앙적 귀의처를 갖게 되었 다. 이런 신앙적 염원은 민중의 단결심을 이끌어 훗날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

불교 의례 역시 국난 극복에 도움을 주면서 사회적 토대를 굳건히 하였다. 문무왕 때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자 명랑법사를 불러 불교의 힘으로 타개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명을 받은 명랑은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문두루비법으로 당의 군사를 물리쳤다.

두 번째, 구법승을 비롯하여 많은 승려의 교학 연구는 중국불교와 다른 독창성을 창출하였다. 삼국의 많은 승려는 중국과 인도로 불교를 배우러 갔다. 그들은 불교를 연구하면서 때론 중국 교학 발 전에 기여하였고, 멀리 인도에서도 삼국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한국 불교학의 독창성 역시 이 무렵에 이루어졌다. 국내에서 활 약한 원효, 경흥, 그리고 태현은 한국불교 안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3대 저술가이다. 연구 저술의 서명으로 볼 때 불교학 전체가 연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불교학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역량이었다.

원효는 경전의 중요한 내용을 정리한다는 의미로써 종요(宗要)라 는 표현을 썼다. 이런 원효의 연구를 당나라 고승들은 해동소(海東 疎)라고 부르며 존중하였다. 《금강삼매경소》는 당나라 승려에 의 해 이것은 보살의 경지에서만 나올 수 있는 저술이므로 당연히 논 이란 명칭을 붙여야 한다고 해서 《금강삼매경론》으로 불렸다.

경흥은 신문왕 때 국사였다.《법화경》을 비롯하여  《열반경》《반야경》 《무량수경》 《미륵경》 그리고 《금광명경》 등 많은 경전의 주석서를 집필하였다. 많은 저술에도 불구하고 현재 전해지는 것은《무량수경연의술문찬》 3권과 《삼미륵경소》 1권뿐이다.

태현은 경덕왕 때 고승이다.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쳤던 원측의 제자 도증(道證)이 귀국하자 그에게 배웠다. 교학 연구에 투철하였 던 그는 다방면으로 학식이 뛰어났다. 특히 원측에서 이어지는 유식학에 뛰어나 유가조(瑜伽祖)라고 불렸다.

세 번째, 불교 대중화에 힘입어 다양한 계층의 적극적 신행이 형성되었다. 불교 대중화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교화 활동이다. 전래 초기 불교 신앙은 왕실과 귀족이 중심이었다. 불법의 심오함 을 배울 수 있는 곳도, 교리를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주는 고승도 드물었다. 서민들을 위해 활동하는 수행자가 나타나면서 불교 대중 화가 시작되었다.

대중화의 주역으로 혜숙, 혜공, 대안, 그리고 원효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승려가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생활을 멀리하고 시골 촌락, 조그만 절, 시골 장터에 머물면서 그곳의 주민들을 교화하였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불교의 진리를 알려주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신라의 대중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불법을 알게 되었다. 

그런 활동에 힘입어 신라의 불자들은 현재의 몸으로 부처가 되고 싶은 염원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현신성불신앙(現身成佛信仰) 으로 수행의 주체는 수행자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성 불의 목표를 이룬 모습에는 신분과 여건에 좌절하지 않고 신앙적 성취를 이루어내는 진실함이 담겨 있다. 이런 신라인들의 구도적 자세는 불성을 찾아 성불하는 불교의 지향점과 일치하는 신행이라 할 수 있다.

(2) 유지기의 흥성 배경과 양상

유지기에 해당되는 고려 초 불교 흥성의 배경 역시 앞선 고대불 교와 같이 군주의 신앙심과 고승들의 노력이라 할 수 있다.

918년 6월 왕위에 오른 왕건은 혼란한 후삼국 시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불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919년 3월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면서 법왕사, 자운사, 왕륜사, 내제석원, 사나사, 보제사, 신흥사, 문수사, 원통사, 그리고 지장사 등 10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표현한 구성이었다. 불교에서 10은 만수(滿數)를 상징한다. 다함이 없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의미이기 때문에 불보살의 가피로 고 려의 번영이 영원하기를 바란 것이다.

왕건은 신라 말 도선국사의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에서 많은 영 향을 받았다. 우리나라 지형에서 악하고 흉한 지역에 사원과 탑을 세워 지세를 눌러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는 사상으로 고려 시대 사 원 창건과 불탑 조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죽음을 앞두고는 후손들 에게 훈요십조를 남겼다. 이 가운데 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 은 제1조, 제2조, 그리고 제6조였다. 자신이 정립한 불교 정책의 지 속을 기대한 것이다.

고려조 수행자 역시 적극적인 구법과 교화 활동으로 고려 사회와 불교 발전에 기여하였다. 중국 구법을 마친 현휘(玄暉)는 태조의 요청으로 국사가 된 후 충주 정토사에 머물면서 법을 펼치며 선교 융합을 도모하였다. 경보(慶甫)와 찬유(璨幽) 등도 중국으로 가 조 동종 개창자인 동산양개의 제자에게 수학하였다. 그들에 의해 그런 선풍이 전해져 고려 초 선종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고려 초 승정과 

교단 통일에 기여한 사람은 균여(均如)였다. 일찍부터 화엄에 조예 가 깊었던 그는 후삼국 시대 분열되었던 화엄종의 통합을 위해 노 력하였다. 광종 19년(968) 왕사가 된 탄문(坦文)은 귀법사(歸法寺) 에 주석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는 교종과 선종 양쪽의 지지를 받아 광종 26년(975) 보원사로 돌아올 때 양종의 승려 1,000여 명에 게 영접받을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광종은 승과와 왕·국사 제도를 실행하여 불교를 제도권으로 끌 어들였다. 승과는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왕 · 국사는 국정에 자문하고 민심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승과를 통해 선발된 선승을 중국 오월 지역에 유학을 보냈다. 혜거(惠居) 와 문도 영준(英俊) 그리고 석초(釋超)와 지종(智宗) 등이 수학하 고, 선종이면서 교학과의 융합을 지향한 법안종을 유입하였다.

고려의 교학은 중국불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오월왕 전숙(錢 俶)이 고려에 천태 관련 전적을 요구하자 광종 11년(960) 전적과 함 께 제관(諦觀)을 보냈다. 그는 중국에서 10여 년을 보내며 《천태사 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하여 중국 천태학 중흥에 기여한 뒤 그곳 에서 입적하였다. 그 무렵 의통(義通) 역시 중국에 들어가 천태학 을 연구하여 중국 천태종 16조가 될 정도로 활약이 컸다. 그 역시 귀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고려조 천태종과 조계종이 설립되었다. 각각의 소의 경론과 수 행 실천이 체계화되어 종파적 특색을 형성하였다. 의천은 흥왕사에 서 《고려교장》을 발간한 후 1094년 해인사, 1096년 흥왕사, 그리고 1097년 국청사가 낙성되자 주지로 부임하였다. 이곳에서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왕의 명으로 천태종에 참여한 승려가 700여 명, 직접 의천의 문하로 찾아온 승려가 300여 명이었다. 그런 교세에 힘입어 숙종 5년(1101) 교종과 선종에 국한되었던 승과에 천태종이 포함되었다.

그 후 선종도 소의 경전과 종지 종풍을 표방하며 종파 설립을 본격화하였다. 선종은 선적종(禪寂宗)으로 지칭되다가 인종 10년 (1132) 무렵까지 조계업(曹溪業)으로 불렸다. 그후 명종 2년 (1172)에 세워진 대감국사 탄연의 비명에 ‘고려국조계종굴산하단 속사대감국사’이라 해서 조계종 명칭이 등장하고 있다. 그가 의종 12년(1158) 입적한 것으로 볼 때 활동 중에 조계종이 설립되면서 거기에 속했던 것을 의미한다.

그에 앞서 조계종 설립에 공헌한 승려들을 보면 혜소국사(慧昭國師) 담진(曇眞)이 1076년 중국 유학하여 임제종의 도진 문하에서 수학하고, 중국 황제 신종에게 법원 대사라는 호를 받고 문종 34년 (1080) 귀국하여, 예종 2년(1107), 왕사에 이어 예종 9년에 국사로책봉되었다.  이런 활동을 문도들이 계승하면서 자연스럽게 조계종 설립의 분위기를 조성하였을 것이다.

담진의 제자 탄연과 지인도 조계종 설립에 기여하였다. 탄연은 숙종 9년(1104), 승과에 합격하고 이후 조계종으로 활약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인종 9년(1131), 대선사가 되고, 인종 23년(1145), 왕사로 임명되어 조계종을 이끌며 후학을 제접하였다. 지인 역시 선종의 발전에 노력하였다. 당시 원응국사 학일도 선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볼 때 조계종 설립에 힘을 보탰을 것으로 짐작 된다.

2) 한국불교 쇠퇴의 배경과 양상

(1) 고려조 불교 쇠퇴의 배경과 양상

고려조 불교의 쇠퇴는 1170년 무신의 난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예후는 그보다 앞서 나타나기 시작하였 다. 고려 건국에 도움을 준 지방 호족들은 점차 중앙의 문벌귀족으 로 성장하였다.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적 재원을 가진 귀족이 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사회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불교계를 악용하였다. 많은 토지를 후손에게 세습하고 싶은 귀족들은 원당을 세웠다. 원당의 주지는 당연히 귀족의 자손들이 맡았다. 이곳에 토지를 기증하여 사원전을 만든 것은 세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자연의 아들 덕소가 현화사의 주지를 맡자 이곳은 인주 이씨의 원당처럼 되었다. 이자겸의 아들 의장이 수좌로 임명된 후 현화사 주지를 맡았다. 그런 관계가 형성되면서 사찰의 경제권은 점점 사유화되고 악용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벌귀족의 불교계 장악은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대토지와 노비의 소유는 풍족한 생활을 보장하였다. 호화롭고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국가의 불사는 불교계 안에 과소비의 풍조를 가져왔다.

고려 시대 무신의 난은 1170년 보현원에서 무신들이 문신들은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의종을 폐하고 거제도로 귀양 보내고 왕의 동생 익양공(翼陽公)을 명종으로 옹립하며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다.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불교계를 이용하였다. 정치권력과 밀착된 불교계는 점점 부를 축적하였고, 지나친 사 원경제는 대중들로부터 비난받았다. 그런 모습에 의식 있는 승려들 은 불교 본연의 모습을 상실하였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내었지만 크 게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승정의 문란이 지속되자 유교가 전면으 로 등장하였고 유학자의 비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충선왕은 왕위를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북경에서 만권당(萬卷堂) 을 개설하여 많은 책을 수집하는 한편, 고려의 유학자를 불러 공부 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복위 후에는 공자를 모시는 석전(釋 奠)을 정례로 하였고, 설총과 최치원을 유종(儒宗)으로 받들며 유학을 확장하였다.

고려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유학자는 안향과 이제현이었다.

그들은 불교의 윤리보다는 유교의 윤리를 더 높이 평가하고 불교 비판에 앞장섰다. 안향은 왕에게 유교적 치국방향에 대해 조언하고 장학재단 양현고(養賢庫)를 설립하여 그 기금으로 공자를 모신 대성전을 세웠다.

이제현은 만권당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고려 사회에 유교의 위민사상과 실천윤리를 강조하면서 불교계를 비판하였다. 불교의 가르 침은 효 사상에 반하므로 이를 따르지 말고, 효와 인본주의를 함양할 수 있는 경서의 교육을 주장하였다.

이제현의 영향을 받은 이고와 그의 아들 이색은 불교에 우호적이었지만 본연의 자세에 어긋난 행위에 대해서는 통렬하게 비판하였 다. 이색은 공민왕 원년(1352), ‘중세 이래 승도가 더욱 늘어나 오교 양종이 이익을 위한 소굴이 되었으며 냇가와 산골까지 절이 많아지게 되었다.

승려들이 점점 비루해지고 놀고먹는 이가 많으니 이미 승도가 된 자들은 도첩(度牒)을 주어야 하지만 도첩이 없는 자들은 군대에 충당하여야 한다. 새로 창건되는 사찰은 모두 철거하고 철 거하지 않으면 즉시 수령에게 죄를 묻고 양민의 출가를 금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색의 영향을 받은 정몽주 역시 유교는 음식과 남녀의 문제 등 일상의 일을 행하는 데 있음을 밝히고, 상대적으로 불교는 관공적 멸(觀空寂滅)을 종지로 삼기 때문에 평상의 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인식의 정몽주는 뒤에 왕사 임명에 반대하였고, 불교를 배척 하다 처벌받는 유생들을 변호하였다.

정도전은 우왕 초 원나라 사신 영접을 반대하다 회진현으로 유배 되었다. 사면 후 삼각산 아래에 움막을 짓고 경서를 강의하면서 이 단을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공양왕이 즉위한 후 사 찰을 궁궐보다 더 높게 세우고 법석을 여는 것을 비판하는 한편, 불 사의 비용을 줄이자고 주장하였다.

실권이 없던 공양왕은 자신의 불안한 위치를 떨치기 위해 더욱 불교 신앙에 의지하였다. 김초는 그런 불교 숭배에 대해 일상을 무 시하고 괴이함을 좋아하는 것으로 평가절하하였다. 그로 인해 천 재지변이 일어나면서 정사가 바르지 못하고, 형벌이 제도에 어긋나 고, 인재 등용이 적절하지 못해 백성들의 원통과 억울함이 산적하고, 그리고 나라의 재정이 안정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성균관 생원 박초 역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불교에 대한 소견 을 상소하였다.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군신 간의 윤리, 부자간의 윤리, 부부간의 윤리가 이 세상의 기본 윤리인데 불교에는 그런 윤리의식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배불 상소에 불교계는 제대로 대응할 힘이 없었다. 공양왕은 2년(1390) 2월 찬영(粲英)을 왕사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성균관 박사 정몽주는 불교의 가르침은 평상의 도가 될 수 없으니 믿지 말 라고 건의하였다. 좌상시 윤소종과 대사헌 성석린은 대궐 앞에 엎 드려 반대하였다. 공양왕은 왕사 임명에 주저하였고 개성에 왔던 찬영은 궁궐에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불의 분위기 속에서 비판의 소리를 낸 것은 오히려 유학 자였다. 이색의 문하였던 이첨이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색 역 시 사대부들의 주장이 선대의 법을 허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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