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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계율을 어떻게 볼 것인가 / 김규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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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3-02-13 13:54 조회3,2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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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계율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오계(五戒)는 성과 속, 고대와 현대를 불문하고 지켜야 할 계율로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커다란 예외를 만들어 놓고 있다. 계율에도 개차(開遮)가 있는 법이라며 예외나 방편을 말하기도 하고, 신라의 원광법사처럼 세속오계를 내세우기도 한다. 다른 종교 집단에서도 마찬가지, 아니 거기선 더 하다. 이른바 정통과 이단을 갈라 놓고 종교재판을 공공연히 행하여 살생과 망어 따위를 수도 없이 자행하였으며 성지 회복이랍시고 전쟁을 일으켜 대대적인 살육을 저질렀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선 그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계율은 힘없는 개인들만 지킬 법일 뿐, 힘이 세거나 큰 집단을 이끄는 이들은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결과적 성과가 대중의 기분에 들기만 하면 영웅 대접까지 해 준 것이 역사적 사례다.
 
그렇다면 이것은 좀 심하게 말하면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사람이나 나약한 부류에게나 적용되는 니체적 의미의 ‘노예의 도덕률’일 뿐 ‘주인의 도덕률’은 아니라고 표현해도 될 것인가? 세계와 사회의 구조가 지역적 한계나 국가적 범위로 나뉘어 각각의 중심부의 영향력과 통치에 따라 권력, 재산, 사회적 지위와 명예, 문화적 향유의 질과 내용 등이 정해지는 시대에는 사실 그러했다고 해도 틀렸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근대를 지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사태가 조금씩 달라지고는 있다. 개개인마다 주인의식을 갖고 나서고 있으며, 돈만 있으면 초지역적 초국가적 검투사들을 얼마든지 고용하여 주권자 행세를 하려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규범이나 도덕률의 입법과 심판은 많은 경우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담합(談合) 차원에 머물러 있다. 사태가 그러하다면 우리는 과거와 같은 계율관(戒律觀)이나 전근대적 잣대로 소위 세상에서 행세하는 자들의 언행을 평가할 수는 없다.
 
출처 : 현대에 계율을 어떻게 볼 것인가  / 김규칠 (2009, 불교평론 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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