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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에 나타난 성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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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3-02-13 14:21 조회3,0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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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에 나타난 성
 
 
불교와 성
 
불교미술을 통해 성이 표현된 예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다만 현대미술에서 불교적 사유의 세계를 작업의 주제로 삼은 이들의 작업 중에 간혹 성을 직접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다룬 사례를 만날 수 있다.
 
사실 불교란 성과 욕망을 잠재우거나 휴지케 하는 의식과 관련이 있다. 헛된 욕망의 무망함을 깨닫고 일체의 번뇌를 소진케 하고자 하는 수양이 바로 불교적 수행일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성이 소극적이어야 한다거나 부정해야 하는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다.
 
불자의 행위를 규정한 것이 불교의 계율일 텐데 그것은 가장 잘 사는 법 즉 살아가는 요령을 일러주고 있다. 그러니까 순간순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을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매뉴얼인 셈이다.
 
그런데 이는 어떠한 행동이 죄를 범하는 게 되니까 하지 말라는 식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것을 하면 난감한 경우에 처한다는 것, 그러니까 하지 말라는 식의 계율이다. 그 계율에 성과 관련된 흥미로운 대목들이 있음을 읽은 적이 있다.
 
성과 관련해서 접한 것 중에 하나가 일본의 진언 다치카와류의 수행, 일종의 목숨을 건 수행의 한 예다. 여성 파트너와 승당(僧堂) 안에 틀어박혀 수십 일 동안 계속 섹스를 하는 수행이었다고 한다.
 
무척이나 괴로운 수행이었을 텐데 해골 모양의 본존을 만들어놓고는 섹스를 한 후에 서로의 체액을 그 본존에 발라가고 그런 식으로 몇 주일 동안 계속 바른 후에 만원(滿願)의 날이 되면, 해골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진언 다치카와류의 수행이라고 전한다.
 
그러니까 성에 대한 어설픈 욕망 같은 것을 한 번에 날려버리는 그런 수행방식이었던 것 같다. 성에 대한 어렴풋하거나 막연한 욕망을 한 번에 끝장내 버리는 단호함이 깃든 수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일종의 죽음을 삶으로 전환시키는 수행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불교가 좋다〉(동아시아, 2004)에서 접한 ‘석존釋尊과 제자의 섹스 문답집-팔리어 성전 『율장』초역’에는 성에 관한 적나라한 대목들이 적혀있어서 초기 불교에서 성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잘 알려준다.
 
사실 석존은 추상적인 계율을 제정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나는 계율을 제정해야 할 시기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누군가가 나의 가르침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되었을 때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제자들 중에서 구체적인 성과 관련된 경험, 체험을 통해 분별을 내려주는 것이었다고 보여 진다.
 
 
출처 : 불교미술에 나타난 성  / 박영택(2005, 불교평론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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