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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불교의 승려는 ‘성직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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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1-12-29 15:05 조회1,7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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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불교의 승려는 ‘성직자’인가

 

1. 머리말

‘불교의 승려는 성직자인가?’라는 질문은 출가자의 정체성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불교의 승려를 수행자로 보느냐 성직자로 보느냐에 따라 그 신분과 사회적 역할이 달라진다. 불교 교재에서조차 “불교에서 출가자는 수행자이면서 동시에 사제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되어 있다. 불교의 출가자는 비록 사제는 아니지만 사제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승려들은 대부분 자신이 수행자이면서 성직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붓다시대의 사문과 바라문의 관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문과 바라문의 관계는 지금의 불교와 힌두교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불교와 힌두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것을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불교의 승려가 수행자인가 아니면 성직자인가를 밝히고자 함에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먼저 사문과 바라문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그런 다음 ‘붓다의 아들’ 혹은 ‘석가족의 아들’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붓다뿟따와 사캬뿟띠야의 참뜻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상좌불교에서는 출가자를 수행자로 인식하고 있는 데 반해 대승불교에서는 출가자를 수행자이면서 성직자로 인식하고 있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는 출가자가 사문의 신분에서 바라문의 신분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주된 원인을 여기서 찾아보고자 한다.

 

2. 사문과 바라문의 기원과 의미

붓다시대의 종교사상계는 크게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정통파인 바라문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신흥 사상가 그룹인 사문 계통이다. 두 그룹을 통틀어 ‘samaṇabrāhmaṇa(沙門 · 婆羅門)’라고 부른다. ‘samaṇabrāhmaṇa’는 samaṇa(사문)와 brāhmaṇa(바라문)의 합성어다. 사마나는 종종 브라흐마나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붓다시대의 바라문들은 베다(Veda)의 성전을 신봉하고 제사를 지내는 직업적인 성직자, 즉 사제(司祭)였다. 반면 바라문을 제외한 사문들은 베다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유로운 시기에 출가하여 유행(遊行) 생활을 하면서 진리를 추구했던 수행자였다. 따라서 붓다시대의 바라문들은 성직자(priest)에 해당하고, 사문들은 수행자(recluse)에 해당한다.

 

붓다시대의 바라문들은 많은 재산과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훌륭한 저택에서 아내를 거느리고 살았으며, 준마가 이끄는 수레와 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반면 사문들은 당시의 사회적인 관습을 모두 포기하고 집을 떠나 유행자 혹은 편력자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1) 사문의 기원과 의미

상가(saṅgha, 僧伽)의 구성원인 비구 · 비구니를 다른 말로 ‘사문(沙門)’이라고 부른다. 사문은 빨리어 사마나(samaṇa)를 음사한 것으로, 산스끄리뜨어로는 슈라마나(śramaṇa)라고 한다. 사마나와 슈라마나는 동사 어근 슈람(śram)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다. 영어로는 wanderer(유행자), recluse(수행자), religieux(修士) 등으로 번역된다. 《법구경(Dhammapada)》에 “모든 악행을 이겼기에 그를 ‘사문’이라고 부른다.”고 되어 있다.

 

슈라마나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하다’ 또는 ‘금욕 생활을 이행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슈라마나는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깨달음을 향해 성실하게 실천하는 승려들에게 적용되었다. 슈라마나의 전통은 ‘빠리브라자까(parivrājaka, 遊行者)’에서 비롯되었다. 붓다시대의 유행자는 옷을 입는 유행자와 옷을 입지 않는 유행자가 있었는데, 옷을 입지 않는 유행자를 나체 수행자(裸行者, 裸形外道, acelaka)라고 불렀다. 인도에서 언제부터 이러한 유행자들이 출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사문은 당시 바라문 사상에 맞서 새로운 우주 · 인생관을 제시하면서 자유로운 사상 활동을 실천했던 사람들이다. 이 새로운 사상가들을 ‘사문’이라고 불렀다. 붓다 역시 이와 같은 사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전통에 의해서 지금도 불교의 승려들을 ‘사문’이라고 부른다. 장아함의 《대본경》에 묘사된 사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사문이란 모든 은혜와 사랑을 끊고 집을 떠나 도를 닦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감각 기관을 잘 제어하여 바깥 욕망에 물들지 않고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어떤 생명도 해치지 않습니다. 괴로움을 당해도 슬퍼하지 않고 즐거움을 만나도 기뻐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잘 참는 것이 마치 대지(大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문이라 합니다. … 출가자란 마음을 길들여 항복 받아서 영원히 번뇌를 여의고자 하며, 자비심으로 모든 생물을 사랑하여 침노하거나 해치지 않고, 마음을 비워 고요하게 하며 편안함 속에서 오로지 수행에만 힘쓰는 사람입니다.

 

위 인용문은 과거 비바시 부처님(毘婆尸佛, Vipassi)이 태자 시절에 만난 어떤 사문과의 대화 내용이지만, 이것은 붓다 자신이 태자 시절에 처음으로 목격한 사문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붓다가 모델로 삼았던 이상적인 수행자상이다. 또한 잡아함 권9 《제245경》에서 붓다는 “눈으로 분별하는 빛깔로서, 사랑할 만하고 생각할 만하며 즐거워할 만하고 집착할 만한 것이 있더라도, 비구가 그것을 보고 나서 그런 줄 알고 기뻐하면서도 찬탄하지 않고 굳이 즐거워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처럼 수행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은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의 제자들 중에는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붓다는 “만일 그가 계를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하며, 그에게 탐욕과 시기심이 가득하다면, 어찌 그를 사문이라 부르겠는가?”라고 꾸짖었다. 단지 머리를 깎았다고 해서 비구가 아니다. 모든 삿된 생각을 깨끗이 제거하고 악행을 제거한 사람이 진정한 비구이다. 이와 같이 초기경전에 묘사된 사문은 오직 수행에만 전념하는 구도자의 모습이다.

 

 

2) 바라문의 기원과 의미

브라흐마나(brāhmaṇa, 婆羅門)는 브라흐마(brahma, 梵天)에서 유래된 남성명사다. 이 단어는 바라문 계급의 사람, 바라문, 성직자, 사제 등으로 번역된다. 또한 이 단어는 청정한 삶을 사는 사람, 즉 범행자(梵行者)를 일컫는 불교 술어로 사용되었고, 종종 아라한(arahant)의 동의어로도 사용되었다. ‘brāhmaṇa’는 ‘√bṛh(to shine, to be bright)’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brāhmaṇa의 어원을 추적하면서 동사 ‘bāheti’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사악함을 없애고’ ‘모든 악을 물리치고’ ‘악한 해로운 법들을 없애고’ ‘선과 악을 모두 버리고 범행을 닦으며’ 등이다. 이러한 용례를 통해 볼 때, 바라문이라는 단어에는 악행(pāpa, pāpaka)을 ‘삼가다(to keep away), 외부를 지키다(to keep outside), 막다(to ward off)’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디가 니까야의 제27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Aggañña-sutta)》에 바라문의 기원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와셋타(Vāseṭṭha)여, 사악한 해로운 법들을 없앤다고 해서 ‘바라문(Brāhmaṇā), 바라문’이라는 단어가 첫 번째로 생겨났다. …… 와셋타여, 정려(靜慮)한다고 해서 ‘자야까(jhāyaka), 자야까’라는 두 번째 단어가 생겨났다. …… 와셋타여, 이제 정려하지 않는다고 해서 ‘앗자야까(ajjhāyaka), 앗자야까’라는 세 번째 단어가 생겨났다. 이와 같이 원래의 바라문들은 “자신을 다스리는 고행자였다. 그들은 감각적 쾌락을 떠나 자기의 참된 이익을 위해 유행했다.” 또한 “그들은 가축도 갖지 않고, 황금과 곡식도 갖지 않고, 오직 베다의 독송을 재보와 곡식으로 삼아 ‘범천의 보물(brahmaṃ nidhim)’을 지켰다.” 그러나 붓다시대의 바라문들은 자신들의 본래 의무를 잊어버리고, 오직 신에게 동물을 제물로 바쳐 제사 지내는 공희(供犧, yājana)에 종사하고 있었다. 《본생담(Jātaka)》에 의하면, 소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와 심지어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가 행해졌다. 

 

이와 같이 당시의 바라문들은 사제로서 공희를 올리는 것이 그들의 주된 의무였다. 붓다는 이러한 바라문들의 타락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바라문 가운데 공희에 종사하지 않고 오직 수행에만 전념했던 바라문들도 있었다. 붓다는 이러한 바라문들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자라고 격찬했다. 이처럼 붓다는 아라한과를 얻고자 명상에 전념했던 사람들을 진정한 바라문이라고 칭송했다. 붓다락키따가 지적했듯이, “붓다시대까지 바라문은 진짜 내적 고결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혈통과 가문이라는 수단에 의해 특권을 가진 사제로 변했다. 붓다는 자기 자신의 내적 청정과 가문의 혈통과 관계가 없는 신성을 통해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아라한과 진짜 바라문을 동일시함으로써 브라흐마나에 함축된 단어 본래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시도했다.” 실제로 아라한과 바라문을 동일시한 사례는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당시의 바라문들은 바라문 본래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오직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제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3. 붓다뿟따와 사꺄뿟띠야의 의미

원래 불교의 출가자는 사문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일부 승려들은 자신이 ‘붓다의 아들’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붓다를 ‘중생의 아버지’로 이해했던 것이다. 초기경전에 ‘붓다뿟따(Buddhaputta)’와 ‘사꺄뿟띠야(Sakyaputtiya)’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러나 이 단어들을 글자 그대로 ‘붓다의 아들’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초기경전에 나타난 붓다뿟따와 사꺄뿟띠야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1) 붓다뿟따의 의미

붓다뿟따(Buddhaputta)를 직역하면 ‘붓다의 아들’이 된다. 그러나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붓다의 제자’라는 뜻이다. 붓다닷따는 이 단어를 ‘붓다의 제자’라고 해석했다. 그가 이 단어를 ‘붓다의 제자’로 풀이한 것은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신의 아들’과 같은 개념으로 오해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만일 붓다를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구세주’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붓다의 근본 교설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잡아함 권45 《제1212경》에 “너희는 아들이 되어 내 입에서 났고, 법의 교화에서 났으며, 법의 남은 재물을 얻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바라문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상윳따 니까야에는 위에 인용한 대목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상윳따 니까야에 “그들은 붓다의 적자들이다(puttā buddhassa orasā)”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붓다의 진정한 제자라는 뜻이다.

 

2) 사꺄뿟띠야의 의미

빨리 《율장》 〈대품〉에 ‘사꺄뿟따(Sakyaputta)’라는 단어가 나온다. 최초의 다섯 비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앗사지 비구가 우빠띳사(Upatissa, 사리뿟따의 옛 이름)에게 “벗이여, 석가족 가문(Sakya-kula)의 석가족의 아들(Sakyaputta)로서 출가한 위대한 사문이 있습니다. 그분은 세존이십니다. 나는 세존에게 출가하였으며, 세존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세존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나오는 ‘사꺄뿟따(Sakyaputta)’는 ‘사꺄의 아들’, 즉 붓다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붓다는 석가족에서 출가한 성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기에는 ‘사꺄의 아들’이 붓다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붓다의 제자’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전용(轉用)되었다. 

 

디가 니까야에 “쓸모없는 인간이여, 그러고서도 그대는 사꺄무니 교단에 속하는 사문이라고 서원을 하느냐?”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사꺄뿟띠야 사마나(Sakyaputtiya samaṇa)’를 비구 보디는 “사꺄의 아들(즉 붓다)을 따르는 고행자”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곧 ‘사꺄무니 [붓다의] 교단에 속하는 사문’이라는 뜻이다. ‘Sakya-puttiya’라는 단어는 Sakya-putta(사꺄의 아들)에다 어미 ‘-iya’를 붙여서 만들어진 것으로 ‘사꺄의 아들에 속하는’이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사꺄의 아들은 삭까(Sakkā, 釋迦族) 출신의 성자인 사꺄무니 붓다(Sakyamuni Buddha)를 의미한다. 이미 초기교단에서부터 비구들은 자신들을 ‘사꺄뿟띠야 사마나(Sakyaputtiya samaṇa)’, 즉 ‘사꺄무니 붓다의 교단 소속의 사문’이라고 자칭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중국불교에서는 출가자들의 성을 모두 석(釋)씨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교 교단을 석씨문중(釋氏門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빨리 《율장》에 ‘석가족의 아들이 아니다(askyaputtiya)’라는 단어가 나온다. 특히 붓다는 바라이죄를 범한 비구를 꾸짖고 나서 “그는 진정한 사문이 되지 못하고, 석가족의 아들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이미 초기불교 교단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것이다. 빨리 《율장》에서 붓다는 “누구든지 비구가 성교에 빠지면, 그는 진정한 사문이 되지 못하며, ‘석가족의 아들’이 아니다”고 했다. 여기에 나오는 ‘석가족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말은 ‘사꺄무니 붓다의 교단 소속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른바 ‘사꺄무니 붓다의 제자가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사꺄뿟따(Sakyaputta)는 처음 붓다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였다. 그러나 점차 ‘붓다의 제자’를 지칭하는 일반 명사로 전용되었다. ‘사꺄뿟띠야(Sakyaputtiya)’라는 용어도 초기불교 교단에서 일반적으로 ‘사꺄무니 붓다의 제자’라는 의미로 통용되었다. 이 ‘사꺄뿟띠야’라는 단어를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면 ‘불교도(Buddhist)’라는 뜻이다.

 

4. 붓다의 신격화와 불교의 바라문화

 

1) 붓다의 신격화

붓다의 신격화를 한자 문화권에서는 천화(天化) 혹은 범화(梵化)라고 부른다. 붓다는 자신이 사후에 신격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붓다는 입멸 직전 아난다 존자에게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法)과 율(律)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붓다가 자신을 사후에 신격화시키지 말라는 뜻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붓다의 뜻과는 달리 초기경전을 편집할 때부터 이미 붓다는 신격화되기 시작했다. 《왁깔리 숫따(Vakkali-sutta)》에서 붓다는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고 했다. 이처럼 붓다는 형식적인 예배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후대의 ‘법신(法身, dhammakāya)’이라는 개념이 이 대목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한편 빨리 《율장》 〈대품〉에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가 깨달음을 이루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을 때, 붓다는 “그때 세간에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었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붓다 자신도 아라한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섯 아라한 속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불멸 후 붓다는 점차 신격화되어 갔다. 제일 먼저 붓다와 아라한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buddhānubuddha’의 개념이다. 이른바 ‘붓다를 따라 붓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붓다는 더욱더 신격화되었다. 비록 붓다의 육신(肉身)은 소멸하지만, 붓다의 법신(法身)은 상주(常住)한다는 이른바 ‘법신상주(法身常住)’의 불신관(佛身觀)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승불교의 불신관, 특히 《법화경》에서 강조된 ‘영원한 붓다’의 개념은 이미 초기경전인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sutta)》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불신관의 변천으로 인해 대승불교에서는 붓다를 ‘인간 붓다’가 아닌 ‘초인 붓다’로 이해하게 되었다. 라다크리슈난은 붓다의 신격화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칼루파하나는 “과거의 여러 종교 지도자들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붓다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도 온갖 형태의 신화와 전설들로 점철되어 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2) 불교의 바라문화

앞에서 언급했듯이, 붓다시대의 종교사상계는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인도 종교문화의 주류는 바라문교였고, 바라문교가 인도 문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불교가 인도의 종교사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부득이 당시의 주류였던 바라문교와 동시에 같은 사문 계통의 육사외도의 사상을 격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불교와 바라문교는 처음부터 경쟁 혹은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붓다시대에는 일시적으로나마 불교가 바라문교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경전에는 붓다가 바라문들보다는 한 수 우위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대목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특히 붓다는 많은 바라문들을 교화시켜 불교로 귀의시켰다. 붓다의 뛰어난 제자 중에는 특히 바라문 출신자들이 많았다. 이러한 사례들은 현존하는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아함 권1 제1 《대본경》에는 바라문교의 최고신인 범천왕(梵天王)이 비바시 불(毘婆尸佛)에게 법(法)을 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붓다가 바라문교의 최고 신인 범천왕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시대의 바라문들은 자기 종족에 대한 자부심과 특권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바라문들만이 최상의 계급이다. 다른 계급들은 저열하다. 바라문들만이 밝은 계급이고 다른 계급들은 어둡다. 바라문들만이 청정하고 비(非)바라문들은 그렇지 않다. 바라문들만이 범천의 아들들이고 직계 자손들이며, 입에서 태어났고 범천에서 태어났고 범천이 만들었고 범천의 상속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불교도들은 “그런 사람에게는 ‘나는 세존의 아들이요 직계 자손이요 입으로부터 태어났고 법에서 태어났고 법이 만들었고 법의 상속자이다.’라는 말이 어울린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와셋타여, 여래에게는 ‘법을 몸으로 가진 자[法身]’라거나 ‘브라흐만을 몸으로 가진 자[梵身]’라거나 ‘법의 존재[法體]’라거나 ‘최상의 존재[梵體]’라는 이런 다른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반대 논리를 펼쳤다.

 

두 경문을 비교해 보면 논리가 똑같다. 바라문들은 ‘범천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불교도들은 ‘세존의 아들’이라고 맞받아쳤다. 또한 바라문들은 ‘범천에서 태어났고 범천이 만들었고 범천의 상속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불교도들은 ‘법에서 태어났고 법이 만들었고 법의 상속자이다’라고 반박했다. 이른바 ‘범천’이라는 단어 대신 ‘법’이라는 단어를 삽입했다. 이 경에서는 왜 ‘범천’ 대신 ‘법’을 삽입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른바 “여래에게는 ‘법을 몸으로 가진 자[法身]’라거나 ‘브라흐만을 몸으로 가진 자[梵身]’라거나 ‘법의 존재[法體]’라거나 ‘브라흐만의 존재[梵體]’라는 이런 다른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이 경에 나오는 ‘법신(dhamma-kāya)’ ‘범신(brahma-kāya)’ ‘법체(dhamma-bhūta)’ ‘범체(brahma-bhūta)’는 동의어로 쓰인다. 이와 같이 초기경전에서는 ‘여래(如來) · 법(法) · 범(梵)’을 같은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붓다의 범천화(梵天化), 즉 범화(梵化)의 증거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붓다의 범화(梵化)를 막기 위해 동원된 논리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디가 니까야 제27 《기세인본경(Aggañña-sutta)》에 나오는 다음의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와셋타여, 여기서 그대들은 각자 다른 태생과 다른 이름과 다른 족성과 다른 가문에 속하는 집을 떠나 출가하였다. ‘그대들은 누구시오?’라고 질문을 받으면 그대들은 ‘우리는 사꺄무니 교단에 속하는 사문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와셋타여, 누구든 여래에 믿음을 가져 흔들리지 않고 뿌리내려 확고하고 굳세며 어떤 사문도 바라문도 신도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것을 빼앗아갈 수 없다.

 

위 인용문에 따르면, 바라문들만이 진정한 범천의 아들이요 범천의 입에서 태어났으며, 범천이 만든 것이며, 범천이 창조한 것이며, 범천의 상속자라고 주장하는 것에 주눅 들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고 당부한다. 같은 경에 “우리는 모두 진정한 세존의 아들이며, 그의 입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법을 따라 태어났으며, 법이 창조하였기 때문에 이 법의 계승자이다.”라고 설해져 있다. 불교도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진리의 수레바퀴(法輪, dhamma-cakka)’라는 단어 대신에 ‘범천의 수레바퀴(梵輪, brahmacakka)’를 굴렸다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맛지마 니까야(MN 12)에 “사리뿟따여, 여래에게는 여래의 열 가지 힘이 있는데 그 힘을 갖춘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선언하고 대중 가운데 사자후를 토하며 ‘범천의 수레바퀴[梵輪]’를 굴린다.”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이 경은 릿차비(Licchavi)족의 아들 수낙캇따(Sunakkhatta)가 승단을 떠나서 붓다를 비방하고 다녔기 때문에 붓다의 위대함을 천명하기 위해 붓다가 사리뿟따(Sāriputta)에게 설한 것이다. 이 경도 역시 바라문교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설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멸 후 바라문 부흥시대에 불교는 점차 바라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도에서 불교의 흥기(興起)는 바라문교(후대의 힌두교)라는 큰 호수에 하나의 작은 파도에 지나지 않았다. 붓다시대에는 불교가 주도권을 잡았지만, 불멸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모든 측면에서 불교는 힌두교에 기대고 합치는 쪽으로 쫓아갔다. 그리하여 불교는 점점 힌두교 속으로 흡수되어 인도에서 멸망하게 되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불교가 인도 문화를 주도하는 강력한 사상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바라문교와 불교를 비교해 볼 때, 바라문교가 강력한 세력을 가진 종교였다면 반대로 불교는 약세적(弱勢的) · 변연적(邊緣的) · 피주도적(被主導的) · 타자(他者)에 지나지 않았다. 후세의 불제자들이 불교가 바라문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약한 세력은 강한 세력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도에서 불교는 점차 바라문화 혹은 힌두교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5. 맺음말

이 글은 불교의 승려가 수행자인가 아니면 성직자인가를 밝히기 위해 사문과 바라문의 의미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이 주제는 출가자의 정체성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승려를 수행자로 보느냐 아니면 성직자로 보느냐에 따라 그 신분과 사회적 역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불교의 승려는 성직자가 아니라 수행자이다. 불교는 처음부터 사문 그룹에서 출발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붓다시대의 종교사상계는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정통파였던 바라문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신흥 사상가 그룹이었던 사문 계통이다. 전자의 바라문은 지금의 성직자(priest)에 해당하고, 사문은 수행자(recluse)에 해당한다.

붓다 역시 사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붓다의 제자들도 당연히 사문에 속한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상좌불교에서는 출가자를 수행자로 인식하고 있는 데 반해 대승불교에서는 출가자를 수행자이면서 성직자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면 대승불교에서 출가자가 사문의 신분에서 바라문의 신분으로 바뀌게 된 주된 원인은 무엇인가? 필자는 붓다의 신격화와 불교의 바라문화가 그 주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붓다는 자신이 신격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붓다의 뜻과는 달리 초기경전을 편집할 때부터 붓다는 이미 신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니까야의 주석서를 저술할 때에는 이미 ‘법신(法身)’이라는 개념도 확립되어 있었다. 결국 붓다의 신격화로 인해 나중에는 법신상주(法身常住)의 불신관(佛身觀)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편 불교와 바라문교는 처음부터 경쟁 혹은 적대 관계에 있었다. 붓다는 당시 주류였던 바라문 사상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의 주장을 불교적으로 재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바라문교의 불교화였다. 그러나 반대로 불멸 후에는 똑같은 논리로 불교가 바라문화되어 버렸다.

 

이와 같이 붓다의 신격화와 불교의 바라문화 과정을 거친 사상들이 그대로 대승 경전에 반영되었다. 이러한 대승 경전을 근거로 대승불교도들은 붓다를 신적 존재, 혹은 범천과 같은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또한 붓다의 제자들도 사문의 신분(수행자)에서 점차 바라문(성직자)의 신분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바라문들이 본래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오직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제로 변해 버린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의 한국불교 승려들도 자신이 본래 사문이었음을 잊어버리고, 바라문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

 

 

마성 / 팔리문헌연구소장.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철학석사, M.Phil).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저서로 《마음비움에 대한 사색》 《잡아함경 강의》 《동남아불교사》(공저) 등이 있으며, 5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출처: 불교평론 83호(20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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