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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 속의 붓다와 인간의 욕망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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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2-06-16 15:20 조회1,3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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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사건 속의 붓다와 인간의 욕망에 대한 성찰

 (감신대 기독교백주년기념관 강연 원고 2002년 11월)

 

퇴현 전재성(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 철박)

 

애틋한 갈애가 생겨나는 이유는 생존을 위한 자양분을 공급받기 위한 것이다. ‘올바른 견해의 경’ Sammadtthisutta MN. I. 46; 增壹 49⋅5(大正 2. 797) 에 따르면, 갈애가 생겨나면 자양분이 생겨난다. 갈애와 자양분은 수반적 관계이다. 갈애는 자양분과 함께 생겨나는 것이다. 불쌍한 기러기에게 생겨난 자양분은 경전에 의하면, 이미 생겨난 기러기의 생존을 위한 것이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기러기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자양분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것인데 단지 음식으로서의 먹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경전에 의하면 자양분에는 네 가지가 있다. 그 네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첫째로는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적인 자양분, 두 번째로는 감촉의 자양분, 세 번째는 의도의 자양분, 네 번째로는 의식의 자양분이다. 이러한 자양분들은 이미 생겨난 뭇삶의 생존을 위하고 거듭 태어나게 될 뭇삶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기러기 아기가 로렌츠가 주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물질적인 자양분을 섭취하는 것이고, 애처럽게 울거나 기뻐하는 것은 감촉의 자양분을 섭취하는 것이고, 확고한 결심으로 달려오는 것은 로렌츠가 자신의 어미가 되어주길 바라는 것으로 의도의 자양분을 섭취하는 것이고, 어미의 존재를 계속 확인하려는 것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이와 같이 숭고한 생존을 위한 갈애에 인과적으로 묶여 있다. 로렌츠가 말했듯이, 불쌍한 아기가 애처롭게 울면서 헛발을 디뎌 넘어지면서도 계속 달려오는 놀라울 정도로 날쌔고 그 결심이 너무 확고해 보이는 그러한 행위는 그가 말했듯이 ‘돌부처라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감동적인 광경’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러한 갈애, 생명의 근원적인 욕망에 대해 무조건 도덕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갈애가 일어나는 삶의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이 강조되고 있다.

모든 생명은 아기 기러기처럼 감각 속에서 욕망에 굶주리고, 욕망 속에서 감각에 굶주리며 고통스러운 삶을 영위한다. 이른 바 욕망의 변증법이다.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이러한 인과적인 통찰을 두고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욕망에 의해 형성되는 고통스러운 삶을 다섯 가지 집착다발[五取蘊]의 존재라고 부른다.

 

그리고 존재 자체를 고통으로 파악하는 심오한 통찰도 필요하지만, 불교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그 괴로움의 존재가 아니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소멸이다. 괴로움의 발생은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다발에 욕망하고 집착하고 경향을 갖고 탐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집착다발에서 욕망과 탐욕을 제거하고 욕망과 탐욕을 버리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로렌츠와 아기 기러기가 삶의 무거운 짊을 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서로의 괴로움의 발생을 피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원적인 통찰을 필요로 한다. 로렌츠가 만약 시각능력에 외부에서 형상이 들어올 때에 발생하는 접촉에 관해 잘 이해하고 그 접촉이 갈애를 촉발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았더라면, 그는 보다 현명하게 대처했을 것이고 많은 고통을 짊어지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아기 기러기가 부화되어 깨어나는 순간에 그가 아기 기러기와 자신과의 시각접촉을 피하고, 기러기와 유사한 삶을 살아가는 거위나 황새와 같은 다른 새들과 똑같이 시각접촉을 나누었더라면, 서로가 그러한 삶의 무게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기 기러기는 거위나 황새를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그 무리에 섞여 자신의 갈애를 소멸시켜 나아감으로써, 갈애가 충족되지 못해 일어나는 탐욕에서 시달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탐욕이 좌절될 때에 원망에 가득 차서 ‘버림받은 것 같이 끼르르하고 우는 소리’를 내면서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렌츠 역시 ‘내가 여기 있다.’고 끼륵끼륵하면서 지속적으로 확인시키는 자아의식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올바른 견해의 경’ Sammaditthisutta MN. I. 46; 增壹 49⋅5(大正 2. 797) 은 이와 같이 말한다 :

“벗들이여, 고귀한 제자가 이와 같이 접촉을 잘 알고, 접촉의 발생을 잘 알고, 접촉의 소멸을 잘 알고, 접촉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잘 알면, 그는 완전히 탐욕의 잠재적 경향을 제거하고 분노의 잠재적 경향을 제거하고 ‘나는 있다’라고 하는 자아의식의 잠재적 경향을 제거하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키며 현세에서 괴로움의 종식을 성취한다.”

리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갓 태어난 기러기 아기처럼 매순간 세계와의 접촉이라는 경험세계로 뛰어든다. 그 경험세계는 무엇을 토대로 성립하는가?

‘사자후에 대한 작은 경’ Cluasihanadasutta MN. I. 63; 中阿含 103, 獅子吼經(大正 1. 852) 을 살펴보면, 접촉은 여섯 감역을 토대로 하고 여섯 감역을 원인으로 하고 여섯 감역을 기원으로 하고 여섯 감역을 근원으로 삼는다. 여섯 감역은 시각과 형상의 세계, 청각과 소리의 세계, 후각과 냄새의 세계, 미각과 맛의 세계, 촉각과 감촉의 세계, 정신과 사물의 세계를 말한다. 이 경험세계는 쾌락 즉, 잠재적으로 영원한 자아라는 관념과 결합되어 있는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 - 무상한 현실 - 을 피하려는 특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욕망이나 갈애라고 부른다. 갈애가 생겨나면서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고, 우리는 그 감각적 쾌락을 유지하기 위하여 견해에 대한 집착, 미신과 터부에 대한 집착,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게 되고, 그것들이 존재와 시간을 만들어내고 마침내 생노병사라는 현실적 괴로움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다.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이러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직면하고 있는 인간의 운명은 아기 기러기의 운명보다도 훨씬 애처롭고 어둡고 비참한 것이다. ‘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큰 경’ Mahadukkhakkhandhasutta MN. I. 83 에서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원인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조건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바탕으로 하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속하는 원인에 의해서 가택을 침범하고, 약탈을 일삼고, 도둑질을 하고, 매복했다 습격하고, 남의 부인을 폭행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통치자는 그들을 붙잡아 잔인하기 짝이 없는 형벌 - ① 채찍으로 때리고, ② 몽둥이로 때리고, ③ 곤장으로 때리고, ④ 손을 자르기도 하고, ⑤ 발을 자르기도 하고, ⑥ 손발을 함께 자르기도 하고, ⑦ 귀를 자르기도 하고, ⑧ 코를 자르기도 하고, ⑨ 귀와 코를 함께 자르기도 하고, 두개골을 자르고 뜨거운 쇳덩이을 넣어 죽이고, 살점을 떼어내고 모래로 씻어내어 소라모양으로 빛나는 해골을 만들어 죽이고, 막대기로 아 가리를 벌리게 하고 귀를 뚫어 죽이고, 몸을 기름에 적셔 불 위에 태워 죽이고, 손에 기름을 적셔 불로 태워 죽이고, 목에서부터 다리까지 피부를 벗겨 스스로 밟게 하여 죽이는 등의 스물 여섯 가지 형벌을 가해 처벌했다.

 

‘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 Cetokhilasutta MN. I. 101; 中阿含 206, 心穢經(大正 1, 780), 增壹 51⋅4(大正 2, 817)에서는 이러한 위험과 재난에 가득 찬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욕망의 세계를 두고 마음의 황무지라고 부른다. ‘고귀한 구함의 경’ Ariyapariyesanasutta MN. I. 160; MN. I. 160; 中阿含 204, 羅摩經(大正 1, 755), 本事經 卷4(大正 17, 679)은 인간이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추구하는 마음의 황무지 상태에 대해 ‘왜 나는 스스로 생겨나면서 생겨나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 늙어가면서 늙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 병들어 가면서 병드는 것을 구하며, 스스로 죽어가면서 죽는 것을 구하는가?’라고 반문한다.

인간의 비참한 운명과 마음이 황무지에서 유래하는데, 그것은 본래 인간에 내재된 어떤 본성이나 사회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에 대해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활동을 한 결과이므로 선하고 건전한 인상과 관련된 정신활동을 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맛지마니까야의 메시지이다. ‘사유중지의 경’ Vitakkasatnhanasutta, MN. I. 118; MN. I. 118; 中阿含 101, 增上心經(大正 1, 588) 에서 부처님은 ‘어떤 인상에 관해 그 인상에 정신적 활동을 일으켜 자신 안에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의 활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한다.

 

‘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 Dhammadayadasutta MN. I. 12 에 따르면, 선하고 건전한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은 바로 팔정도를 말한다:

“탐욕도 악이고 성냄도 악이다. 탐욕을 버리고 성냄을 버리기 위하여 중도가 있다. 그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고 고요함, 탁월한 앎, 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다. 벗들이여,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고 고요함, 탁월한 앎, 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끄는 중도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그것이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니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팔정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새김’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맛지마니까야의 첫 권에는 ‘새김의 토대에 대한 경’ Satipatthanasutta MN. I. 55; 中阿含 98, 念處經(大正 1. 582), 增壹 12⋅1(大正2, 568)이 있는데, 이 경은 바로 그 올바른 새김의 방법에 대해 상세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경은 빠알리니까야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불교가 지향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데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는 설득력 있는 경이다. 몸과 느낌과 마음과 사실에 대한 올바른 새김의 과정은 올바른 도덕적 관계로 열려진 사고를 통해 고요하고 깊이 있게 현존하는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그 때 모든 욕망과 집착의 사고과정은 인지되자마자 버려진다. 마음은 확고하게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성과정에서의 의식은 현재의 주어진 지각현상과 더불어 인식과정이 시작되면서 단순히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숙고에 의해 개념적으로 확산되어간다. 그렇게 되면 현존하는 대상은 개념적으로 확산된 희론적 지각 현상[妄想]에 의해 오염되어 버려서 희론의 구름 속에 비치는 희미한 달처럼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얼굴을 씻으려고 비누를 찾는데 없었다고 하자. 그의 의식은 얼굴을 씻는 현재에 확고하게 머물 수 없게 된다. 비누가 없다는 생각이 계속 개념적으로 확산되어 ‘도대체 비누는 어디에 있을까? 비누를 한 개 더 사야 되지 않을까? 누가 가져갔을까? 이 세면장에 누가 들어왔나?’등 희론적인 번뇌가 그를 괴롭히게 되기 때문이다.

 

‘사자후에 대한 작은 경’ Cluasihanadasutta MN. I. 63; 中阿含 103, 獅子吼經(大正 1. 852)은 ‘궁극적인 목표는 희론을 기뻐하고 희론을 즐기는 자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희론없음을 기뻐하고 희론없음을 즐기는 자에게 있는가.’를 묻고 있다. 이렇듯 희론이 우리를 괴롭힐 때에 필요한 것이 새김이다. 새김의 어원인 범어의 스므리띠(smrti)는 ‘기억’을 의미한다. 그 전날 밤에 어떠한 일을 했는가를 기억하면 그것이 책상 아래에 있는가, 아니면 거실 탁자 위에 있는가를 손쉽게 찾아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미래 속에서 폭풍처럼 일어나는 번뇌에 시달리던 우리의 의식은 다시 확고하게 현재로 회귀될 수 있다. 이것이 새김의 일련의 과정이다. 이와 같이 올바른 새김은 쓸데없이 확장되는 인식과정을 소멸시켜 청정하게 할 때 성립하며 그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한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의 ‘새김의 토대에 대한 경’ Satipahttanasutta MN. I. 55

에서 우리가 확고하게 현재로 회귀하여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한가한 곳으로 가서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몸을 바로 세우고 앞으로 주의 깊음을 확립하여 깊이 새겨 숨을 들이쉬고 깊이 새겨 숨을 내쉬는’ 자신의 생명현상부터 관찰하고 거기서 걸음마부터 다시 배울 것을 권하고 있다. 온 몸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온 몸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숨을 내 쉬는 것을 배워야 하고 몸의 형성을 고요하게 하면서 숨을 들이쉬는 것을 배워하고, 몸의 형성을 고요하게 하면서 숨을 내 쉬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고하고 아름답고 청정한 상태에 이른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유혹과 재난이 있다. 이것을 ‘더러움 없음의 경’ Ananganasutta MN. I. 24 은 경고하고 있다.

“벗이여, 이 세상에 자신에게 더러움이 없어도 ‘내 안에 더러움이 없다.’라고 있는그대로 잘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이와 같은 것이 기대됩니다. 그는 그 청정하고 아름다운 인상에 정신을 쓰게 됩니다. 청정하고 아름다운 인상에 정신을 씀으로써 탐욕이 마음을 덮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는 탐욕을 지니고 성냄을 지니고 어리석음을 지니고 더러움을 지니고 마음을 오염시킨 채 죽을 것입니다. 벗이여, 마치 시장이나 대장간에서 가져온 청동발우가 깨끗하고 정갈해도, 주인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닦아내지 않고 먼지구덩이에 그냥 방치해 둔다면 벗이여, 그 청동발우는 나중에 점점 더 더러워지고 때가 끼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유명한 ꡔ청정도론ꡕ의 모태가 되는 ‘파발수레의 경’ Rathavinitasutta MN. I. 145; 七車經(大正 1, 429), 增壹 39⋅10 七車(大正2, 733)에서도 수행을 통해서 나타나는 청정하고 아름다운 것에 욕망을 일으키지 말고 최종적으로 집착 없는 완전한 열반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벗이여, 그처럼 계행을 청정하게 함으로써 오로지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에 이르고, 마음을 청정하게 함으로써 오로지 견해를 청정하게 하는 것에 이르고, 견해를 청정하게 함으로써 오로지 의혹을 끊어 청정하게 하는 것에 이르고, 의혹을 끊어 청정하게 함으로써 오로지 길과 길이 아닌 것에 대한 앎과 봄을 청정하게 하는 것에 이르고, 길과 길이 아닌 것에 대한 앎과 봄을 청정하게 함으로써 오로지 길에 대한 앎과 봄을 청정하게 하는 것에 이르고, 길에 대한 앎과 봄을 청정하게 함으로써 오로지 앎과 봄을 청정하게 하는 것에 이르고, 앎과 봄을 청정하게 함으로써 오로지 집착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기 위한 것입니다. 벗이여, 집착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기 위해 세존을 따라서 청정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심에 비유한 작은 경’ Culasaropamasutta MN. I. 30

에서는 “청정한 삶은 이득과 환대와 명성을 공덕으로 삼지 않고, 계행의 성취를 공덕으로 삼지 않고, 삼매의 성취를 공덕으로 삼지 않고, 앎과 봄을 공덕으로 삼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부동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 있는데, 수행승들이여, 청정한 삶은 이것을 목적으로 하고, 이것을 나무심으로 하고, 이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 Cetokhilasutta MN. I. 101; 中阿含 206, 心穢經(大正 1, 780), 增壹 51⋅4(大正 2, 817) 은 열심, 전념, 인내, 정근을 통해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극복하여 궁극적인 자유를 획득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에 의하면, 궁극적인 자유는 ‘암탉이 계란을 올바로 품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키는’ 열심, 전념, 인내, 정근을 통해서, ‘병아리들이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오는’ ‘올바른 깨달음과 위없는 안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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