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휴먼과 불교 그리고 섹슈얼리티 —‘남자는 없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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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3-09-14 14:49 조회772회 댓글0건본문
1) 포스트휴먼 시대, 탈자동화로 답하다
포스트휴먼에 관한 논의는 인공지능, 로봇공학, 유전공학 들에 대한 것에서부터 테크노크라트적 유토피아에서부터 트랜스휴머니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대체적으로 기술혁명으로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오고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살펴본 철기의 보급과 문자혁명의 시대인 축의 시대와 나란히 닮은꼴이다. 시몽동은 특정 기술이 유용의 한계를 넘어 과도하게 발달하는 이러한 현상을 과진화(hypertelie)라고 하였고,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2014년 《인디펜던트》 공동기고문에서 인공지능은 “인류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 또는 최악의 일”이므로 공포를 느껴야 한다고 하였다.
현대자본주의는 데이터기술을 통해 순수하게 컴퓨터적인 것이 되었다. 구체적인 인간의 노동과 정신을 떠나 자동화가 된 것이다. 이 자동화는 고성능 컴퓨터 처리로 만들어진 빅데이터를 통해 알고리즘적 논리로 이루어진다. 인간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인간의 노동과 정신을 떠나 순수하게 컴퓨터적인 것이 되기까지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기술혁신을 이루어왔다. 이런 기술혁신을 기술 진화론적 관점이나 생산성 향상의 관점에서 좀 벗어나 인간의 존재 양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에 중점을 두어 스티글러의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해보겠다.
18세기 산업자본주의는 인간이나 말 들 살아 있는 생명체의 힘에서 독립된 동력기관을 발명했다. 오랫동안 기술을 연마한 장인을 비롯한 숙련노동자들의 ‘노동의 노하우(know-how)’는 필요 없어졌고 노동자들은 단순 미숙련 노동을 하는, 노동 노하우의 상실과 빈곤화가 이루어졌다. 농부들이 토지에서 자유로워졌다(독립되었다, 박탈당하였다). 몸과 기술을 팔 수밖에 없는데 동력기관과 자동틀의 발명은 노동의 기술 축적마저 허락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분업으로 부품화되어 갔다.
20세기 초반에 자본주의 생산의 고도화에 따른 잉여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스스로 살아가면서 이루어가는 ‘삶의 노하우’를 축적할 기회를 상실했다. 스티글러의 말대로, 노동에 이어 ‘삶의 노하우의 상실과 빈곤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밥 짓기, 옷 짓기, 집짓기 들은 자본의 상품 교환관계에 들어가지 않고 스스로 해서 살아갔다. 여자들이 주로 무임으로 담당하긴 했지만, 가사노동은 살림 노동으로 삶의 주요한 축을 형성했다. 남자들이 집을 짓거나 동네의 다리를 놓거나 고치기도 했다. 포디즘-케인즈주의적 타협은 기술혁신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의 노동 몫을 증진시켰고 임금 조건의 개선으로 이루어진 노동자들의 구매력 향상은 선순환구조를 이루는 듯했다. 하지만 이것은 소비를 미덕으로 보고, 소비주의에 매몰됨으로써 삶의 노하우를 상실하게 했다. 이를 스티글러는 상징의 빈곤, 즉 감수성의 프롤레타리아화라고 칭한다. 여기서 문화생산자인 TV는 지대한 공헌을 한다. TV의 프로그램은 우리가 골라보는 게 아니라 우리 소비자를 프로그램화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으로 대변되는 보수주의(신자유주의) 혁명 이후 주주자본주의와 디지털 기술이 본격적으로 결합하게 되었다. 주주자본주의는 주식을 얼마나 가졌나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1인 1표의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것으로 하버마스가 ‘재봉건화’로 지칭할 수 있는 것이다. 68혁명의 취지에 정면 반대하는 보수주의 혁명으로 법인세 감면, 노조 탄압, 실질임금 인하 들 자본의 몫은 급속하게 증가되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빈곤해졌다. 이것이 현대 디지털 자본주의의 자동화 기술을 만들어낸 직접적인 원인이다. 알고리즘 자동화 기술은 무언가 인간의 정신과 의지의 개입이 없는 듯하여서 사람들은 노동자의 몫 배분을 생활비 수준으로 늘리던 포디즘-케인즈주의적 타협이 끝났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다. 금융자본은 디지털 자본주의를 통해 세계화되었고 이와 더불어 인신세와 기후 위기라는 지구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기술혁신은 기본적으로 부의 불평등에서 비롯된다. 기술이 느림보 발전이 아니라 가파른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본의 투여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 전제는 자본의 대규모 집중이다. 즉 대다수의 빈곤과 극소수의 거부(巨富)라는 양극화가 전제된다. 사회 최대의 불안정을 연료로 하여 기술 대혁신이 일어난다. 엄청난 풍요 이면에 자연 파괴와 엔트로피의 파국적 증가가 일어났고 사회적 자연적 유대는 파괴되었다.
21세기 들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들 ‘소셜’ 네트워크와 함께 메타데이터, 개인정보, 쿠키, 전자 추적 장치 그리고 여러 다른 트래킹 기술들이 등장했다. 이런 기술에 대해 스티글러는 “존재들의 자동화”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라고 한다. 지속적 규율과 즉각적 커뮤니케이션으로, 일주일 7일 24시간 잠자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자동적으로 연결되는 24/7 자본주의가 되었다. 요즘 개최되는 멍때리기 대회나 걷기, 명상 요법들은 자동화된 존재의 네트워크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작은 움직임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문제 되는 것은 펠릭스 가타리가 말한 ‘가분체’이다. 가분체는 개체가 여럿으로 나뉘는 것이다. 우리가 넷상에서 쓰는 여러 개의 ID는 우리가 하나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방해한다. ‘존재의 자동화’와 더불어, 각종 생체 정보나 여러 가분체들의 축적물이 데이터은행(센터) 내 적분의 알고리즘으로 처리, 관리되는 ‘기계예속화(mechanic enslavement)’가 된다. 이리하여 자동화 사회에서 우리는 지식과 이론적 작업을 할 수 없다. 오히려 “전반적 망연자실과 기능적 어리석음”으로 몰린다.
엄청난 풍요 앞에서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그리고 로봇에게 맡기고 우리는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동화 사회의 환상 속에서 망연자실하게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해 스티글러는 3번째 ‘상실과 빈곤화’를 얘기하고 있다. 이론과 지식의 노하우를 상실하고 가치와 지향점을 잃어버렸다. 지식의 모든 영역(어떻게 살고 행동하고 세계를 이해할 것인가)에서 가치와 지향점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에 주식시장의 알고리즘이나 코인, 부동산 가격 등락을 보는 일 이외에 무엇에 흥미를 느끼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 성차/섹슈얼리티와 관계적 주체
앞에서 인간은 기술의 과진화에 의해 18세기 이후 노동과 삶, 지식의 노하우 상실과 빈곤화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에 대해 섹슈얼리티의 노하우를 상실해가는 디지털 극순수 자본주의에 대한 고찰을 통해 성차/섹슈얼리티가 어떻게 노동과 삶과 지식의 노하우를 되찾는 데 기여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어보겠다. 그리고 불교의 무아론과 연기론에 나타난 섹슈얼리티와 비교하여 서술하겠다. 그것은 축의 시대와 포스트휴먼 시대가 나란히 닮은꼴인 것과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점이 포스트휴먼 시대의 섹슈얼리티를 고찰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자들에게 원하는 게 섹스밖에 없는 상황 속으로 남자들이 가파르게 몰락해가고 있다. 남자가 여자와 상호주관적 정열로 사랑을 나누지 않고 감정소비와 데이트 비용이 싫어서 테크노이브나 리얼돌, 그리고 사이버 섹스, 때로는 매춘을 통해서 오로지 섹스만을 충족하고자 할 때 남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동안의 역사에서 남자들은 가부장으로서 가족 생계비를 책임질 정도로 임금을 받고 승진이나 명예도 가졌기 때문에 자부심과 경제력으로 여자들에 대한 지배와 권력을 누렸다. 여자들에게 그동안 원했던 것이 임신 출산 육아, 살림, 섹스, 간호, 가정 꾸리기, 가정 재산 일구기, 감정노동 들이었는데 이제 남자들은 여자는 필요 없고 섹스 충족만 필요하다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섹슈얼리티 노하우의 상실과 빈곤화’라 할 수 있다. 여자들은 섹스를 하는 것보다 남자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난다는 걸 환영하기 때문에 기꺼이 감수하고자 한다. 최근 임금 노사협상에서 노동자 측은 가족 생계비를 최저임금의 기준으로 제시하나 사용자 측에서는 독신자의 최저생계비를 제시하고 있다. 자본이 요구하는 남자는 이제 가정의 왕좌에서 내려와 사이버 섹스나 인공지능 혹은 리얼돌과의 섹스를 하고, 배달앱으로 혹은 인스턴트 음식을 사 먹고, 휴대폰이나 컴퓨터로 접속할 때만 존재하는, 상호작용 없는, 투입(input)과 산출(outcome)만이 존재하는 기계(인간)가 되어가지 않는가? 정말 극순수 자본주의화되어 가고 있다.
그동안 남성과 여성의 성차를 없애려는 방향으로 페미니즘은 여성해방 이론을 쓰고자 했다. 그것은 성적 차이, 즉 성차가 남녀 차별과 여성 억압의 원인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휴머니즘은 남자를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여자는 성차 때문에 남자에게 못 미치는 존재로 인간이 아니므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휴머니즘적인 페미니즘은 성차는 사회구성주의적인 것으로 보는 젠더적 관점을 가진다. 이에 비해 포스트휴먼은 남자만이 인간이던 것을 멈추기 때문에 성차는 남녀 구별이나 차별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이리하여 성차를 긍정적으로 보고자 하는 포스트휴먼적 페미니즘 기획이 대두하게 된다. 성차의 기획 출발점은 여성의 “육체적인 산 경험의 구체성”을 역설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로 남아 있다. 성차는 여성의 본질주의적 측면인데 성차를 그 몸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여성들의 “육체적 실존, 경험과 다시 연결하려는 의지”이다. 그래서 이 페미니즘 기획은 “상동화, 즉 여성들을 남성적인 사고방식과 실천, 결과적으로 남성적인 가치 집합들에 동화되도록 이끄는 해방주의를 거부”한다.30)
맛지마 니까야의 《앗쌀라야나의 경》에 따르면 붓다는 “인간은 누구나 월경, 임신, 출산, 수유를 갖고 있는 여인에게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브라흐만도 마찬가지다. 붓다는 여성의 성차를 긍정하고 들어간다. 붓다는 성 자체가 생물학적 본성이므로 옳고 그름의 문제로 파악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남자의 자위행위도 여자가 생리하는 것처럼 생물학적인 것으로 보았다.
붓다는 평등원리에 따라 남녀의 성차/섹슈얼리티에 대해 철저하게 대극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AN. Ⅳ. 57) 《결박과 결박의 여읨에 대한 법문의 경》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의 성립과 한계에 대해 붓다는 설명한다. 여성성은 내적으로 여자의 신체적 특성에 기초하여 행동하고, 교만, 욕망, 소리 치장 들의 정신활동에 탐닉하며 환희하는 만큼, 이와 동시에 여성성은 외적으로 남자의 신체적 특징에 환희한다. 그런데 여자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남성성 또한 여성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불교의 교설인 연기법이나 무아론에서는 성차에 기반한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실체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차가 문제 되지 않는다.
전재성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섹슈얼리티가 지닌 대극성의 본질은 특히 윤회 속에 감추어져 있다. 상윳따 니까야의 《어머니 경》 《아버지의 경》 《형제의 경》 《자매의 경》은 붓다가 남녀 고정된 성적 역할이나 젠더 구별에 매몰되지 아니하고, 남자는 남성성을 초월해야 함을, 여자는 여성성을 초월해야 함을 탁월하게 말하고 있다. 오랜 세월 거듭된 윤회에 따르면 일찍이 한 번도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가 아니었던 사람이 없기에 현세에 남성이라고 우월하거나 여성이라고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여성관과 달리 여성 섹슈얼리티의 악마성에 대해서도 평등원리로써 대극성은 관철된다. 앙굿따라 니까야 《여자의 경》에서는 남자의 입장에서 본 여성의 악마성, 즉 부정적인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해 설교하지만, 또한 여자의 입장에서 본 남성의 악마성에 관해서도 앙굿따라 니까야의 《남자의 경》을 통해 언급하고 있다.
남녀의 본질적인 성차를 인정하지만 사회적 규범으로선 동등하게 보았다. 이런 결론이 나오는 것은 연기론과 무아론이라는 붓다의 혁명적 사유 덕택이다. 무아론은 포스트휴먼적 주체론인 관계적 주체와 연결되고 연기론은 포스트휴먼적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에 조응한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붓다의 사유는 시대를 초월하여 ‘이론적 지식의 상실과 빈곤화’라고 스티글러가 지칭한 21세기 초반의 디지털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과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불교의 연기설은 근대의 제1 과학법칙이라 할 인과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에 가깝다. 붓다가 깨달았다고 하는 법이 바로 이 연기법이다. 이른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과 조건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이 함께 작용하여 성립한다는 것”이다. 연기법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우리는 자아를 중심에 놓고 주체라 생각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지프 캠벨이 말하는 “팽창된 자아(inflated ego)”나 에드워드 사이드의 “과도하게 찬양된 자아”로 인해 사물이나 사건의 연기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자아중심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은 휴머니즘적 자아중심적 주체를 거부한다. 영웅이나 뛰어난 개인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거나 아니면 신적인 불가항력이라든가 이런 걸 거부한다. 콘텐츠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다양체로 구성된 관계적 주체”이다. 우리가 웹에 접속해서 무언가를 탐색하거나 생산하게 되면, 즉각적으로 어떤 무한한(!) 연결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 연결의 망상 조직에서 급기야 우리를 먹어버린다. 시몽동은 이를 ‘연합환경’이라고 부르는데 붓다가 말한 연기론의 그물망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붓다의 연기론에는 따라서 자아나 주체가 없다. 비유하자면 ‘세 개의 갈대가 맨땅에 서려고 할 때 서로 의지해야 설 수 있는 것과 같이’ 홀로 독립된 자아는 없다. 무아론이다. 남자가 자신을 남자라고 고집 피울 자아는 없다.
포스트휴먼 주체도 이와 다르지 않다. 브라이도티 역시 “‘나’(I)라는 종합의 권력은 문법적 필연성이요 …… 파편들의 모음을 함께 붙잡아주는 이론적 허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복수의 주체성이 “산 경험의 상이한 층들을 요청”한다는 브라이도티의 말 역시 붓다의 무아설에 다름 아니다. 그럼 이 무아설, 혹은 복수의 주체성이 지닌 실천적 의미는 무엇일까? 포스트휴먼 시대에 새롭게 정초하는 포스트 불교와 섹슈얼리티의 긍정의 윤리학을 살펴보자.
5. 포스트 불교와 섹슈얼리티, 긍정의 윤리학
붓다는 태어나면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잃었다. 자신을 길러준 노령의 이모 마하파자파티의 출가조차 허락하려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제자 아난다가 요청하자 마지못해 허락했다. 붓다가 사회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남녀 섹슈얼리티의 평등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천적으로 부정적이었음은 왜 그럴까? 쉴레인이 보기에 붓다의 삶은 “근본적으로 ‘분만 충격’―어머니의 상실―을 겪은 한 개인의 전형적인 삶”에 들어맞는다. “영혼의 핵심을 침식해 들어가는 불치의 슬픔을 가진 남자만이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 아버지와 아들을 두고 …… 과도한 자기 학대의 삶”에 뛰어들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이러한 충격과 트라우마는 생명의 탄생 자체를 기쁨이 아니라 두카(苦)로 보고, 그 탄생으로 인해 윤회의 업보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사성제의 집(集)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갈애, 그 갈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을 정욕이라 했다. 이리하여 원론적 평등원리와 달리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붓다의 관념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붓다 사상의 한계이자 그 시대적 한계일 수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포스트 불교로 새롭게 가치와 지향점을 전도시킬 필요가 있다. 아힘사와 공감과 자비의 사상에도 불구하고 생로병사, 즉 생명 자체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죽음의 철학일 수 있다. 기후 위기와 생물종의 멸종, 심지어 인류의 멸종에까지 이를 수도 있는 인신세에 전환적 사유로서는 부족하다. 위에서 불쌍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비와 연민이 아니라 지구의 생태에 대해 동반자로서 적극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해탈을 막는 삼독인 탐진치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탐진치를 완전히 꺼버리면 해탈한 열반이 아니라 좀비적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갈애로서의 탐(貪)이 아니라 지혜와 진리에 대한 탐구로서의 욕망으로 탐이 필요하다. 특히 포스트휴먼 시대 자동화에 눌려 망연자실해서 ‘지식과 이론의 노하우’를 상실해가는 삶에서는 진리의 탐구가 매우 중요하다. 진(瞋)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눈을 부릅뜨고 화내는 것이 마음이나 관계에 좋지 않다 하더라도 부정과 불의, 불공정에 분노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이 진에서 사회적 유대와 연대,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나온다. 특히 치(痴)는 버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해야 할 미덕이다. 자기 이익에 그악스러운 세태에서 자기 이익에 좀 어리석을 필요가 있다. 주식시장 알고리즘과 부동산 축적에 대한 호모 이코노미쿠스적 탐욕에 대해 좀 어리석은 것이 오히려 경제의 극심한 부침에서 자유로워지고 투기 버블을 꺼버리는 열반 경제라 볼 수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포스트 불교는 자연스레 여성적 원리나 성차/섹슈얼리티의 긍정성과 조응하기 마련이다. 앞서 무아론이나 포스트휴먼 주체 이론은 관계적 주체, 따라서 차이 나는 복수의 주체성을 긍정하였다. 여성들은 관계적 삶과 복수의 주체성에 익숙하다. 아내이자 간호사, 살림꾼, 재산 일구기, 엄마, 할머니, 딸 들로 복수적 주체성을 가진다. 그건 여성들이 살아온 경험의 층위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억압 속의 자매애”라는 젠더적 관점이 아니라, “재현으로서의 여성(문화적 이마고 ‘대문자 여성’)과 경험으로서의 여성(변화의 작인들인 실제 여성들) 간의 본질적 차이”를 알아내야 한다. 그리하여 여성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형상화에 적합한 재현 형식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예술가 신디 셔만의 〈역사초상〉에서 남성적 시각에서 재현된 여성들을 전복적으로 재현하거나 인형같이 생긴 하연수가 또박또박 자신의 권리를 찾아가는 것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재현과 경험의 본질적 차이를 통합해내는 행위이다.
라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여성’이라는 기표를 버리기 전에 그 기표의 다면적 복합성”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여성의 가사노동을 예로 들어보자. 가사노동은 여성이라는 기표 자체이다. 여성억압의 대표적인 대명사이다. 그런데 이 기표를 버리기 전에 다면적 복합성을 찾아보자. 이 가사노동이 포스트휴먼 시대 해방의 서사를 쓸 수 있다. 가사노동을 순우리말로 하면 ‘살림’이다. 이 ‘살림’노동은 생명 재생 행위이자 치유와 돌봄 행위인데, 무돌봄 사회라 할 수 있는 디지털 알고리즘과 자동화에 저항하는 가장 최전선의 영역이다.
남자들의 존재 회복 역시 이 살림노동에 달려 있다. 이안소영은 “맞벌이가 아니라 맞돌봄과 맞살림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한다. 맞돌봄과 맞살림은 여성에게만 가사노동을 맡길 것이 아니라 아내와 남편을 포함하여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까지 모든 구성원이 돌봄과 살림에 대해 책임과 권리가 있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생활 무능력자에서 벗어나 활기를 되찾고 화폐에의 의존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플랫폼 경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살림의 주체가 된다. 이 과정에서 삶의 노하우, 노동의 노하우를 다시금 서서히 획득해나갈 수 있다. 그와 함께 섹슈얼리티의 노하우 역시 회복된다.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부정성은 비구와 비구니로 꾸려진 승가의 세계에서 차별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를 취하게 한다. 사실 갈수록 비구니가 많아지고 비구니의 역할도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상부나 정책 결정 과정에서 비구니는 배제된다. 비구니 스님이야말로 포스트 불교적 가치, 즉 여성적 원리와 열반 경제로 전환기적 사유와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에너지가 많은 집단이다. 선불교의 두 가지 요소, 남성적 성격을 지닌 대장부의 길과 가부장적인 계보주의에 익숙한 종단에 비위계적이고 수평적이며 대중과 함께하는 가볍고 명랑한 불교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적격이라 생각한다.
스티글러는 자동화로 인한 풍요로 이루어진 노동의 종말과 그로 인해 해방된 시간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노동을 재발명할 수 있는 문화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한다. 자동화의 무돌봄 사회를 탈자동화의 돌봄과 살림의 행위로 뚫고 나갈 수 있는 주체는 역사적으로 폄훼 받았던 성차/섹슈얼리티의 긍정성에서 나온다. 탈자동화는 사람이나 자연을 직접 돌보는 것이고 치료하는 것이라고 볼 때 그건 여성적 원리와 가치가 사회체제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하는, 즉 가치의 전도가 일어나야 함을 의미한다.
여성 주체의 긍정성이 담보되기 위해서는 자동화 사회의 과실이 공정하게 분배되고 부의 불평등이 해소되어야 한다. 고용을 통한 일자리로 이루어지는 재분배가 아니다. 남에게 고용되던 노동은 끝났다.44) 스티글러는 수분경제를 언급한다. 수분이란 벌이 꿀을 모아오는 행위이다. 한 마리의 벌이 모아오는 꿀은 미미하지만 거대한 꿀통을 만들어낸다. 수억 명의 사람들이 날마다 검색하는 구글, 네이버 들이 바로 수분경제이다. 그러므로 기여분을 기본소득으로 분배해야 한다. 노동에서 일정 해방된 남녀들이 손수 텃밭 가꾸고 공동축사 꾸리고 뜨개질하고 술 빚고 밥 짓는 사회, 할머니 할아버지와 손주들은 서로 돌보고 작은 마을들이 올망졸망한 그런 탈자동화된 사회는 삶 자체가 예술이고 혁명이다.
여성들의 성차/섹슈얼리티는 ‘노동과 삶, 이론적 지식과 섹슈얼리티의 노하우’를 되찾고 기쁨 속에서, 간헐성의 여신으로 긍정 윤리학의 바탕이 될 것이다. ■
저자: 김봉률
출처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52) 2022.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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