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산악신앙, 한·중·일·대만은 왜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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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4-08-06 11:59 조회266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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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산악신앙, 한·중·일·대만은 왜 다를까
지리산, 옥산, 후지산, 태산(사진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 순으로) Summary Of Article 출처: N트레블도쿄, 박정원 #박정원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하늘의 신은 아버지, 산의 신은 어머니라고 동서양 공통적으로 알려져 있다. 한민족 단군신화도, 그리스신화도, 중국 신화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지구 역사가 시작된 이래 아버지의 나라 하늘을 향해 제천 의례를 지내며 예의를 갖췄다. 이것이 제천행사이다. 아버지와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산에서 그 제천행사를 지냈다. 그게 산악신앙의 요체이자 핵심이다. 제천행사와 산악신앙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산악신앙은 원래 다신(多神)이다.
하늘의 아버지 신과 함께 천둥·번개·태풍 등 모든 자연현상에도 정령(精 靈) 내지는 신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산악신앙이 동아시아, 특히 한·중·일·대만에 어떤 형태로 나타났고, 전승되어 왔는지, 현재 어떤 형태의 신이 좌정해 있는지 한 번 살펴보자. 산의 신을 알고 여행하면 아는 만큼 더 보이고,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중략)
한국 지리산의 산악신앙 지리산은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명산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 후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한반도 오악 중 남악으로 지정한 이래 <삼 국사기>부터 명산으로 언급되지 않은 역사서가 없을 정도로 자주 등 장한다. 일부 풍수전문가들은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의 안(앞)산이 백두산이고, 백두산의 안산이 지리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악에 대한 제사는 기본적으로 나라의 평안과 발전을 비는 행사였 다.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호국신앙의 반영으로 국가 주도의 산신제 를 지냈다. 산신제는 지방 호족세력을 진압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 려는 목적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응집시킬 수 있는 산신제의 강력한 대상이 필요했다. 남악 지리산에 등장하는 산 신은 성모천왕, 마고할미, 선도산신모 등으로 여성성을 띤다. 초기 원 시사회의 모계사회 영향으로 여성성을 띤 것으로 추정한다. 성모천 왕과 선도산신모는 중국계 산신의 변형으로 알려져 있다. 마고할미는 토착 지리산 산신의 전형으로 파악된다. 원래 마고할미는 세계를 잇다, 미래를 빚다! 해남·강진 등 주로 해안 도서지방에서 전승되고 있는 지역 전설의나로 전하는 거인신화의 대표적 사례다. 강진의 달마산에 가면 마고할 신앙으로 볼 수 있다.
국가주도형 혹은 관 주도형 산신제, 즉 공식적 미 산신에 관한 안내문이 있다. 제주도의 설문대 할망, 서해안의 개양 할미, 강원도의 서구할미, 경상도 동부해안의 안가닥할미 등이 창조신 화에 해당하는 여성거인신화이다. 중국 오악도 여성거인신화가 나타 난다. 지리산 마고할미는 천왕봉 성모천왕의 변형된 형태이다. 성모천 왕은 마고할미, 노고(老姑)로도 불리며, 이후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로 변신한다. 이 같은 내용은 <삼국유사>나 근대 들어서 이능화의 <조선무속고>, 권태효의 <한국의 거인설화>에 그대로 소개된다. 성모천왕신앙은 통일신라기에 남악 지리산에 영향을 미쳤고,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왕건은 성모천왕을 그 의 어머니 위숙왕후와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과 동격으로 삼 아 지리산 산신으로 좌정시킨다.
왕권을 절대 권력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산신을 이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산악신앙을 지배이데올로기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마고’를 한민족의 조상이자 최초의 국가로 주 장한다. 한민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가 ‘마고지나(麻姑之那)’라고 한 다. 마고지나는 ‘마고의 나라’라는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1만 2,000 여 년 전에 건국했다고 한다. 진위 여부를 떠나 마고할미는 지리산 산 신의 원형으로 봐도 무리 없을 것 같다. 마고할미라는 명칭의 흔적은 노고단(老姑壇)에서 찾을 수 있다. 지리산 산신의 근원은 천신이었지만 여성신인 마고할미, 성모천왕과 혼인을 한 남성신 반야 혹은 법우화상 등을 거치면서 신라 이후부터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와 마야부인 등으로 다양해진다.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산신에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는 유교가 국교로 지정됐지만 전통적 가치인 산악신앙은 여 전히 서민들에게 강하게 남아 있었다. 왕조에서는 남악제례를 유교 식으로 바꿨다.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방식으로 산신제 위패도 정했 다. 지리산의 경우 지리산지신(智異山之神) 또는 지리산대대천왕(智 異山大大天王)이라고 썼다. 지리산은 지금도 구례에서 ‘남악제례’를 유교식으로 지내고 있다. 다 른 지역은 사찰 내에서 불교식 또는 무속식 산신제를 지내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다. 2005년 남악제에 전국의 유림 대표가 참여하기 도 했다. (중략)
결론
산악신앙은 실로 모든 민족들의 근저에 남아 있는 신앙이다. 선사 이래 모든 민족이 제천행사를 지냈고, 그 장소는 여전히 세계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서구는 유일신으로 산악신앙 또는 다신이 사라진 듯하지만 고대 유적지를 보면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다신의 영향은 자연환경과 더불어 그 지역에 사는 민족성에까지 영향을 미쳤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세계 50여 개국을 여행하면서 그 지역 거주자들이 전통 산악신앙을 잘 간직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아, 이 민족에게 산악신앙의 영향이 그대로 미쳤구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산악신앙과 민족성의 상관관계에 대한 부분은 앞으로 연구대상이다.
그런데 ‘산악신앙은 왜 종교로 발전하지 못했을까’ 하는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종교는 개인적 믿음을 바탕으로 가족, 나아가 공동체 커뮤니티를 형성해서 집단지성을 구성한 뒤 대중화할 수 있는 이론적, 논리적 근거를 갖춰 집단 믿음을 확산하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산악신앙은 마을 단위 커뮤니티까지 형성했으나 이론적, 논리적 기반을 마련할 집단지성을 구성하지 못했다는 점이 종교로 발전하지 못한 결정적 한계로 작용하지 않았나 판단한다. 제정일치사회에서는 강력한 파워를 발휘했으나 신정분리 이후엔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지 못하고 왕권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더 이상 종교로 발전하지 못하는 한계도 드러낸다. 이로 인해 결국 민간신앙 또는 토속신앙의 형태로 명맥만 유지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본다. 또한 불교나 도교, 유교 등에 습합되면서 종교로 발전할 기회를 잃어버린 측면도 있다. 결국 하위문화가 상위문화에 흡수된 결과이다.
출처: 박정원(아시아 브리프 2024년 8월 5일, 4권 22호 (통권 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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