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후 한국 불교도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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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교와젠더연구소 작성일24-05-13 14:03 조회499회 댓글0건첨부파일
- 2019년도 불교학연구회 추계 학술대회 자료집_김성연.pdf (4.8M) 0회 다운로드 DATE : 2024-05-13 14: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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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한국 불교도의 정체성
김성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목 차>
Ⅰ. 머리말
Ⅱ. 민족 개념의 인식과 조선불교의 위상 정립
Ⅲ. 자주적 종단 건설의 지향
Ⅳ. 맺음말
Ⅰ. 머리말
3・1운동은 민족의 주체성과 독립의 당위성을 환기시킴과 동시에, 식민지기 독립운동의 양상을 질적・양적으로 크게 바꾼 중요한 사건이었다. 국권을 빼앗기고 10년 만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이 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그 독립정신이 계승되어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근거가 되었다. 사실 근대 한국 민족의식의 성장 기반은 바로 3・1운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계 또한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적 자각과 주체의식을 고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주지하듯이 민족대표 33인은 종교계 대표들로 구성되었고, 불교계는 한용운과 백용성이 참여했다.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중앙학림 학생들은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 운동을 이끌고, 이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국내외에서 활동을 이어갔다.1) 한국 근대불교의 성격을 ‘민족불교’로 보는 입장은 이와 같이 불교계 인물들이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2) 여기서 항일운동은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례와 함께, 대체로 1910년대 초반의 임제종운동이나 1920년대 이후로 소리 높여 주장했던 사찰령 철폐와 같은 자주적 성격의 운동까지 포함하고 있다.3) 이들은 어쩌면 교단 자체의 개혁이나 자주성을 주장한 사례로서 항일운동의 관점과는 거리감이 있지만, 조선불교의 일본화에 반대했던 운동이라는 점에서 민족운동의 관점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민족불교라는 용어가 단지 불교의 역사가 깊고, 문화적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용되었다고 보기도 하며4), 교단 차원의 조직적인 항일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불교가 민족주의 형성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고 보기도 한다.5) 사실 ‘민족불교’, 즉 불교가 ‘민족종교’인가에 대한 것은 말의 개념규정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불교를 민족종교로 보는 관점은 서구 기독교 세력에 대응한 우리 민족의(혹은 우리화 된) 종교라는 의미와, 식민지 통치에 대항한다는 차원에서 일본 혹은 일본의 종교를 타자화 할 수 있는 조선의 종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도 오래전에 한반도에 유입된 외래종교라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종교라고 한다면 오히려 대종교를 비롯한 근대의 신종교들을 거론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일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는 불교를 민족종교라기보다는 단순히 전통종교로 바라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불교라는 성격은 한용운, 백용성 등의 활약과 불교청년들의 독립운동과 자주성을 감안하면 분명 유효한 면이 존재한다. 물론 앞으로 그 개념에 대한 보다 면밀한 고민과 성격규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종교는 많은 문화요소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사회통합적 기능을 행사하는 요소이다. 그래서 서구 국민국가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6) 3・1운동에서 민족대표들은 모두 종교인이었고, 그들은 민중을 통합했으며, 그 영향으로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결국 식민지기 민족운동의 역사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은 간과할 수 없다. 이 글은 그런 차원에서 3・1운동 이후 불교인들의 민족인식과 조선문화에 대한 자의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특수성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와 보편성에 기반을 둔 종교가 현실적으로 어떤 영향 관계 속에서 논의되고 있으며, 당시 불교가 근대종교이자 민족종교로서 지니고자 했던 정체성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출처. 2019년 불교학연구회 추계 학술대회
[제3발표 3·1운동 이후 한국 불교도의 정체성] 53p ~ 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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