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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페미니즘의 회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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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2-12-05 14:23 조회3,2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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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페미니즘의 회복을 위해
 
 
불교의 가부장적인 역사는 계율 문제와 성불 문제에서 나타난다.
 
첫째 계율 문제는 비구니교단이 생기는 과정에서 파생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모이면서 양모였던 마하파자파티 고타미는 부처님에게 세 번이나 거절을 당하고도 좌절하지 않고, 추종자인 5백 명의 석가족 여인들과 함께 다시 부처님에게 가서, 당시 부처님을 시봉하고 있던 아난 존자의 도움으로 비구니가 될 수 있었다.
 
이로서 당시 비구만으로 구성되었던 교단은 양성의 교단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난 존자의 물음에 대해 부처님은 여인들도 수행하면 수다원과 내지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여성을 교단에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비구니팔경법을 제정했으며, 마하파자파티 고타미와 5백 명의 여인들은 부처님이 제정한 여덟 가지 계를 수지하고 출가하여 최초의 비구니들이 되었다고 경·율전은 전하고 있다.
 
하지만 비구니팔경법이라는, 비구니가 비구를 공경해야 하는 여덟 가지 법으로 비구니를 차별하면서, 불교는 여성 차별주의적 종교로 낙인찍힌다. 그런데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비구니팔경법이 여성 출가의 시점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비구니교단이 성립된 이후에 여성이 출가한 것을 귀찮게 생각한 비구들이 정리, 제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불교의 평등주의적 사상은 대승의 공(空)사상과 여래장(如來藏=佛性)사상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여성과 관계된 공사상의 대표적인 경전으로《유마힐소설경》을 들 수 있다. 즉
유마경속에서 나오는 천녀와 사리불의 대화의 요점은 공(空)의 진리란 여자다 남자다 하는 정해진 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의 무아(無我)사상은 모든 존재 속에는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상일주재한 실체가 없다는 사상이다. 모든 것은 흐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불교의 중심 교리인 연기(緣起)는 ‘의존적 발생’이라는 의미로서, 원인과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런 상태로 존재하게 되며, 조건이 바뀌면 그 존재의 상태도 바뀐다는 것이다.
 
또한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 있는데, 이는 인연화합에 의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그 결과는 다시 그를 발생시킨 원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단순히 결과로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원인이 되고 연이 되어 다른 존재에 관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의 법칙이다. 이러한 존재의 무자성성(無自性性)과 연기성이 존재론적으로 본 공의 의미이다.
 
그것은 바로 사물을 연기실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은 이원적 대립을 벗어난(不二) 무집착과 무분별의 세계이며, 언어를 초월한 일미 평등의 세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여성이다 남성이다 하는 분별은 없다는 것이다.
 
대승의 수행자는 대승의 가르침을 듣는 것에 의해서,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발견하고 그에 의해서 보살의 자각을 갖고, 보리심을 일으킨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수행자는 ‘누구라도 보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성청정심이란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다는 의미로서, 대승불교에서 불성, 여래장사상으로 발전했다. 여래장이란 여래의 태, 여래의 태아라는 의미이다.
 
그 본래 청정한 중생의 마음에 깨달음의 가능성, 다시 말해 여래가 될 수 있는 씨앗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중생 가운데 있는 여래의 인(因)을 가리켜 부르는 이름이라고 해석된다. 요컨대 일체 중생에게는 성불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불교의 사상 체계가 변천해오는 것과 궤를 같이 해서 경전에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인식도 변천해온 것을 볼 수 있는데, 교리의 발달과 함께 교단의 주도권을 행사하던 전승자들의 여성관이 많이 작용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멸 후 결집 과정에서 아난 존자는 당시 결집의 좌장인 가섭 존자로부터 문책을 당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아난 존자의 권청으로 여성의 출가가 가능해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옳지 않는 일이라고 판단했다면 아무리 아난 존자가 간청을 했더라도 부처님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부처님과 그 직제자 사이에 여성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여성의 출가라는 문제를 생각하면 그것은 여성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부처님은 사회적으로 이런 처지에 있던 여성을 정신세계의 동참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결정은 바라문교 사회의 기본 질서인 카스트제도를 부정했던 부처님의 평등주의에 입각한 결단이었다. 또한 그런 환경 속에서 여성 출가를 결심했던 마하파자파티 고타미와 그의 추종자인 여성들도 페미니즘의 선구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구니팔경법이나 여인불성불설과 같은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들은 우리가 부처님의 근본정신으로 되돌아갈 때 얼마든지 재고될 수 있는 인식들이다. 한편 페미니즘의 경우, 여성 억압의 원인과 그 해결책에 대한 관점이 각기 다르고 또 그 주장들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만, 그 근간에 흐르는 것은 남녀는 기질이 달라도 그 존재로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차이’를 ‘차별화’로 가치 전환을 해서는 안 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 중심의 세상보기에서 양성 중심의 세상보기로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 등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기질이 다르고 역할이 다르게 살아왔다. 그것이 페미니즘에서 주장하는 문화적인 사회화의 과정이라고 해도 그 이전에 ‘몸’이 다른 것이다. 그 분별상이 업(業)의 세계이다. 업의 일반적인 표현이 ‘나와 나의 것’이라면 업의 성(性) 표현이 ‘여자’, ‘남자’인 것이다.
 
분별상 너머에 있는 평등성을 모르고 ‘남자다’ ‘여자다’라는 분별상에만 집착해서 사는 것이 인간 세상이고, 이 인간 세상을 지배했던 남성들이 ‘중심’을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두고 여성을 소외시키면서 지배해 온 것이 여성 억압이라는 인류의 공업(共業)이다.
 
페미니즘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이 인류의 공업에 도전하여 업장을 해탈하자고 주장하는 운동이다. 상의상관성의 법칙에서 볼 때 여성 억압은 여성만을 비인간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남성도 비인간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남성 인간화 운동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업의 분별에 집착하고 있는 중생에게 공의 평등성은 그냥 하나의 추상적이고도 난해한 관념일 뿐이다. 수행은 불교인의 근본이다. 수행자의 마음은 열린 마음이며 유연한 마음이다.
 
수행을 통해 ‘남’ ‘녀’라는 업의 분별을 넘어서 그 평등성을 깨달으며, 연(緣·조건)에 따라 ‘중심이동’을 할 줄 아는 열린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불교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이다. 그러고 보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온다.
 
불교 페미니즘은 부처님의 근본 사상으로 돌아가 그것을 의심 없이 믿고,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자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불교 페미니즘의 회복이다.
 
 
이창숙(2000), 불교 페미니즘의 회복을 위해, 불교평론 3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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