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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과 불교 그리고 섹슈얼리티 —‘남자는 없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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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3-09-14 14:42 조회7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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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과 불교 그리고 섹슈얼리티 —‘남자는 없다’ 

1. 서론


포스트휴먼이라 하면 대개 사이보그나 안드로이드, 자율주행차, 군사화된 드론 들을 떠올린다. 디지털 기술로 만든 이들이 주체가 되고 인간은 배제된다고 생각한다. 이건 산업의 이익을 갈구하는 기술 찬양론자이든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기술 공포론자들이든 우리에게 억지로 구겨 넣은 상상력에 불과하다. 오히려 인간 대다수를 배제하려는 거짓이다. 이 글은 가부장제 문명 속에서 오랜 세월 존재하지 않았던 여자가, 여성적 원리나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포스트휴먼 주체가 되어 인신세(人新世)인 이 시대를 구제하는가에 관한 정치철학이자 윤리학에 관한 것이다. 

라캉은 ‘여자는 없다’고 했다. 그의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꽤 유명하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여자가 없다. 신에서 천사, 천사에서 남자, 남자에서 동물로 이어지는 ‘존재의 사슬’에서 여자는 영혼과 이성이 부족한 존재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여자는 페니스가 없는, 해부학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로서 생물학적으로도 함량 미달이다. 남자는 육체적으로도 완벽한(비트루비우스적), 영혼과 이성의 주체로 인간 범주의 대표자였다. 

포스트휴먼 시대, 역설이 일어난다.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는 포스트휴먼의 핵심을 탈-인간주의(휴머니즘)와 탈-인간중심주의로 규정한다. 휴먼이 사라지고 있다. 인간의 대표인 남자가 없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배제되고 부재였던 존재들이 일어나고 있다. 휴머니즘은 서구의 백인 중산층 남자를 주체로 보았다. 이와 달리, 휴머니즘 시대에 배제되었던 타자들, 성차화된 타자(여성), 인종화된 타자(토착인) 자연화된 타자(동물, 환경 즉 지구)들이 포스트휴먼적 주체가 된다. 

포스트휴먼 시대나 원시 불교 시대는 자기의식의 시대이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긍정적으로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 우린 과거 2,500년 전 축의 시대 붓다의 철학과 수행에서 전환적 사유를 배우고자 한다.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에서 철기의 보급으로 인간이 끝없는 전쟁을 통해 살육과 파괴를 일삼던 시대에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고 인간존재에 대해 질문을 하기 시작한 시대로 그린다. 유행자(流行者) 사문들과 함께 붓다는 지혜와 자비라는 여성적 원리로써 살해와 파괴의 전사적 에토스를 아힘사(불살생)와 평화의 에토스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포스트휴먼 시대는 이와 유사하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만든 멸종의 위기를 자각하고 18세기 산업혁명 이후의 자본주의 시대를 “인신세”라 부른다.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에 따르면, 인신세는 이익 “계산이 모든 결정 기준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시대”이다. 가파른 경제적 이익 추구가 다른 생물종의 멸종을 가속화시켰는데, 알고 보니 이제 자동화와 알고리즘으로 생물종으로서의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다는 걸 스스로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렇게 나란히 닮은꼴의 두 시대에서 여성적 원리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돌봄과 치유라는 여성적 원리로 자동화 사회를 탈자동화 사회로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본다. 자동화 사회는 무돌봄 사회이다. 인간은 기술의 처분에 맡겨진다. 축의 시대에 전쟁과 급격한 도시화가 만들어낸 엔트로피를 지혜와 자비, 그리고 열반 사상으로 부(負)엔트로피를 생산하여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포스트휴먼 시대 자동화로 얻은 시간을 탈자동화를 통한(인간과 동물뿐 아니라 모든 비인간적인 것 포함하여) 지구의 거주자들에 대한 돌봄 능력에 투자함으로써 가파른 이익 추구로 인한 엔트로피를 낮추는 부엔트로피(negentropy)의 생산을 통해 기후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환의 시대, 전환적 사유로서 여성적 원리는 성차/섹슈얼리티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필자는 본다. 여기서 젠더가 아니라 성차가 재사유된다. 유럽문화에서 그리고 주체성의 철학에서 ‘주체-구성의 주요 축으로서의 섹슈얼리티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된다. “성차가 정체성과 사회적 관계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중심축인 것은 바로 섹슈얼리티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이다. 섹슈얼리티를 통해서 차츰 이론적 사유, 즉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하고 세계를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로 나아간다. 불교의 사유와 포스트휴먼의 사유가 만나는 지점은 관계적 주체론이다. 불교의 연기 사상과 무아론을 포스트휴먼의 관계적 주체와 관련하여 살펴보고 돌봄과 연대의 윤리가 나옴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2. 보철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기술혁명, 그리고 엔트로피

포스트휴먼 시대나 원시 불교시대는 나란히꼴 시대로 볼 수 있다. 이 두 시대가 중요한 이유는 기술의 발전이 가히 혁명적이라 할 정도로 이루어지면서 효율과 부의 증진을 넘어 인류 자체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달리 유년기가 유난히 길 뿐 아니라 털이나 두터운 가죽 없이 바로 대기에 노출되며 맹수들을 상대해야 하는 연약한 피부를 가진 종이며 이빨이나 손발톱, 뿔 들 공격이든 방어이든 대응할 무기도 몸에 장착되지 않은 존재이다. 인간은 이런 존재론적인 허약성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도구나 기술의 개발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즉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비극적 존재이지만, 도구나 기술에 필연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는 보철적 존재이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과 사유에도 해당한다. 절름발이에게 인공 다리가 필요하듯이 인공물인 ‘정신의 목발’ 역시 필요하다. 인간 주체의 인식과 사유가 인간의 이성이라는 화수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기술적 도움으로 진행되고 발전된다. 동굴벽화, 문자의 발명, 인쇄술이나 CD나 usb 등 외부화된 기록장치 기술 덕택이다. 

하지만 철학은 주체의 인식과 이념만을 중심적인 사유 대상으로 삼았고 고대사회 이래 노예가 담당해온 노동과 기술은 사유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그래서 스티글러는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는 하이데거의 존재-망각이 아니라 기술-망각이었다고 한다. 이에 육휘(허욱)는 기술은 인간이 환경과 조우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우주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것이므로 코스모테크닉스(cosmotechnics)적으로 봐야 한다고 한다. 이제 기술-물음이란 단순히 기술학의 분과 속에만 존재하는 기능요소가 아니라 존재-물음보다 더 심오한 ‘조건’이 된다. 따라서 철학은 마땅히 기술-물음을 통해 새로운 형이상학, 그리고 새로운 코스모테크닉스를 창조해야 한다. 

이러한 보철적 인간존재론과 기술혁명의 문제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디지털 컴퓨터와 인공지능 기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기본적 관점을 제공해준다. 산업혁명을 통한 근대성은 사실상 기술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지만, 이 기술을 사유와 정치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스티글러의 “테크놀로지의 무의식” 개념을 빌려서 육휘(허욱)는 기술의 진화를 사유 대상으로 취급하길 거부하거나 망각한 결과 기술에 대해 사유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한다. “인간 자체가 그 거대한 기술적 네트워킹의 한 지절이 되어 세계를 총체적으로 사유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육휘(허욱)는 윤리의 문제보다는 “상상력을 포함한 지성”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육휘(허욱)는 “코기토에게 세계를 착취할 수 있는 의지와 자기 확신을 부여한 것이 이 테크놀로지적 무의식”이라고 한다. 과학자들과 투자자들이 우주개발 프로젝트를 실행시키는 것은 자신들의 계산 이성에 대한 확신에 차서 하는 것이지 그들의 행동이 지구의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유할 능력의 빈곤과 상실은 우주여행과 화성 개발을 전면에 내세우는 일론 머스크의 언행과 기행에서 보인다. 일론 머스크의 광대 같은 우스꽝스러운 행동 이면에는 오로지 투기적 버블을 통한 이문 추구가 본질이며 동시에 디지털 기술의 포스트휴먼 시대에 사유 혁명과 정치 혁명, 그리고 새로운 윤리학의 필요 급박함이 은폐되어 있다. 

다음 문제로 기술혁명으로 야기한 엔트로피의 급속한 증가가 생태계 파괴, 기후 위기 들을 불러일으키며 인간이 스스로의 서식처를 파괴해나가면서 멸종으로 나아가는 것을 살펴보자. 기술혁명은 필연적으로 엔트로피를 급속히 증가시킨다.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는 물체가 열을 받아 변화했을 때의 변화량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태양열에 의해 생명의 창조가 계속 일어나긴 하지만 지나친 자연 파괴로 엔트로피가 계속 증가하다 어느 순간 열(혹은 에너지)이 더 이상 이동하지 않는 열평형에 도달하게 되어 이른바 우주가 종말을 맞게 될 수도 있다. 

지금 시대를 인류가 인신세라고 부르고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인류의 멸종 가능성을 조심스레 예측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스티글러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엔트로피의 더더욱 가파른 증가를 불러올 것이라 보고,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늦추고 부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적 임무라고 보았다. 불교의 열반 사상은 가열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고 부엔트로피를 늘리자는 대표적인 전환적 사유이다. 

폴 셰퍼드(Paul Shepard)는 《자연과 광기》에서 “인간은 왜 스스로의 서식처를 파괴하는가”라고 물었다. 기술혁명이 진보의 속도를 엄청나게 가속시키는 대신 자연과 환경은 더 빠른 속도로 황폐해진다. 이건 개발자나 개별 자본의 비양심성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라 보철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기술혁명의 숙명이다. 그래서 인류는 이성이나 영혼이 아니라 기술혁명에 대한 사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제 자본 비판이 아니라 기술 비판이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인신세라 하고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동안 금융자본의 지구화를 통해 이제는 더 이상 선진국의 엔트로피를 전가할 미개발 지역들이 급속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철기를 다루는 전사나 생산 노예인 농부의 처지에서 벗어나 유랑하며 지혜와 영적 진리를 갈구하는 사문들, 그리고 비구와 비구니 무리들에서 엔트로피를 낮추는 네겐트로피적 행위를 발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기술혁명 역시 파르마콘이다. 엄청난 풍요와 부의 축적 속도보다 더 파국적인 엔트로피의 증가를 막고 디지털 알고리즘의 자동화를 무효화시키는 탈자동화의 전환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전환기적 사유의 핵심이 된다.


3. 축의 시대, 불교가 지혜와 자비로 답하다

1) 철기의 보급과 문자혁명과 엔트로피 폭증


기원전 6~7세기, 붓다의 시대인 축의 시대는 씨족사회의 원시 공화제와 부족국가의 전제 군주제가 대립, 갈등하다가 후자가 전자를 삼키는 시기이다. 이 시기가 그렇게 격렬하게 먹고 먹히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든 것은 고대사회 최고의 기술혁명이라 할 수 있는 철기의 보급 때문이다. 기원전 8세기경에 이루어진 철기의 도입은 포스트휴먼 시대의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기술보다 더 큰 게임 체인저였을 수 있다. 

기원전 6세기가 끝날 무렵 가장 크다고 손꼽히던 곳은 인도 남동부의 마가다와 남서부의 코살라였다. 붓다는 히말라야 기슭의 카필라성(가비라성)을 중심으로 한 석가족(釋迦族)의 작은 산촌 부족장의 아들이다. 석가족은 코살라에 먹히고 코살라는 마가다 왕국에 먹힌다. 당시 16개의 나라들이 마가다 왕국 하나로 흡수되었다. 이런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붓다는 왕국의 부침, 권력의 무상함, 생명의 허무함 들을 무시로 보게 된다. 살아서 자신의 나라가, 자신의 아버지가 패망하는 걸 지켜보기도 한다. 붓다가 출가를 감행했을 때, “그 어깨에 걸머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자기의 문제 자기의 고민”이었다. 

철기의 보급은 전쟁에서 살육과 약탈의 효율을 높여 정복의 속도를 빠르게 했을 뿐 아니라, 짧은 시간 내에 울창한 삼림을 곡창지대로 만들며 이를 통해 도시문명을 빠른 속도로 건설해갈 수 있게 했다. 마가다 왕국이 승리하자 전제 왕국의 부흥과 함께 도시 상업경제로 산업구조의 전환이 일어난다. 원시적 자본주의가 발달한다. 

경전에서 장자(長者)로 번역되는 바이샤들은 금융업과 상업에서 치열한 경쟁을 했으며 탐욕은 부에 대한 욕망을 부추겼고 경제 역시 가파르게 성장했다. 그 당시의 원시 자본주의는 21세기 포스트휴먼 시대에 알고리즘으로 작동되는 주식시장을 장악한 디지털 순수자본주의마냥 가파르게 발전하였다. 암스트롱은 “가축 약탈이 경제의 주축을 이루던 시기보다 삶은 훨씬 더 폭력적이고 무시무시하였다”고 한다. 신분의 급격한 변동과 부의 양극화, 일반 백성들의 노예 수준의 삶 그리고 황폐화되는 도시의 환경들. 이런 것들은 엔트로피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철기의 보급이 정복 전쟁의 완성과 도시산업경제로 이끌었다면 ‘정신의 목발’이라 할 문자의 발명 역시 혁명적 진보를 일으켰다. 디지털 시대에 우리의 의식을 외부에 저장하기 위해서 usb나 컴의 메모리와 같은 기술적 장치를 사용하는데, 그 당시의 문자혁명은 빅데이터와 디지털 알고리즘을 훨씬 넘어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문자의 발명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 전쟁의 시대가 왜 그렇게 ‘축의 시대’라는 전환기를 불러왔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된다. “궁극적인 추상화에 다름 아닌 문자문화로 인해 복잡한 관념적 사상 체계”가 출현했고 글을 알고 있었던 “영적 지도자들을 고도의 의식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동력”이 되었다. 아마 이런 문자 기록의 역할이 자기의식의 시대를 만들고 인간이 스스로에 대한 존재 질문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축의 시대에 ‘왜 이 영적 지도자들의 메시지에 그토록 자주 여성 혐오사상이 따라다니는가?’ 하는 것이다. 대답은 “문자언어에는 본질적으로 반여성적인 어떤 것이 내재한다. 문자언어에 사로잡힌 남자들은 성차별주의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붓다는 살아생전 평등의 원리를 설파했다. 문자문화가 혁명적 진보를 일으켰던 시대에 붓다도 소크라테스처럼 문자언어를 멸시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자신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문자로 기록하지 못하게 했다. 붓다의 교설은 간명했으며 설법과 선문답을 더 좋아했다. 글을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말로써 설법으로 계급을 가리지 않고 그들과 대화를 통해서 대기설법(對機說法)으로 자신의 지혜와 자비심을 전파하고자 했다. 

2) 전환적 사유와 불교의 여성적 원리, 네겐트로피를 지향하다 

철기의 보급과 문자혁명은 브라흐만의 세습적 카스트 제도를 부분적으로 흔들기는 했지만, 오히려 부의 양극화와 불평등을 가져왔다. 왜 이런 기술혁명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부의 축적과 명예를 위해 살지 않고 출가자로서 유행하며 탁발 걸식을 하는 거대한 지적 영성적 흐름을 만들어냈을까?

치명적 철기 무기로 전쟁에서의 살육뿐 아니라 사냥에서, 그리고 가축의 도축에서, 삼림의 벌채에 이르기까지 파괴의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다. 그건 디지털 시대의 ‘파워 법칙의 역학’처럼 승자독식의 세계이다. 도탄에 빠진 사람들, 개탄하는 현자들, 무언가 역전의 흐름이 일어난다. 내면의 영적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전환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그건 전 세계적으로 번진 아힘사(불살생)의 외침이다. 

당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자이나교에서 아힘사(불살생)를 통한 해탈은 고귀하고 영웅적인 행위였다. 역전이 일어난다. 전사들의 에토스가 바뀌고 있다. 전쟁에서의 살해의 흥분과 명예, 공훈에 대한 욕망이 아니다. 자이나교의 금욕주의자들은 자신의 ‘호전적인 본능과 싸우고, 깨닫지 못한 모든 사람의 특징인 공격성’으로 일어나는 나쁜 결과를 막아내는 전사였다. 이들은 걸을 때마다 행여나 벌레를 심지어 이끼를 밟을까 봐 주위를 살폈고, 불을 피우지도, 땅을 파지도 않았다. 이들은 일상생활 하나하나에 모두 공감하며 그런 일상적 제약이 바로 영웅적인 제약이라 생각했다. 고타마 역시 이런 영적 분위기에서 성장하면서 그의 천성이 더 예민해지고 자비로워졌다. 어린 시절 복숭아나무 그늘에 앉아 쟁기질하는 밭에서 무수한 벌레들과 연약한 풀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 고타마는 살육에 대한 슬픔과 깨달음에 대한 해방의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이런 새로운 전환적 사유와 그 흐름을 주도하는 현자들과 수천의 사문들은 전사나 상인, 농부가 되지 않고 걸식을 하고 무소유를 명예로 여기는 대역전을 주도했다. 이것이야말로 철기와 문자혁명의 엔트로피를 낮추어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혁명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바이샤도 크샤트리아도 왕과 왕족들도 이들을 후원하며 지지했다는 것이다. 바이샤들은 불교에 돈을 대고 왕과 크샤트리아들은 붓다의 전도를 안전하게 보호했다. 기술은 약과 독을 모두 가진 파르마콘이다. 기술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기술의 독을 버리고 기술의 약을 나누자는 것이다. 즉 기술의 발전으로 얻은 그 풍요를 기술의 독을 줄이고 사용 방향을 전환하는 데 투자하고 그런 지혜와 영적인 흐름을 사회 전체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흐름을 만들어내는 원리가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는 품성이자 원리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붓다는 기존의 남성 성직자에게서 권력을 박탈하길 원했고 붓다의 본래 가르침에는 비폭력, 만인의 평등, 보편적 사랑, 수평적 사회계층과 같은 수많은 “여성적 모티프들”이 존재한다. 모든 불교 종파들의 모토는 지혜와 자비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전통적으로 “여성적 원리와 관련”되어 있다. 

니체가 내세우는 덕들과 달리 불교가 내세우는 덕은 부드러운 덕이라고 박찬국은 말한다. 니체가 귀족적, 남성적, 영웅적, 호전성을 생명의 의지와 연결시켜 찬미한다면, 불교가 지향하는 덕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인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자애와 사랑, 연민과 보살핌, 중생의 기쁨을 함께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좋고 나쁨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의 마음이다. 붓다가 내세운 이러한 여성적 원리는 첨예한 대립을 완화시키고, 전사적 에토스를 여성적 모성적 자비와 연민, 책임의식으로 전환하여, 단순히 종교적 치유기능이 아니라 인간 존망의 위기를 진정시키는 사상적 운동이자 실천 지침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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