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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언해와 한글보급에 공헌한 여성불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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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4-03-07 11:39 조회6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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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불경언해와 한글보급에 공헌한 여성불자들

 

1. 머리말

 

고려시대 여성 불자들은 남성이 구축해 놓은 신앙 시스템하에서 각자의 신앙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남성 출가자들은 승과를 통하여 세속의 과거시험과 유사한 승급 시스템을 따라 승관(僧官)을 받았고, 불교 정책의 많은 부분이 이들에 의해 디자인되고 관리 · 유지되었다. 조선에 들어오자 사회는 급변했고, 독실한 불자 여성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신앙생활에 사회적 제약이 증가하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에 특히 왕실 여성을 중심으로 불교를 지켜내고자 하는 사명감을 느끼는 이들이 생겨났고, 이들의 행동이 조선 전기 불교의 흐름에 상당한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조선 전기 왕실 중심의 불자 여성들은 여러 가지 불사 중 사경과 불서 간행에 가장 집중했던 것 같다. 물론 이들의 사경이나 불서 보급의 동기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불경에 신비로운 위력이 있다는 막연한 믿음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조선에서 불교가 다시 힘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재 불사가 중요하고 인재를 배양하기 위해서 불서의 간행과 보급이 절실하다는 공심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 짐작 된다. 이들의 이러한 마음은 유신들이 불교를 배척하면 할수록 더욱 강화되었고, 마침 훈민정음 창제와 더불어 일부 여성들이 언해 본 불서를 읽게 되고 일부가 언해사업에 참여하면서 더욱 성숙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조선 전기를 세종과 세조가 불교의 보호막 이 되어 주었던 시기와 이후 보호막이 사라진 시기로 양분하여 불자 여성들의 불경언해와 불서 간행, 한글 보급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세종과 세조의 불경언해가 불자 여성에게 끼친 영향

 

세종은 만년으로 갈수록 불교에 우호적이었고, 역경 사업을 통하여 한문에 익숙하지 못했던 여성 불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한 편 세조는 많은 불경을 언해하면서 작업에 여성을 참여시켰다. 세종과 세조의 불경언해 사업을 계기로 불자 여성들은 사회의식을 키워 나갔으며 한글 보급에 기여하였다.

 

1) 세종 대: 언해본 독자로서 불자 여성

 

조선초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취한 왕들조차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깊이 신봉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종은 만년으로 갈수록 유신들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사를 적극 도왔다. 특히 소헌왕후가 세종 28년인 1446년에 사망하면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세종은 왕자들이 어머니 소헌왕후의 정토왕생을 위해 사경을 하겠다고 하자 허락했다. 비록 승정원에서 강한 반대가 있었고 집현전 학사들의 거센 반대 상소가 있었지만, 이를 일축하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감독하게 했다. 세종은 불경 사경이 끝나자 대자암(大慈庵)에 법석을 마련하고 여러 왕자를 보내어 승려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일주일 동안이나 전경회(轉經會)를 갖도록 하였다(《세종실록》 권 111, 세종 28년 3월 을미, 5월 갑오 기록 참조). 

 

또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정리한 《석보상절》의 번역과 편찬에 착수하도록 지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불경언해이자 최초의 금속활자본 불서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책을 읽고 세종은 장편의 찬불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급기야 세종 31년인 1499년에는 내불당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는데, 이 과정에서 사리가 출현하는 이적이 발생하여 신미대사의 동생 김수온에게 이를 기록으로 남기게 했다. 이렇게 쓰인 김수온의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와 그 이전인 세종 29년 1447년 에 제작된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은 특별히 초조갑인자라 는 금속활자를 주조하여 간행되었다. 이처럼 한글이 만들어지고, 이제 막 만들어진 한글을 이용하여 불경을 그것도 아름다운 금속활자로 찍어내는 일련의 사건들은 적어도 이들 불서를 향유할 수 있던 불자 여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서막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세종은 아름다운 가사와 악곡을 직접 만들어 종교음악 공연을 하게 하니 장안의 불자 여성들에게는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이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비록 김수온의 《사리영응기》에 당시 불상 봉안식에 참석한 261명의 이름 중에 여성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지만, 그날 행사에 여성이 단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믿기는 어렵다.

 

당시 행사를 위해 세종은 대자암 주지 신미와 신미의 동생이자 대문장가인 김수온에게 명하여 〈삼불예찬문〉을 짓게 하는 한편, 자 신도 친히 〈앙홍자지곡(仰鴻慈之曲)〉 〈발대원지곡(發大願之曲)〉〈융선도지곡(隆善道之曲)〉 〈묘인연지곡(妙因緣之曲)〉 〈포법운지 곡(布法雲之曲)〉 〈연감로지곡(演甘露之曲)〉 〈의정혜지곡(依定慧之曲)〉이라는 7개의 종교음악 악곡을 작곡했다. 그뿐 아니라 총 9 개의 찬불가 가사를 써서 박연 등 음악인들에게 행사에 맞추어 공 연을 하게 하면서 두 왕자에게 이를 감독하게 했다. 이때 세종이 지 은 찬불가의 제목은 각각 〈귀삼보(歸三寶)〉 〈찬법신(贊法身)〉 〈찬 보신(贊報身)〉 〈찬화신(贊化身)〉 〈찬약사(贊藥師)〉 〈찬미타(贊彌陁)〉 〈찬삼승(贊三乘)〉 〈찬팔부(贊八部)〉 〈희명자(希冥資)〉라 했 으며, 그 가사가 《사리영응기》 안에 모두 실려 있다. 거듭된 반대를 무릅쓰고 내불당을 짓고 부처님을 모시는 이 장엄한 자리에 세종이 직접 만든 악곡과 직접 지은 가사로 각종 악기와 가수의 목소리가 어우러지고 멋진 무용이 선보인 장엄한 공연은 사람들을 감동시키 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세종이 지은 이 9개의 찬불가 가사 중 지면 관계상 맨 앞엣것과 맨 뒤엣것을 살펴보자.

김수온의 글에는 비구승 52명, 대군 6명, 일반 관리 203명 도합 261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제1번째 노래 〈歸三寶〉

 

항상 시방계에 머무시니,

가없는 수승한 공덕이시라.

크나큰 자비희사의 마음으로,

널리 중생을 이익 되게 하시네.

지극한 마음으로 예를 다해 귀의하오니,

저의 전도된 업장을 녹여주소서.

 

제9번째 노래 〈希冥資〉

 

가신 혼령 아득히 쫓기 어려워,

아! [사무치는] 정 끝없어라.

삼보의 대자비의 힘으로,

모두 다 해탈할 수 있나니,

오직 바라오니 슬픔 거두시고,

속히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소서.

 

비록 세종이 지은 곡조는 전해오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가사만 큼은 깊고 거룩한 마음을 느끼게 하니, 오늘날 찬불가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명자(冥資)’에서 ‘명(冥)’은 죽은 사람을, ‘자(資)’ 는 재물을 뜻하니 ‘명자’는 곧 죽은 사람을 위해 태워주는 지전이나 기타 유품을 의미한다 하겠다. 즉 이 노래는 지전 등을 태우며 혼령을 달래어 깨달음의 성취를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김수온은 당시 자리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면서, 자신도 그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 문장의 끝자락에 시를 지어 붙였다.

 

이처럼 불교에 우호적인 세종의 일련의 조치는 그의 집권 기간 대부분을 불교에 억압적인 정책을 펴던 뒤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더욱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며, 불심을 키우는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의 이러한 우호적 조치는 조선의 불자 여성들이 불교의 길을 개척하는 참여자로 나아가게까지 만들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것은 단지 고려 시대 불자 여성들처럼 짜인 신앙 시스템 안의 신앙 행위자로서 위치를 확인시켜 준 것에 그쳤던 것이 아닐까 한다.

 

2) 세조 대: 언해본 간행의 공동 작업자로서의 불자여성

 

세조가 간경사업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 중에는 자신의 맏아들 의경세자를 1457년(세조 3)에 잃은 사건이 있었다. 조선 전기 문신 이승소(李承召, 1422~1484)의 문집 《삼탄집(三灘集)》에 실린 〈의 경세자묘지(懿敬世子墓誌)〉에 따르면 세자는 9월에 사망했고 동년 10월 단종도 영월에서 죽음을 맞았다. 세조와 중전은 자식이 아비의 업을 받아 대신 죽었다는 죄책감이 끊임없이 엄습해 왔던 것 같다. 그래서 부부는 아버지 세종과 어머니 소헌왕후, 아들 의경세자를 천도하여 업을 맑히고 싶어 했다.

 

이 일을 계기로 세조는 반대하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적극적으로 불경언해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언해 작업 과정에 20대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하루아침에 세자빈의 위치를 잃게 된 가엾은 큰며느리 정 빈 한씨(貞嬪韓氏, 1437~1504, 훗날 수빈 한씨, 소혜왕후, 인수대비가 모두 동일 인물을 지칭)도 참가시켰다. 수빈 한씨는 문자를 아는 여성이었기에 마침 그녀를 포함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 이다.

 

불경언해본을 출간할 경우 주요 독자층은 한문을 모르거나 한문을 알아도 원활하게 불경 책을 읽을 수준이 못 되는 여성들일 것이므로 세조는 이 사업에 정빈 한씨 외에 다른 지식인 여성들도 참여 시켰다. 물론 언해 사업에 구체적으로 어떤 여성들이 참여했고 어 떤 역할을 맡았는지에 대해 모든 언해본 발문에 관련 내용이 적히지는 않았지만, 현재까지 두 가지 사례, 즉 《능엄경언해》와 《금강경언해》 발문에 언급된 사례가 있다. 먼저, 세조 8년(1462)에 10권 10책으로 간행한 동국대학교 소장본 《능엄경언해》의 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세조가 구결을 달아서 신미 대사께 맡기면 정빈 한씨 등이 소리내어 읽어가면서 교정을 보고 한계희와 전 상주목사 김수온이 이를 번역하고 의정부 검상 박건과 호군 윤필상, 세자문학 노사신과 이조좌랑 정효상이 서로 검토하고 영순군 부가 예(例)를 정하고, 사섬시 조변안과 감찰 조지가 동국정운음으로 한자음을 달았다. 혜각존자 신미대사와 입선 사지, 학열, 학조 스님이 번역을 바르게 한 후에 왕이 보시고 확정하시면 전언 조두대가 어전에서 번역문을 읽었다. 따라서 번역 과정에서 세조가 구결을 달고 신미 대사에게 확인을 거친 원고를 정빈 한씨를 중심으로 한 여성들의 손에 넘겨 ‘창준(唱準)’ 즉 직접 소리 내어 읽어 자연스러운지 여부를 검토하여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교정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정빈 한씨는 21세에 남편을 잃고 세자빈의 자리에서 물러난 청상과부였다. 원문에서 “정 빈 한씨 등이 창준(唱準)”했다는 것으로 볼 때 ‘창준’한 사람은 정빈 한씨 외에도 다른 여성들이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구결을 확정한 후에는 한계희와 김수온이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고 다른 신하들이 확인하고 동국정운에 의거하여 정음을 표기하고 완성된 번역문을 신미 대사 등 여러 비구들의 검토를 거쳐 세조가 확정을 지었다. 그 후에 궁녀 전언(典言) 조두대가 임금 앞에서 번역문 전체 를 낭독해 내려갔다. 조두대는 광평대군 집의 여종이었다가 세조 때 궁에서 여러 왕실여성을 모셨으며, 한글 필체가 워낙 좋아서 그녀의 필체가 궁체의 원조라고 알려진 인물이다. 학문을 좋아했던 광평대군이 생존했을 때 교육을 받았던 탓인지 한자와 범어에도 뛰어난 여성이었다.

 

한편 《금강경언해》 발문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등장한다.

 

주상께서 친히 구결(口訣)을 달으셨다. 정빈한씨(貞嬪韓氏)가 어전에서 [구결을 받아] 쓰고, 사당(社堂) 혜경(惠瓊), 도연(道然), 계연(戒淵), 신지(信志), 도성(道成), 각주(覺珠), 숙의 박씨(淑儀朴氏)가 구결을 쓰면서 소리 내어 읽어가면서 교정[唱準]을 보았다. 영순군(永順君) 부(溥)가 [중간에서 원고를] 전달하여 내주고 받아가는 일을 하였다. 공경히 구결에 의거하여 번역을 했다. 효령대군과 승려 해초(海超) 등이 다시 검토하고 예조참의 조변안(曺變安)이 동국정운에 따라 쓰고 공조판서 김수온과 이조참판 강희맹, 승정원 도승지 노사신은 교열을 보고 의정부사인 박건, 공조정랑 최호, 행인순부 판관 조지, 행사정 안유는 문제가 있는지 살피고, 주부 김계창은 여러 불경을 참고하고, 전언 조두대, 행동 판내시부사 안충언, 호군 장말동, 하운경이 사알(司謁)을 맡고, 이원랑, 오명산은 알자(謁者)를 맡고 장 종손, 안철정, 행사용 홍중산, 정효상, 김용수, 최순동, 김태수, 정수만은 급사를 맡고, 김효지, 이지서는 번역을 하고 행 사용(司勇) 장치 손, 김금음동, 승공교위 박성림, 진계종, 김효민, 이치화, 최순의, 양수, 허맹손, 윤철산, 김선은 소리내어 읽어가며 교정을 맡아 5일씩 한 작업이 완성되면 간경도감에 경판을 새기어 인쇄하여 배포하라 명하 여……

 

위의 내용을 통해서 《금강경언해》의 구결 작업에 시아버지 세조와 맏며느리 정빈 한씨가 함께 어전에서 공동작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세조가 입으로 구결을 붙여 소리내어 읽으면 정빈 한씨는 이를 받아 적어 검토해 본 후 그 원고를 다시 사당 혜경(惠瓊), 도연 (道然), 계연(戒淵), 신지(信志), 도성(道成), 각주(覺珠) 등 6명과 숙의 박씨(淑儀朴氏) 등 총 7명의 여성의 손에 넘어가서 다시 구결을 적어넣고 소리 내어 읽어 교정을 보았던 것이다. 이들 여성은 모두 한문과 훈민정음에 정통한 여성들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조두대는 작업 과정에서 알자(謁者)라는 직책을 맡아 임금과 왕실 여성들 사이의 중요한 사항을 전달하고 보고하는 역할 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조의 불경언해 사업에 여성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당시 범어와 한문에 대한 이해력과 훈민정음 활용 능력을 갖춘 여성들이 적지 않게 존재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불경언해에 참여한 여성들이 있었다고는 하나 위에서 보다시피 그것은 어디까지나 ‘돕는’ 정도의 수준이었지, 여성이 자체적으로 문장을 작성하거나 전체 사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조 사후가 되면서 여성불자들은 더욱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3. 성종 대와 연산군 초기: 언해본 간행의 주도적 역할 담당

 

세조의 시대가 막을 내리자 불교도서 간행을 주도할 역량을 지닌 대체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불자 여성들은 왕실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불경언해 사업을 이끌었고, 이 과정은 마침내 여성이 스스로 책을 쓰고 출간하고 새 활자 조성의 주체가 되어 수준 높고 세련된 도서의 간행을 이끌었다.

 

1) 《내훈(內訓)》: 여성이 만든 한문과 정음이 병렬된 최초 도서

 

《내훈》의 저자는 소혜왕후 한씨이다. 소혜왕후는 바로 《능엄경 언해》 발문과 《금강경언해》 발문을 통해 불경언해 작업에 참여했다고 알려진 세조의 맏며느리 정빈 한씨이다. 수빈 한씨, 소혜왕후, 인수대비로도 불렸음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이 책의 앞에는 저자 소혜왕후가 쓴 〈내훈서(內訓序)〉가 나오고, 이어서 목록과 본문, 마지막으로 책의 맨 끝에는 상의 조씨(尙儀曺氏)의 발문이 있다. ‘상의’는 궁녀의 직급의 하나로 내명부 정5품 벼슬에 해당하며 주로 왕실 여성의 의전이나 거처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상의는 왕실 핵심 여성의 삶의 깊숙한 부분을 담당하는 자리라 하겠다. 상의 조씨는 곧 조두대를 가리키며, 앞서 알아본 대로 소혜왕후와 함께 조두대가 《능엄경언해》 발문과 《금강경언해》 발문에 등장하는, 불경언해 작업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즉 《내훈》은 불경언해 작업에서 가장 핵심적 역할을 했던 여성 인물 두 사람이 주도하여 나온 책 이다. 소혜왕후는 책을 저술했고 조두대는 발문을 쓴 것이다.

 

이는 그동안 불경언해 작업을 왕과 대표적 남성 출가승 및 관료들이 주도하고, 발문을 김수온과 같은 당대의 저명한 남성 문장가이자 불교 거사가 쓴 것과 대조적이다. 그동안 불경언해 작업에 주도적으로 동참하고 작업 역사를 기록하여 남기는 일은 모두 남성이 그 중심에 있었고, 이것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굳어져서 불경언해와 유 가경전 언해에서 모두 그 방식을 따랐다. 즉 종합해 볼 때 세조 때까지 도서 언해 작업에 여성이 조연으로라도 참여하기는 했지만, 여성이 주도해서 책을 쓰거나 간행을 주도하거나 발문을 쓰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훈》은 남성들이 했던 내용을 모두 여성에 의해서 하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내훈》의 내용적 가치를 현대사회의 관점에서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우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서 이 책이 나온 의의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때까지 불경 언해 작업에 참여하면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여성이 여성의 힘으로 도서 간행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한 역사적 사건이다. 오늘날 《내훈》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상당수는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내훈》을 평가하지만, 필자는 한문과 훈민정음을 활용한 글쓰기 능력에 먼저 관심을 두고 싶다.

 

우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여성들 가운데 문자를 알아 서적을 읽을 줄 알았던 사례가 있다는 것은 들어본 바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까지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낸 여성, 그것도 한문과 정음을 동시에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책을 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서문에서 저자 소혜왕후가 《내훈》이 중국의 《열녀전》 《소학》 《여교(女敎)》 《명감(明鑑)》을 뽑아서 책을 만들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이 책은 그보다 더 많은 책을 인용하고 있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가 하나하나 내용을 대조해 본 것은 아니지만 다른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이 책에서 나오는 소재는 《논어》 《맹자》와 같은 책은 기본이고 《서경》 《시경》 《예기》 등 과 같은 유교 서적 중에서도 상당한 전문 분야의 책들까지 망라하여 인용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설사 백번 양보하여 이 책이 100% 창작이 아닌 좋은 문구를 뽑은 데에서 출발한 책이라고 치자. 물론 이 또한 하나하나 대조해 보면 원문을 어느 정도로 차용했는지 밝혀질 일이지만 최소한 〈서문〉은 소혜왕후의 창작이다.

 

그런데 한문과 정음의 두 서문의 작문 수준을 꼼꼼히 살펴본다면 과연 이 글의 수준이 당시 남성 명문장가들보다 떨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한문 문장 읽기에 일가견이 있는 여러 학자에게 이 글의 문장 수준 을 직접 평가해 보기를 제안하는 바이다. 필자가 보기에 글의 수준 은 다른 남성 문장가들과 비교할 때 조금도 손색이 없다.

 

사실 언어의 활용에서 말하기와 읽기, 쓰기는 그 영역에 따라서 각각 다른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세 영역 가운데 가장 난이도 가 높은 것이 쓰기 영역이다. 심지어 모국어 화자라고 해도 모국어 로 글쓰기를 잘하려면 각고의 노력과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한다. 전통시대 여성들 가운데 지식인 여성들의 학문은 대부분 ‘읽기’ 단 계에서 그쳤다. 왜냐하면 간단한 편지글 외에는 쓰기 능력이 필요 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훈》의 서문은 논지 전개가 일목요연하고 사용한 한자의 어휘 수준도 매우 높은 편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 책을 쓰는 데에 남성이 도움을 주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두대는 한문과 정음 두 가지로 적은 발문에서 이 책이 순수하게 소혜왕후가 쓴 책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長樂之餘에 患女婦之無知하샤 孜孜訓誨하시나 然이나 㤠女와 女敎와 明鑑와 小學等書ㅣ 卷帙이 浩繁하야 初學이 炳焉일새, 親自睿斷하샤 撮其切要하야 捴成七章하샤 名曰 內訓이라 하시고 繼以諺譯하샤 使之易曉하샤 雖至愚騃라도 一覽에 了然하야 以便習誦케하시 니라. 臣이 竊觀歷代賢妃호니 勤事舅姑하야 以盡仁孝之德하고 嚴於敎子하야 以成國家之慶者ㅣ 多而躬撰訓書하야 垂誡者는 鮮矣니 是書之作이 奚啻仁粹殿下之敎玉葉耶리오.

 

한편 조두대가 쓴 위의 발문에서 조두대 또한 수준 높은 문장 실력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문 문장을 보면 조두대는 ‘孜孜’ ‘訓誨’ ‘愚騃’ ‘竊觀’ ‘垂誡’ ‘奚啻……耶’ 등 상당히 전문적 어휘를 적절히 활용해서 문장을 지었다. 이 정도의 문장을 지으려면 한문 고전 문장을 많이 읽고 외워서 이를 자신의 문장에서 활용하기까지 매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야 한다. 또한 조두대는 글쓰기의 구조적 전략을 구사하면서 먼저 인수대비가 어떤 사람인지를 시부모와 있었던 구체적 사례를 통해서 설명하고(위의 인용문 앞에 나오는데, 지면상 여기는 싣지 않았다.) 이 책을 어떤 목적으로 냈는지, 또 누가 읽었으면 하는지에 대해서 논리정연하게 밝히고 있다. 실로 구성, 어휘, 문법 어느 하나 손색이 없는 문장이라 하겠으며, 전 체 체제와 형식은 세종과 세조대에 구축한 언해의 틀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본문에서 어려운 어휘나 설명이 필요한 어휘에 대해서는 해당 문장 다음에 작은 글씨로 설명을 붙여서 이해를 돕고 있다. 이 는 앞의 세조 대에 남성들이 작업했던 방식보다 더 실용적이다. 이를테면 세조가 구결을 달고 여러 학자가 참가하여 번역작업을 하고 신미 대사와 효령대군이 발문을 써서 세조 8년(1462) 간행한 《선종 영가집언해(禪宗永嘉集諺解)》는 서문과 본문에 이어 〈석음(釋音)〉이 나오고 마지막에 발문이 나온다.

 

이 가운데 〈석음〉은 벽자(僻字) 34개의 음과 뜻을 간략히 해설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미 정음이 나온 이상 한자의 음을 정음으로 써 주면 끝날 일을 굳이 반절(半切: 한자 두 글자로 글자의 발음을 표시하는 중국에서 시작된 음 표기법. 앞 글자는 초성을 뒷 글자는 중 성과 종성음을 표시)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내훈》에서는 그런 불편을 아예 만들지 않고 사람들이 어려워할 만한 글자라 판단되면 모두 한자를 노출하고, 한자의 우리말 발음을 한자 밑에 작은 글씨로 적어주니 읽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고 편집상 번잡함이 없어 보기에 편하다. 이처럼 《내훈》은 불서 번역에 참가했던 여성들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보다 실용적이고 현실음에 더 가까운 음을 적어 넣어 활용도를 높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2) 불서 간행만을 목적으로 제작된 인경활자(印經活字)

 

대비들은 불경을 후세에도 지속적으로 찍어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내탕금을 써서 목활자(木活字)를 만들었는데, 이를 ‘인경자(印經字)’라 한다. 간경도감이 폐지된 지 오래고, 조정 대신들의 집요하고 신랄한 공격으로 더 이상 국가의 공적인 금속활자를 쓸 수 없게 되자 소요되는 비용도 줄이고 굳이 유신들의 입에 덜 오르도록 하기 위해 목활자를 만들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대비들은 한자 목활자를 만들어 그 활자로 연산군 2년에 《천지명 양수륙잡문》의 한문판을 간행하고, 한글 목활자를 만들어 국문과 한문의 두 가지 활자를 사용하여 연산군 2년인 1496년 국역판 《육보법보단경》 상중하와 《진언권공(眞言勸供)》을 보급했다. 인경자는 워낙 정성들여 만들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금속활자로 여겨질 정도로 자획이 균일하고 자체가 단정하며 솜씨가 정교하다. 또한 이 국역본에서부터 동국정운식 주음을 버리고 당시의 음을 반영한 책을 만들었다. 다만 이 글자체가 누구의 글씨에서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깊은 불심을 가진 어떤 여성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여성들이 불서 간행을 주도하면서 또 한 가지 달라진 점은 디자인이 점점 세련되어졌다는 점과 체제를 보다 통일되고 간결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앞서 세조는 불경언해 작업을 하면 사업에 참여한 여러 신료에게 발문을 쓰게 해서 도서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기 때문에 불서 끝부분에 여러 사람의 발문이 번잡하게 실려 있고, 내용적으로도 지나치게 국왕을 찬탄하는 미사여구를 동원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대비들이 주도한 불서는 간단히 한 사람에 의해 발문을 적게 하되 국왕과 왕실의 안녕을 바라는 발원 내용 외에 누구의 명으로 만들었다는 것만 통일되게 나와 있다. 이들은 유생들의 많은 상소와 근거 없는 나쁜 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실용적이면서 우아한 불서를 간행함으로써 오늘날 이들이 간행한 언해본 불서들이 한국의 우수한 유산으로 남았다.

 

또 성종 16년(1485), 인수대비의 명으로 판각된 《 불정심다라니경》은 한문 부분과 정음 부분을 나누어 수록할 때, 한문 부분에는 매 페이지의 윗부분에 아름다운 도상을, 아랫부분에는 글자를 넣었다. 정음 부분은 을해 소자와 한글 활자를 혼용하여 찍었다. 권 앞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배치하고 권말에는 신장상으로 마무리하였다. 이렇게 수록한 도상들이 정교함의 극치를 이루어 가히 판화 미술의 백미라 할만하다. 이런 점 또한 여성이 불경언해의 간행을 주도하면서 한 권의 불서가 정보제공의 차원을 넘어 예술성과 종교적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도록 이끌었다.

 

결론

 

조선 전기 불교계가 당면한 문제 가운데 가장 큰 문제의 하나는 인재난이었다. 고려시대 불교계는 국가적으로 큰 후원을 받았고 승과제도를 통하여 새로운 인재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었으며, 백성들의 불교 신앙은 이들에 의해 설계되고 진행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모두 남성들이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고려시대 불자 여성들은 오히려 수동적이었고 개인적 신앙생활 을 중심으로 살았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접어들자 이러한 신앙 활동의 시스템이 급격히 붕괴하기 시작하였고, 위기를 느낀 중앙의 여성들이 먼저 주도적으로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것을 여성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통 시대 한국 역사에서 여성들이 공심에 의해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례가 아닐까 한다. 물론 이는 왕실의 상층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일이므로 한국 사회 전반을 대표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한글 창제와 세종의 비 소헌왕후의 죽음, 세조 맏아들의 죽음 등 과 같은 일련의 왕실 가족의 죽음의 문제와 직면하면서 조선에서 훈민정음의 보급은 불서 간행이라는 배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21세에 청상과부가 된 세조의 맏며느리 정빈 한씨와 역시 학문적 소양을 갖춘 궁녀 조두대 등이 불서 한글 번역작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제 여성은 단순히 불서 간행의 후원자가 아니라 주도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특히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세종과 세조가 죽고, 또 이 두 국왕으로부터 존경 받았으며, 언해 작업에 깊이 관여했던 신미와 학열, 신미의 속가 동생이자 독실한 불교도였던 김수온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이들 왕실의 불자 여성들은 더욱 사명감을 갖고 불서 간행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선대에 미처 번역하지 못했던 불서들을 번역하고 불서 인출을 위한 전용 활자를 제작하고 보다 세련되고 미학적이며, 경건한 느낌이 들도록 아름답게 디자인한 불서를 간행하였다. 또한 불서언해본 간행에 참여한 경험을 교훈 삼아 《내훈》을 집필 · 간행하여 ‘독자’에 그치지 않고 ‘작가’로서의 여성상을 마련하였다.

 

이에 불경의 보급이라는 차원에서는 물론 한글의 보급이라는 측면에서, 또 지식의 소비자가 아닌 지식의 창출자라는 측면에서 조 선 전기 지식인 불자 여성은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공헌에 대해서는 단순히 종교계를 넘어 사회적 측면에서 재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전영숙 lanzhi@naver.com

연세대 중어중문학 박사. 순천향대학교 초빙교수, 대만사범대학 조교수, 불교여성 개발원 불교여성연구소 소장 역임. 주요 논문으로 〈 조선 초 불경언해와 불자여성 의 참여〉 〈대만불교성장의 숨은 동력〉 〈대만 불교계의 대륙 불교 부흥을 위한 전 략과 노력-통일 대비 북한 불교의 재건을 위하여〉 〈중국불교는 어떻게 단련되었 는가?〉 등이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

 

출처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제95호 202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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