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서양철학의 만남: 데리다와 불교 - 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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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5-09-08 17:29 조회11회 댓글0건본문
특집 | 불교와 서양철학의 만남
데리다와 불교 - 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
들어가는 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20세기 후반 서구 철학에서 가장 잘 알려진 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8년에 《문자학에 대하여(De la grammatologie)》라는 저서를 필두로 데리다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철학뿐 아니라 인문학, 사회과학, 건축학, 교육학 등 학문의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철학은 흔히 ‘해체철학’으로 불린다. ‘해체’라는 한글 번역은 사실상 불어의 ‘deconstruction’의 절반만을 해석한 것이다. 해체(destruction)와 건설(construction)이 동시에 일어나야 해체철학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시성은 앞으로도 말하겠지만, 데리다 철학의 주요한 요건이다.
2024년은 데리다가 작고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말년에 췌장암으로 고생한 데리다는 2004년 10월에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기 몇 개월 전인 2004년 8월, 프랑스 유명 일간지인 〈르 몽드〉는 데리다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 인터뷰는 데리다 사후 《마침내 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Apprendre à vivre enfin)》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어떤 의미에서 모든 철학은 사는 것에 대한 숙고이지만, 데리다가 질문하듯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은 가능할까?
데리다 철학과 불교철학의 비교철학은 오래전부터 일군의 학자들 사이에서 행해져 왔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그의 초기 철학에 나타나는 차연(différance)과 흔적(trace)을 불교의 연기 사상, 무아, 공 등과 유사점을 관찰하는 면에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 맥락에서 데리다의 철학과 용수의 불교사상이 많이 비교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데리다의 사는 것을 배우는 것에 대한 명상을 그의 후기 철학이 보여주는 정치철학과 연결시키고 이를 불교의 삶과 사회에 대한 사상과 연결해, 불교의 사회 · 정치사상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2000년이 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불교철학에서 정치철학을 논의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 자체가 개인의 수행을 통한 변화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20세기의 참여불교, 그리고 최근에 전개되고 있는 불교와 법, 불교와 통치 사상 등에 관한 관심은 불교의 정치철학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이 글은 전통적인 불교 사상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불교의 사회 · 정치철학의 모습을 내보이려는 한 시도이며, 또한 비교철학, 혹은 최근 들어 사용되는 표현인 상호문화 철학(intercultural philosophy)의 의미에 대한 한 고찰이기도 하다.
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
데리다가 2004년 인터뷰에서 말한 “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이라는 표현은 1991년에 출판된 그의 책 《마르크스의 유령들(Spectres de Marx)》에 이미 나오는 표현이다.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출판된 이 책은 사실상 데리다의 사상 전개에서 주요한 전환점을 보여주는 책이다.
1960년대부터 활발한 저작 활동과 강연을 해온 데리다이지만, 그는 1991년 이 책을 출판할 때까지는 마르크스 철학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반공사상이 사회적 학문적 배경에 있는 한국이나 미국의 학계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20세기 프랑스 지식인에게는 극히 드문 일이다. 마르크스 사상은 유럽대륙 철학의 사회 · 정치 사상의 주요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 철학이 마르크스 철학뿐 아니라, 정치철학적 문제를 표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이유로 데리다의 해체철학을 정치 · 사회적 비판이 전혀 없는 말장난이라고 비난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이러한 비판을 받아온 데리다가 전면에 마르크스를 내세우고 민주주의 등 그의 정치철학 사상을 펼친 책이다. 그런 책에서 왜 뜬금없이 ‘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을 들춘 것일까.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제목 그대로 유령에 관한 글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유령은 이 저서가 주로 다루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햄릿 아버지의 유령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책의 서두에서 유령을 말하면서 삶과 죽음, 윤리, 책임감, 그리고 정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짐짓 문학적 장치라고 말할 수 있는 햄릿의 유령과 이러한 사회 · 정치적 문제들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미국 정치철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책 《역사의 종언과 마지막 인간(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1992)에 대한 데리다의 대응이기도 하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또한 동유럽권이 무너지면서, 후쿠야마는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의 대결이 자유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고 보았다. 그 이후의 역사는 이러저러한 일은 있겠지만, 결국 자유 진영이 지배하는 역사이기에 사실상 역사의 종언을 고한 것이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묻는다. 과연 어떤 한 사건이 물리적 시간에서 끝났다고 해서, 진정으로 끝이 나고 사라질 수 있는지. 소련의 공산주의는 무너졌고 동유럽권도 무너졌지만, 과연 그 역사적 사건이 다음에 오는 인간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는가? 공산주의의 근간이 되었던 마르크스 사상이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없어질 수 있을까?
좀 더 쉬운 예로, 누군가를 사랑했다가 결국 헤어지는 상황이 생겼다고 하자. 2024년 1월 10일에 헤어졌다고 하면, 그 헤어진 사람이 1월 11일부터는 나의 삶에서 완전히 없어질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좋은 기억, 아픈 기억, 사랑한 기억, 미워한 기억이 모두 얽히고설켜서 우리의 마음 깊이 잠겨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이러한 과거의 환영들을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에 두었다. 그곳에 숨어 있는 나의 과거의 사건, 감정들은 오늘의 나에 이렇게 저렇게 영향을 준다.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이 모든 것의 통합체를 유령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했다. 이렇게 단순하게만 보아도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 세계관이 어떻게 불교와 연결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불교에서 우리는 이 유령을 업이라고 부른다. 유식불교에서는 이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식(識)에 대한 연구로 보여준다.
데리다는 유식불교 철학처럼 과거의 유령과 인간의 의식과의 관계를 다루지는 않는다. 데리다는 이를 윤리, 책임감,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와 연결시킨다. 여기에 데리다와 불교철학이 함께했을 때 태어날 수 있는 정치철학이 있다.
데리다가 햄릿 아버지의 유령을 통해서 다루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의 현존성은 그의 철학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이미 그의 해체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초기 저서 《문자학에 대하여》와 그의 논문 〈차연(Différance)〉에서 차연, 흔적의 개념으로 이미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개념이다.
데리다는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의 실체를 가지고 있고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유럽 철학의 근간에 제동을 걸고, 존재자는 사실상 차연과 흔적에 의하여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즉 알파벳의 A는 A 자체의 독립적 실체와 의미가 있어서 A로 존재하고 A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A가 알파벳 내의 다른 25글자와 다르기 때문에 A는 A가 되는 것이며, 다른 25글자도 마찬가지이다. A는 다른 글자와의 ‘다름’ 때문에 A가 되는 것이고, A 안에는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다른 25개 알파벳이 ‘흔적’으로 들어 있다. 이 흔적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는 햄릿의 유령을 빌려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화엄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데리다의 차연과 흔적이 분명 중국 화엄종의 제3조로 불리는 법장(法藏, 643~712)이 1에서 10까지의 수를 통해서 화엄의 상호 연기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화엄오교장》에서 법장은 화엄에서 정체성의 형성을 1에서 10까지의 숫자를 예로 설명한다. 1에서 10까지 10개의 숫자가 숫자계의 모든 수라고 가정하고, 그중 한 숫자, 예를 들어 3이 어떻게 3이 되는지 생각해 보라고 법장은 말한다. 3은 3 자체의 독자적 정체성이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3은 2가 아니고 4가 아닌 것(즉 차이)에 의해서 3이 된다. 그리고 3은 나머지 아홉 숫자가 존재해야만 3이 존재하기 때문에 3 이외의 아홉 숫자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3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데리다의 흔적의 개념이다. 화엄불교는 이러한 현상을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설명한다. 서로가 서로 안으로 들어가서 서로의 정체성, 존재, 가치, 의미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한국 화엄의 시조로 불리는 의상(義湘, 625~702)은 이를 더욱 확장시키는 개념으로 “하나의 먼지 안에 전 세계가 들어 있다”라고 그의 〈법성게〉에서 말하고 있다. 이는 화엄 불교의 주요 사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불교의 연기, 공, 상즉상입의 논리는 개인의 불교 수행 근간으로 사용된다. 불교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 고통을 없애는 것이라면 연기, 공, 상즉상입의 가르침은 왜 나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타인의 고통도 없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흔히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사홍서원 역시 이러한 바탕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중생이 연기적으로, 아니면 차연과 흔적을 통해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 많은 중생을 구해야 하는 명분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러나 불교학이나 수행에서는 이를 정치 · 사회사상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많지 않다.
데리다의 경우 차연과 흔적은 그대로 그의 후기 정치사상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유령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연결성을 민주주의, 사회정의, 책임감 등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데리다의 차연과 흔적의 또 다른 변모를 살펴보자. 1997년에 발표된 《동물이다. 고로 존재한다(L’animal que donc je suis)》라는 글에서 데리다는 인간존재를 동물과 대비해서 다룬다. 글의 제목에서부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럽대륙 철학의 근간인 데카르트의 명제를 희화한 것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사고하는 이성을 가진 것을 인간의 정체성 규정의 절대적 요소로, 또한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절대적 성격으로 논의되어 왔다. 데리다는 이러한 대륙 근대 철학의 근거에 제동을 걸고, 인간과 동물이라는 분류법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이 책은 데리다와 그의 고양이와의 관계로 시작된다. 데리다는 욕실에서 나체로 있는 자신을 쳐다보는 고양이를 보고 있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통적인 철학 저서를 생각하는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이게 뭐지?” 하고 반응할 수도 있다. 나체인 인간과 털을 ‘입고’ 있는 동물; 쳐다봄을 당하는 인간과 쳐다봄을 행하고 있는 동물. 나체성이란 무방비의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보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주관과 객관의 위계질서적 위치에서 하위에 있음을 뜻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나무를 본다’라고 말할 때, 인간인 ‘나’는 대상이며 비인간인 나무에 대한 이해를 형성해내는 능동자이다. 그 반대로 우리는 일상적으로 ‘나무가 나를 본다’ 혹은 ‘의자가 나를 본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항상 주체의 입장에서 객체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주체와 객체의 위계질서화는 근대사회의 특징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이 관계는 따라서 인간이 나체인 동물을 보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왜 이런 것이 문제 되는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즉각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정의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의는 무엇일까? 인간 스스로 만든 인공지능의 위협을 느끼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 질문은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또한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몇몇 요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 동물은 그렇지 못하다(고 인간은 생각한다). 인간은 의식을 사용한다. 동물은 그렇지 못하다(고 인간은 생각한다). 인간은 이러이러한 능력이 있고, 동물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인간이 동물과 차별되는 근거로 사용되고 나아가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법은 모순되게도 인간이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규정하는 데, 생명을 가진 비인간 존재자와 비교하는 것으로만 가능해진다는 현실을 만난다. 인간은 비인간(동물)에 의존해서만 인간존재를 정의하고 인간존재 가치를 확인한다.
인간과 동물을 위계질서하에서 보는 태도는 사실상 인간과 동물 간의 문제만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인간 사회 안에서 힘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가를 때 흔히 힘없는 주변인을 동물과 동일화하곤 한다. 노예를 비인간으로 취급하여, 소유가 가능하고 매매가 가능했던 시기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인간이라고 자처하는 노예의 소유자인 인간과 인간으로 취급되기를 거부당한 노예로서의 인간이 있다. 여기서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이러한 인간과 동물에 대한 데리다의 숙고는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가르친 세미나인 《야수와 군주(La bête et le souverain)》에서 좀 더 정치철학적 성격을 띤다. 이 세미나에서 데리다는 야수와 군주의 동질성을 말한다. 야수라는 표현은 동물 중에서도 하위적 존재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군주는 인간 중에서도 최고의 위치에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둘은 법과의 관계에서는 같은 위치에 있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야수와 군주는 둘 다 법의 밖에 있다는 것이다. 야수는 법 아래 있어서 법의 저촉을 받지 않고, 군주는 법 위에 있어서 법의 저촉을 받지 않는다. 이러한 동일성은 또한 그들 위치의 동일성이 되기도 한다. 존재의 위계질서에서 군주는 가장 높은 곳에 있고, 야수는 가장 하위에 있겠지만, 법의 저촉을 받지 않는 특권을 가진 군주의 힘은 또한 어느 때라도 군주를 야수와 같이 만든다. 야수인 군주는 군주의 특권이 만든 폭력이자 인간과 동물, 그리고 그보다 더 거리감이 있는 야수와 군주가 사실은 절대적으로 다른 두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군주가 야수가 되어가는 과정, 혹은 군주의 야수화는 역사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고, 오늘날의 정치에서 역시 현현이 보이는 현상이다. 데리다는 라퐁텐의 〈늑대와 어린 양〉을 인용하며 야수가 된 군주의 논리를 제시한다. 이 우화의 시작에서 한 어린 양이 흐르는 냇물로 목을 축이고 있다. 좋은 먹잇감을 본 늑대는 양에게 다가가서 감히 자신이 마시는 물을 흐린다고 양을 다그친다. 겁먹은 어린 양은 자신은 어르신보다 냇물의 아래쪽에서 물을 마시는데 어떻게 물을 흐릴 수 있냐고 변명한다. 논리에서 밀린 늑대는 양에게 그럼 네가 작년에 자신을 욕하고 도망갔다고 다시 호령한다. 어린 양은 작년에는 자신은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늑대는 그럼 너의 형이 그랬다고 다시 호령한다. 어린 양은 자신은 형제가 없다고 답한다. 다시 말문이 막힌 늑대는 그러면 너의 양치기, 아니면 너의 개가 그랬다고 다그치면서 결국, 어떻게 되었든 너는 그 값을 치러야 한다고 결론짓고 어린 양으로 맛있는 식사를 한다. 우스운 소리일 수도 있지만, 논리는 분명하고 메시지 역시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힘의 논리다.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된 데리다의 이 세미나 《야수와 군주》는 그러나 힘 있는 자는 옳다는 야수가 된 군주의 논리를 강조하는 것으로 책의 주요 주제를 잡지 않았다. 야수가 된 군주가 지배하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근간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사는 것을 배운다는 것’이라는 질문이 데리다에게 그의 생 마지막까지 계속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인간과 짐승, 군주와 야수는 모두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같은 세상에 살면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이 같음과 다름의 차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데리다는 묻는다. 존재자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고, 따라서 각자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각자의 세계는 또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불교는 이를 진속이제(眞俗二諦)라는 사상으로 오랫동안 설명해왔다. 일반적인 삶, 즉 속세적 관점에서 보면 나와 너, 사람과 짐승, 야수와 군주가 다 각자 다르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궁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자는 하나의 세계, 즉, 화엄의 인드라망과 같이 관계하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야수와 군주가 한 세계 안에 살면서 또한 각자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속세와 궁극적인 진리를 말할 뿐 아니라, 현실적 속세에서 역시 소외되어 살고 있는 인간존재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각자가 사는 삶은 다르다. 하나의 몸뚱어리를 가지고 죽음이라는 한계를 갖은 유한자로서의 소외가 인간의 실존적 현실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것 없는 자, 남성중심주의에서 소외되는 여성, 백인중심주의 사회에서 소외되는 유색인종 등, 인간의 관념과 힘에의 지향에 의해서 형성되는 소외는 실존적 소외만큼이나 이 삶에서 절실히 느껴지는 현실이며 고통이다. 데리다는 이렇게 인간 사회가 만든 소외를 법에 의한 소외라고 부른다.
차연과 흔적의 철학에서, 야수와 군주의 정치철학을 이끄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이러한 움직임을 미국의 흑인불교와 급진적 참여불교에서 본다. 한국에서 한때 활발했던 민중불교는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은 실존적으로 유한자로서의 인간의 고통뿐 아니라 독재적 정치로 인한 고통, 자본주의의 착취에 의한 고통, 차별에 의한 고통 등, 한 사회 안에 사는 존재자로서 개인이 겪는 고통의 극복 역시 불교의 목표라고 규정하고 사회 개혁과 불교 사상을 맞물린 바 있다.
현재 활발히 전개되는 미국 불교학과 불자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단지 개인적 차원에서의 수행, 마음 훈련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억압, 즉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주의 등에 의해 형성된 고통으로부터의 구원 역시 주요 불교 수행의 일환이며, 불교 가르침의 목적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미국 흑인 불교는 수 세기 동안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을 받아왔고, 아직도 진행되는 인종차별로 인해 흑인들의 마음과 삶 깊이 지속적으로 들어차고 있는 분노와 고통의 치유제로 불교 수행을 보고 있다. 그러한 수행은 단지 개인의 차원에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뿐 아니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좀 더 분명하게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인종차별 사회에 대항하는 집단적 항쟁의 의미를 띠고 있다.
흑인 불자들뿐 아니라, 미국 일군의 불교학자와 불자들 또한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미국불교가 백인 엘리트 계층의 불교로 지속되는 것에 대해 제동을 걸고, 미국불교 자체의 인종차별, 계급주의 등을 재검토한다. 하버드 신학대학은 ‘불교와 인종’에 관한 강연 시리즈를 몇 년에 걸쳐 실시한 바 있으며, 2021년의 이 강연 시리즈는 ‘급진적 재방향 설정’이라고 그 학회의 성격을 규정했다. 종교학자 찰스 롱이 말하는 방향 설정(오리엔테이션)으로서의 종교 개념을 이용해, 방향 설정이란 한 개인이 세계 안에서 자신 위치의 궁극적 의미를 타진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급진적 재방향 설정이란, 미국 불자로서 현실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을 재정립하려는 노력이며, 여기서 급진적이란, 문제의 근본을 들여다본다는 뜻이라고 학회 주관자는 말한다.
이런 의미의 불교는 더 이상 단지 개인의 마음 챙김에서 끝나지 않고, 개인의 마음 챙김은 필연적으로 그 개인이 사는 사회, 사회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불교의 가르침과 불교의 수행은 항상 우리가 몸담은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나의 몸은 내가 몸담고 있는 공간, 사회, 문화, 물질과 연결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불교에서 오래된 사상이다. 단지, 불교학과 불교 수행자들은 이러한 불교의 사상을 사회 · 정치적으로 담론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데리다는 마르크스 철학 정신이 남긴 가장 큰 자산은 해방의 가능성을 확인해 준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마르크스 정신은 현실에서 공산주의로 변화된 마르크스주의와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는 나아가 마르크스 철학의 해방 가능성을 “메시아주의가 없는 메시아에의 확신”이라고 표현한다. 메시아주의라는 것은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며 체제이다. 어떤 사상이든 체제화되고 이데올로기화하면 이미 배제의 논리에 근거하고, 배제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기성화된 종교, 제도화된 체제로서의 교회, 혹은 사찰이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가 이미 제도화되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에게 희망의 메시지이다. 정치 역시 희망의 메시지이다. 유한자로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없었다면 인간은 종교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삶에서의 고통을 극복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사람들은 절이나 교회에 가지 않을 것이다.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인간은 정치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도화된 종교, 그리고 현 정치인과 정치에 대한 실망을 한 아름 안고 있다. 그 근본에 체제화되고 고착화된 종교와 정치가 있다. 이데올로기화된 종교와 정치의 메시지는 이미 삶의 유동성을 정복하려는 의도에 의해 실패해가는 종교와 정치이다.
글의 서두에서 데리다의 해체철학에서 해체와 건설(deconstr-uction)의 동시성이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고착화된 사고, 이념, 체제를 흔드는 것과 거기에서 새로운 사고와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의 동시성은 고착화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제동으로 데리다가 제시한 장치다. 동시성이란, 그런 의미에서 끝없는 자기 성찰과도 연결된다.
해체철학은 언제나 기존의 현실에서 시작한다. 데리다의 글이 대부분 기존의 글 읽기에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조 신화로 시작하는 기독교 사상과 달리 불교는 창조를 다루지 않는다. 불교뿐 아니라 유교, 도교, 힌두교 등 동양의 주요 종교와 사상은 창조를 다루지 않는다. 세계의 시작, 인류의 시작은 모순 없이는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작이다’라고 제시하는 순간, 그 시작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고, 이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될 뿐 대답이 될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불교는 ‘무시이래(無時以來)’ 즉 시작 없는 시작점이라는 현명한 표현으로 지칭한다.
우리는 업을 말할 때 흔히 어떻게 업이 시작되는지 질문을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그에 대칭되는 질문, 언제 어떻게 업이 끝나는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삶과 시간을 일직선으로 보고 이 직선의 한 끝에는 시작점이 있고, 다른 한 끝에는 종착점, 혹은 목적지가 있다는 사고는 근대 이후 인간의 사고를 지배해 왔다. 진보의 개념을 중시하는 이유도 이러한 시간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현재, 미래를 이러한 일직선상에서 보지 않고, 하나의 점에서 본다면, 그리고 그 점들이 모여서 연속성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일직선적 물리적 시간관에 근거한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한 점이 데리다 철학이 말하는 해부와 구축, 파괴와 건설이 함께 일어나는 동시성의 순간이다. 데리다는 이런 순간순간을 사건(évènment)이라고 부르곤 한다. 인드라망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보석과 같은 것이다. 이 사건은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 사건 안에는 그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한 차연과 흔적의 세계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적 사고다. 복수적-단수의 세계인 것이다. 이 한 점은 단수이지만, 그 안에 수많은 연기적으로 연결될 사건들, 혹은 데리다가 말하는 흔적이 들어 있기에, 고착화될 수 없는 유동성의 한 점이다. 이 유동성의 한 점이 고착화될 때, 우리는 가치의 고착화를 만난다.
20세기 중 · 후반 군사정권하에서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투쟁한 한국 진보의 주축이었던 세대가 시간이 지나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세대가 아니라 정의 장사를 하는 세대로 각인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정체된 정의, 정체된 민주주의는 정의일 수 없고 민주주의일 수 없다. 데리다는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다가올 민주주의(la démocratie à venir)”라고 정의한다. ‘다가올 민주주의’ 혹은 ‘도래할 민주주의’란 일정 시간이 되면, 아니면 일정한 조건이 맞으면 이루어질 민주주의라는 일직선적 구조의 의미가 아니라, 앞에서 이야기한 동시성의 공간감적 민주주의 개념이다.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흔히 말하듯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 체제라면, 그리고 국민은 절대 동질성의 집단일 수 없으며, 수도 없이 많은 다양성을 지닌 개개인들을 통칭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떠한 현실적 민주주의도 그 많은 다양한 국민의 의사와 목소리를 반영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개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엄의 인드라망에 있는 개개의 보석이 인드라망의 다른 모든 보석을 반영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떠한 보석의 모습도 고착될 수 없을 것이다. 각각의 보석 모습은 다른 보석들의 움직임과 변화에 따라 계속적으로 변화할 것이고, 각개 보석의 정체성이란 그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논리는 민주주의의 근간 중 하나인 ‘정의’에도 적용된다. 정의의 한자 ‘正義’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라는 뜻일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누구나 공평하고 공정하게 대우받는다는 민주주의 사회의 원칙을 이룬다. 서구 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린 채 한 손에 저울을 들고 있다. 저울의 양측이 공평하게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누구도 눈을 가리고 저울질을 할 수도 없고, 양팔 저울의 양측을 완전히 똑같고 공평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어떠한 정의의 현실도 완전한 정의가 될 수 없으면, 그 정의는 끊임없이 계속 공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정의의 실현을 위해, 계속적으로 양쪽의 저울을 재고, 한번 거의 비슷한 공정성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현실과 존재를 계속적으로 차연과 흔적, 혹은 연기적 입장에서 변화하는 것으로 본다면 정의 역시 고착될 수 없다. 정의는 부단하게 현실 안에서 재정의되고,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그 정의가 진실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정의인지 항상 숙고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정의를 “다가올 정의(la justice à venir)”라고 말한다. 이는 언젠가 확정될 목적론적 정의가 아니라, 현재의 정의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정의가 정의이기 위해서는 한 사건과 관련된 모든 요소를 생각하고 이를 공평하게 저울질해야 하는데, 한 사건을 그저 단순히 단독의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고 연기적으로 이해한다면, 아니면 차연과 흔적을 통해서 이해한다면, 한 사건과 관련된 모든 요소를 재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의는 항상 정의이지 시간이 변한다고 정의가 변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란 하나의 개념이다. 정의는 그 자체로써 그 모습을 보일 수 없고, 실현될 수도 없다. 정의의 실현은 그 실현을 위한 제도와 장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한 사회는 법이 있고,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 있다. 그러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법, 그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는 모두 인간이 만든 제도이기에 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데리다는 이런 의미에서 ‘정의’는 계산될 수 없는 것이지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 법은 계산될 수밖에 없는 제도라고 둘을 구분한다. 고착화된 정의는 정의의 고착화가 아니라 정의의 실현을 위해 이루어진 제도의 고착화이다.
선불교 전통은 이러한 고착화된 진리, 고착화된 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를 보내왔다. 선불교의 핵심 저서 중 하나인 《무문관》 2칙은 업에 관해 잘못된 이해를 해서 오백 년 동안 여우로 산 수행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8세기 중국 선사 백장이 설법할 때마다 그가 알지 못하는 한 노인이 나타나서 설법을 듣고 나서 사라지곤 했다. 어느 날 설법이 끝난 후 노인은 남아서 백장에게, 자신은 깨침을 얻은 자는 업에서부터 자유로운가 하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해서 오백 년을 여우로 사는 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백장에게 다시 묻는다. 깨침을 얻은 자는 업에서부터 자유로운지. 백장은 깨침을 얻은 자는 업에 우매하지 않다고 답한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그로부터 여우의 업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다.
깨침을 얻은 자는 불교 수행의 목적을 이룬 자이다. 목적론적이고 비연기적인 사고에서 보면, 우리는 불교 수행의 최고점에 이른 깨친 자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연기와 업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깨침을 얻었다고 해서 세계의 구성 원리가 변하지는 않는다. 깨침은 한 개인이 얻은 것이고, 그 개인이 깨침을 얻든 아니면 중생으로 남아 있든 세계는 그대로 연기의 법대로 진행되며, 그 안에서 깨침을 얻었다는 것은 그 세계의 법칙에 대해 깨침을 얻었고, 따라서 이를 수용하고 그 안에서 존재하는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한 사건의 연기적 성격을 깨닫는 것을 불교는 지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연기적 성격의 깨달음은 나와 타인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이해로 이어져 자비의 행위로 나타난다고 불교는 말한다. 이 자비의 행동이 불교의 가장 사회적 성격일 것이다.
데리다는 물론 자비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데리다 철학에서 차연과 흔적, 유령의 만연은 상속과 책임감이라는 개념으로 전개된다. 유령은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현재라는 것은 과거와 미래와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함께 모인 이 지점, 지금 여기가 바로 현재라는 이름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그 현재를 사는 우리의 삶은 모두 그 이전을 살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만든 삶을 상속받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세계의 개념이 한 시간대에서 공간적인 삶의 공유를 의미한다면, 상속은 흐르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삶을 말한다. 그 상속을 받은 존재자인 우리의 삶은, 유산을 상속받은 자가 그 유산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삶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상속인이 상속받은 유산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존재자 개개인은 삶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연과 흔적의 세계에서 이 책임은 개인의 삶에서 끝날 수 없다. 이 책임은 타인과 함께 사는 삶에서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중생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 중생을 구하겠다는 사홍서원은 무엇에 근거해서 하는 것인가? 중생과 나는, 중생과 보살은 무슨 연관이 있기에 보살은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가? 더욱이 왜 끝도 없이 많은 그 모든 중생을 구하겠다고 원을 세우는가? 중생인 나, 그리고 보살인 나는 모두 연기의 세계에서 과거와 미래의 삶의 상속을 받은 자들이고 그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불교는 이를 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상속과 나를 분명히 가르는 순간 중생과 보살을 분명히 가르고, 그 개별화가 고착화되는 순간 나는 이미 연기의 세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은 말한다. 여래가 아무리 많은 중생을 구했다고 해도 사실은 구할 중생이 없다고.
상호문화 철학과 불교 민주주의
불교의 많은 가르침은 중생과 보살이 둘이 아닌 세계, 속제와 진제가 둘이 아닌 세계를 수행자가 삶에서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데리다 철학은 진제와 속제의 불이성을 ‘다가올 민주주의’ 혹은 ‘다가올 정의’라고 이론화해주지만, 어떻게 그 ‘다가올 민주주의’를 실행해 내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정의의 고착화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서 ‘다가올 정의’의 모습으로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할지 그 방법을 말하는 데 인색하다.
여기에서 비교철학, 혹은 상호문화 철학의 가치를 우리는 볼 수 있다. 비교철학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A 철학과 B 철학을 비교하여 유사점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유사점을 2,500년 역사를 가진 동양사상인 불교와 20세기 프랑스 철학인 데리다의 해체철학이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색이 유사점을 찾는 것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곧 묻게 된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냐고. 불교와 해체철학이 유사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기에 상호문화 철학의 중요성이 있다.
이 글이 보이고자 했던 것처럼, 불교와 해체철학의 비교철학적 접근은 두 철학이 가진 한계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혹자는 불교와 해체철학의 유사점을 보고, 동양에서 2,500년 전에 생각한 것을 서양에서는 20세기에 와서 생각했으며, 따라서 동양사상이 서양사상보다 우월하다는 힘의 논리적 태도로 접근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은 자기모순적이다. 불교는 연기적 세계관을 가지고도 지난 2,500년 동안 데리다가 전개한 사회 · 정치사상을 전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세계관은 절대 평등을 가르치지만, 불교를 수천 년 동안 전개해온 동양은 그러한 세계를 현실화해내지 못했다.
최근 20여 년 동안 유교와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동양사상이 미국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하고 20세기 중반부터 미국 대학에서 강의가 시작되면서, 불교와 도가는 자유를 구가하는 새로운 사상으로 서구 사상의 한계를 느낀 미국인들에게 환영을 받아왔다. 반면, 서구인에게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는 인상을 준 유교 사상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작고한 페미니스트 불교학자 리타 그로스가 그녀의 책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에서 제시했듯이 어떠한 사상이나 전통도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가부장제적일 수는 없다. 최근 유교 학자들은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 비판받은 유교에서 민주주의를 재활시킬 불씨를 찾아내고 있다. 불교적 세계관이 제시하는 존재의 절대 평등성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전통적으로는 왕권과 연결되는 것 외에는 다양한 정치철학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제는 새롭게 불교 민주주의, 불교의 사회 · 정치철학을 구사해서 나날이 힘을 잃어가는 민주주의에 새로운 활기를 보태야 할 시기이다. ■
박진영 jypark@american.edu
연세대학교, 동 대학원 졸업(석사). 뉴욕대학에서 석사,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Buddhism and Postmodernity, Women and Buddhist Philosophy, 《김일엽, 한 여성의 실존적 삶과 불교철학》 등 다수. 현재 아메리칸대학 철학 · 종교학과 교수 겸 학과장, 미 종교학회 회장 및 북미한국철학회 회장.
- 출처: 불교평론 97호,202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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