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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여인들은 사찰의 ‘대화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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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2-12-05 13:54 조회3,1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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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왕실여인들은 사찰의 ‘대화주’였다
 
 
우리는 보통 조선시대를 숭유억불의 시대로 부르곤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불교관련 기사들만 보면 당시에 어떻게 불교가 살아남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불교에 대한 핍박정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사에 등장하지 않는, 각종 사지와 문집, 고문서에 나타나는 불심의 흔적들은 조선시대 불교가 훨씬 민중 속으로 깊게 파고들었으며, 불교의 명맥이 뿌리 깊게 이어져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중후기를 거치면서 한글 경전이나 진언집, 다라니경의 인쇄는 훨씬 더 증가했으며, 사찰의 중수나 괘불, 개금불사, 불상의 조성 등도 오히려 빈번해졌다.
 
조선시대 불교를 지탱시킨 요인으로 유교의 한계나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간 불교계의 노력,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의 활약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왕실 비빈들의 공로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들은 왕의 부인으로, 혹은 어머니로서 왕에게 불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왕실의 사재를 털어 사찰 중수의 대시주자로 참여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왕실원당은 왕실이나 궁방의 사유재산으로 기능하면서 사찰은 법적 보호를 받고, 왕실로서는 개인적인 기도처이자 경제적 기반으로 사찰을 활용했다.
 
이들의 불교신앙은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사회적 기득권을 박탈당한 불교계를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수호하는 최고의 방호벽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 중 몇 퍼센트가 불교신자였을까. 정확하게 수치를 내릴 수 있는 사안은 아니지만,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 신씨로부터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 윤씨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왕비들이 사찰에 기도처를 마련하거나 불사에 동참한 기록이 남아있다.
 
전체 구성원의 80~90%가 하나의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그 종교에 대한 기호라기보다는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문화에 가깝다. 왕실 여인들에게 있어서 불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왕비로부터 말단 무수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여인들이 수백 년간 지속해온 ‘공통의 문화’였다.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국가의 억불정책과는 별도로 왕실의 상제례는 불교식으로 치러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중종ㆍ명종 대를 기점으로 성리학에 근거한 주자가례가 정립되면서 모든 의식이 유교식으로 전환되었고 왕과 왕비들의 추모시설은 능침사 대신 종묘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내세를 논하지 않는 유교는 왕실 여인들이 정신적으로 의지하기에 종교적인 성격이 너무 미약했다. 또한 이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독과 불확실한 내세에 대한 희망을 해결해줄 수 있는 최고의 종교는 불교였다.
 
불교가 한반도에 유입된 이래 1000여 년간 사찰에 불단을 마련하고 득남발원을 하는 데 익숙했던 조선의 여인들에게 불교는 어머니로부터 딸에게,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에게로 자연스럽게 전승되는 기복의 종교였다.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의 불교신앙은 몇몇 특정 인물들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다수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부분이다.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은 사찰의 시주자로서 불교의 경제적 지지세력이 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남편이나 아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교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압력을 가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도첩제의 폐지였다. 승려가 되는 제도 자체를 법으로 원천 금지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성종은 결국 1492년 11월 도첩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인수대비는 아들에게 직접 언문교지를 내려 억불정책의 문제점에 대해서 조목조목 지적한다. 결국 도첩제는 유야무야한 제도가 돼버렸다.
 
왕실의 여인들이 불교를 신앙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불교계는 엄청난 정치적 지지세력을 확보한 것이었다. 이들의 불교신앙은 양란 이후 전화에 소실된 사찰들의 중창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경제적 기반으로 활용되었고, 전국 각지의 명산대찰은 왕실의 원당이라는 명목으로 지방 정부의 가혹한 납세를 피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불교의 외형적인 산물들은 사실상 조선시대 여성들의 불심에 의해 이뤄지고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성들의 불심이 만들어낸 나룻배를 통해 경전과 승려, 그리고 불법은 안전하게 오늘날로 전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배를 조성할 수 있었던 주체는 돈과 권력을 가진 인물일 수밖에 없는데, 조선시대에 돈과 권력을 가진 여성은 다름 아닌 왕실의 여인들이었다.
 
혹자는 이들이 아들낳기를 발원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지탱시키기 위해 불사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기복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들이었으며, 인간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비애를 불교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는 여성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사회였고, 특히 종법질서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왕실여인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런데 유교 이데올로기의 중심부인 왕실에서 불교신앙이 끊임없이 지속됐다는 사실은 불교가 조선시대에 담당한 역할을 시사한다.
 
그들의 정신적 탈출구가 바로 불교였으며, 유교로서 충족되지 않는 내세에 대한 갈망과 현세에서의 복락을 발원할 수 있는 의지처 또한 불교였던 것이다.
 
 
 
-탁효정(2006), 조선시대 왕실여인들은 사찰의 ‘대화주’였다 , 불교평론 28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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