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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왜 아라한이라 불리지 않았는가 -엘리슨 핀들리(안옥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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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2-10-05 13:46 조회3,1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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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왜 아라한이라 불리지 않았는가
 
엘리슨 핀들리 / 안옥선 옮김
 
 
“왜 여성은 ‘아라한’이라 불리지 않았는가”는 엘리슨(Ellison Banks Findly)의 논문 〈Women and the Arahant Issue in Early Pali Literature〉(Journal of Feminist Studies in Religion 15, 1999)을 완역한 것이다.
 
논문의 핵심 주제를 살리는 의미에서 위와 같이 제목을 변경하였다. 원제는 나타난 바와 같이 “초기 팔리문헌에 나타난 여성과 아라한 문제”이다. 논문의 구조와 내용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논문의 핵심을 소개하고자 한다.
 
초기불교 문헌 속에는 많은 여성 아라한(arahant, arahat, arhat)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도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아라한이 된 비구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당연히 아라한이 된 비구니들에게도 ‘아라한’이라는 호칭이 수여되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즉 남성 아라한과 마찬가지로 여성 아라한도 ‘아라한 아무개’라고 불렸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슨의 조사에 의하면 초기 팔리문헌에서 여성 아라한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에서일까?
 
이 논문에서 엘리슨이 탐구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초기 팔리문헌에서 아라한이 된 여성 출가자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왜 ‘아라한’이라는 경칭이 부여되지 않았느냐’라는 문제에 대한 답변을 그녀는 베다 시대부터 지속되어 온 사회적 관습에서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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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의 한 가지 중요한 사회적 측면이 베다적 유산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서 아라한의 유덕함에 의해서 보시자의 물질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교설, 즉 제도 불교에 전적으로 개입되어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던 ‘아라한’이라는 말이 사회의 성별 역할에 대한 지배적 태도에 도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성 출가자들은 보시자들에 의해서 비구와 똑같이 충분한 보시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성에게도 깨달음에 대한 해탈학적 가능성이 완전히 열려 있었을지라도 팔리불교는 상가에 들어오는 물질적 지원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관습적인 견해에 굴복하였을 것이다.
 
비록 보시자들이 여성 출가자들에게 네 가지 필수품 형식으로 지원하였을지라도 이들은 남성 출가자들에게 부여되었던 ‘보시 받을 만한(dakkhin.eyya)’ 충분한 지위를 여성에게 부여하는 것을 꺼려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초기 경전은 불안한 감수성(uneasy sensibility)을 가졌던 잠재적으로 활수한 보시자들을 거슬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에 대하여 ‘아라한’이라는 경칭의 사용을 보류했을 것이다.
 
비구니를 위한 보시를 요청하는 데 있어서 초기 경전은 어떤 후속적 문제들을 고려했을까?
 
전통 내에서 실제적인 보호조치, 즉 비구니가 마을에 홀로 가지 못하도록 하고 안전한 곳에만 다니도록 권유한 것을 제쳐둔다면 문헌은 여성이 보시를 얻는 데 있어서 겪은 어려움에 대하여 간략하게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숫타비브항가(Suttavibhan?a)》에서 수차에 걸쳐 표현된 한 구절은 한 상인 가장의 놀라움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비구니가 비구에게 음식을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여성은 어렵게 물건을 얻는다(kiccala?ha ma?uga?a).”고 말한다.
 
이러한 증거는 보시를 얻는 과정에 있어서 여성이 남성보다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분명하게 지지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은 다른 유형의 구절에 의해서도 완전하게 확증되는 것은 아니다.
 
팰크와 랭과 같은 학자들은 특히 전통이 발전함에 따라 비구니상가를 위한 물질적 자원은 매우 빈약해졌으며, 이것이 인도에서 그 전통의 붕괴의 원인이 되었거나 전통의 붕괴에 기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결론은 산치(Sanchi)와 같은 지역에 있는 석주상의 증거에 의해서도 지지되는데, 거기에서는 많은 여성 보시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보시의 혜택이 남성에게 가는 것을 선호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폰버그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문제는 “해탈학적 이론이 아니라 재정적 지원에 필수적인 사회적 수용성을 보존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팔리불교에 있어서 여성에 대한 상이한 견해들을 분류해 본다면 ‘아라한’이라는 말을 여성에게 적용시키지 않는 것은 서로 다르고 아마도 대립적이기까지 한 전통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아라한’이라는 해탈학적 용어는 사회적 상황이라는 사태에 희생되었다기보다는 해탈학적 관점에서 점차적으로 규정된 용어로 보이지만 더 오래된, 사회적으로 규정된 전통에 의해서 여전히 제한받은 것으로 보인다.
 
《테리가타》의 내용은 많은 여성들이 아라한의 상태에 대한 해탈학적 요구조건들을 완전히 성취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테리들 혹은 상가의 장로니들은 잠재적 보시자들에 의해서 여전히 불경한 몸에 속박되어 있다고 인지되었으며 따라서 지배적이었던 사회기준에 의해서 이들에게 아라한의 지위가 부여되지 못한 것이다.
 
후기 문헌에서는 특정의 여성들에게 아라한의 지위가 부여되지만 초기 경전은 여성의 정신적 성취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던 생리와 불경에 대한 《베다》의 견해에 의해서 구체화되었다.
 
 
-2000년 12월 10일 불교평론 5호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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