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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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
팔리 《율장》의 비구계 227계 중에 21계가 음행과 관련되어 있다. 비구에게 정해진 4바라이(波羅夷, parajika)가 비구니에게 적용될 때에는 8바라이까지 늘어난다.
비구니계에 추가된 네 가지 바라이 중에 세 가지 역시 음행과 관련된 것으로서 4바라이의 ‘음계’를 바탕으로 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비구니에게 정해진 전체 바라이 수의 절반은 어떤 형태로든 음행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바라이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다른 계 조목도 마찬가지인데 승잔(僧殘)과 바일제(波逸提)도 상당수가 청정한 범행(梵行)에 장애가 되는 음행을 다루고 있다.
대체적으로 범행의 핵심은 금욕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모한 위제라트네(Mohan Wijeratne)는 《비구니 승가(Buddhist Nuns)》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불교의 교리나 계율, 그 어디에서도 영원히 순결을 지키는 일을 숭상한다거나, 그런 식의 육체적 성스러움이나 승려의 금욕이라는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부처님은 종교적 의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음행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종교적 정화(淨化)를 얻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모한 위제라트네가 말한 것처럼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상좌부 불교에서는 《율장》을 통해 비구와 비구니에게 금욕을 무척 강조한다는 점에서 깨달음을 얻는 데 금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이 글은 “깨달음을 통해 금욕을 하는 것인가, 금욕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인가?” 하는 주제로 불교의 여성 제자들의 수행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상좌부 불교의 《율장》에서 금욕의 위치를 고찰하고 둘째, 어린 나이에 수행의 성과가 있거나 깨달음을 얻었다가 이후에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고 지극히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한 여성 제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불교 문헌을 살펴본다.
다시 말하자면 상좌부 문헌에서 상당한 수행의 성과가 있다고 기록한 재가의 여성 제자들의 삶에서 금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상좌부 불교의 ‘깨달음’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며 현장 조사를 진행했다.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고 여겨지는 비구·비구니·재가 남녀 등 현재의 상좌부 명상 수행자들과 한 인터뷰를 한 결과 예류과(깨달음의 제1단계)를 얻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완전무결하게 청정한’ 금욕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애욕에 빠지지 말라는 등의 정해진 계율만을 지키는 재가인도 있었으며,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게 한’ 종교 체험을 하기 전에는,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는 세 번째 계율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규정들을 무시하고 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셋째로, 이 글에서는 상좌부 불교권에서 사는 현대 명상가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현장 조사 결과를 고찰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상의 재가인들의 삶을 살펴보면 금욕이 깨달음의 전제 조건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또한 깨달음을 얻는 데 금욕 생활이 얼마나 기여하는지도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계율이라는 형태로 비구와 비구니 승가에 극도의 금욕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에서 금욕의 역할은 평가절하될 수는 없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계율을 제정하셨다.
1) 승가의 청정을 위하여
2) 승가의 안주(安住)를 위하여
3)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멀리 하기 위하여
4) 선(善) 비구들의 안주를 위하여
5) 현세의 번뇌를 끊기 위하여
6) 내세의 번뇌를 미리 끊기 위하여
7) 새로운 사람들을 귀의시키기 위하여
8) 이미 귀의한 사람들의 신심을 증장시키기 위하여
9) 정법이 오래도록 안정되게 머물게 하기 위하여
10) 계율을 소중히 하기 위하여
그러므로 계율은 단순히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단체로서의 승가를 생생하게 유지시키려는 복합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비구와 비구니에게 주어지는 금욕의 계율 역시 단순히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길을 걷는 과정에서 육체적 쾌락과 마음과 육신의 본질을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금욕 생활의 과정을 겪게 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일찍 그런 마음 상태에 도달한다.
최후의 어느 순간에 세 번째 단계인 아나함과를 얻으면 완전한 금욕으로 전환한다. 아잔 브라흐마밤소(Ajahn Brahmavamso)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적 욕망을 완전히 초월하였기 때문에 성에 대한 열망에 불을 붙일 불씨가 남아 있지 않다. 모든 아라한은 ‘성적 능력이 있는 성 무능자이다.’”
유키 시라마네(2007), 최원섭 역,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 불교평론 32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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