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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동학사상에 끼친 불교의 영향 / 조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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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4-12-13 10:35 조회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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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동학사상에 끼친 불교의 영향 / 조극훈

 

1. 동학(東學)과 시대정신

올해는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탄생 200년이 되는 해이다. 동학(1860)은 동학농민혁명(1894)을 비롯해, 갑진개화운동(1904), 3 · 1운동(1919)을 주도하면서 민중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한편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의 혼으로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 동학의 정신은 4 · 19 혁명과 5 · 18 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는 시대정신이라고 할 만큼 그 파장은 크다. 특히 2019년 처음 정읍 황토현 승전기념일인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여 국가적 위상을 갖추게 되었고, 2023년에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세계사적 지평을 넓혔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의 명칭과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해야 한다는 주장과 입법 청원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동학이 역사의 질곡과 도전을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혼과 세계사적 위상을 갖추게 된 것은 유교, 불교, 도교 등 삼교를 통합하여 한국 사상의 원형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삼교를 지양하여 민족적 상황에 맞게 통합한 것이었다. 그중에서 불교는 동학사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인 조지훈(1920~1968)은 한국적 고유사상의 원형적 특징을 잘 표현한 사상으로 동학을 꼽았다. 한국 사상은 민주주의와 인본주의가 투영된 단군 신앙에서 시작하여 불교에서 호국적이며 민족적인 종교로 발전하였고 동학에서 근대적으로 계승하면서 그 계보가 형성되었다. 단군 신앙-원효 사상-수운 사상에는 그 시대적 역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절충과 융합, 수용과 환원”이라는 우리 민족 고유사상의 문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원효(元曉, 617~686)의 화쟁사상(和諍思想),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정혜쌍수 사상(定慧雙修 思想), 청허휴정(休靜, 1520~1604)의 선교융섭 사상(禪敎融攝 思想), 그리고 수운 최제우의 동학사상(東學思想)은 민족 사상의 문법이 드러난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조지훈은 최제우의 동학사상 형성에 미친 불교의 영향 원인으로 인문지리적 특성을 강조하였다. 최제우는 국선 화랑 이래 고유 종교의 유속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경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사상에는 선도와 무교, 검술, 풍수 도참 등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원효와 고운 최치원은 동향의 선배로서 그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뿐만 아니라 동학 지도자들의 수행 과정에서도 불교적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학자 이이화(1937~2020) 또한 한국 사상사에서 유교, 불교, 도교의 전래를 소개하면서 고운 최치원의 3교 합일 사상이 우리의 민족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하고, 풍류도(風流徒)는 유교의 충효, 불교의 중생제도, 선교의 무위이화를 합일시켜 접화군생(接化群生)한다”는 유불선 합일 사상은 동학에까지 이어졌다. 동학이 유불선 합일을 표방한 것은 광범위한 계층을 동학으로 끌어들이는 사상적 방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동학 발생 당시 불교의 영향이 큰데, 그 근거로 최제우 사후 최시형과 서장옥이 각각 법포(法布)와 서포(徐布)를 형성하여 활동하였는데, 서포인 서장옥이 불승(佛僧)이었고, 서장옥의 주장으로 동학 의식 제정에 불교의식을 받아들였다는 점, 1892년 손화중이 선운사 도솔암의 비기를 꺼낼 때 승려들의 도움을 받았고, 금구의 원평 집회에서 불갑사의 인원(仁原), 선운사의 우엽(愚葉), 백양사의 수연(水演) 등 승려들의 참여가 있었다는 점, 동학의 백오염주는 불교의 백팔염주를 본뜬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였다. 

대부분의 동학 지도자는 절이나 암자에서 승려들의 도움으로 49일 기도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포덕 활동과 교단을 체계화할 수 있었으며,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불연기연(不然其然), 자천자각(自天自覺) 등 동학 경전에 나타난 중요 개념과 이론에 불교적 색채가 강하게 배어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동학사상 형성에 끼친 불교의 영향에 관한 연구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고운 최치원, 원효에서 내려오는 한국 사상사의 전통에 관한 것이다. 둘째, 동학의 창도 및 동학 지도자들의 종교체험 방법과 장소와의 관련성에 관한 것이다. 셋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나타난 개념과 사상과 불교와의 유사성에 관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연구사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동학사상에 미친 불교의 영향을 외적, 내적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2. 동학의 창도와 ‘오심즉여심’

동학은 1860년 4월 5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에 의해 창도되었다. 그의 개인사는 불행했다. 아버지 최옥은 영남 유학의 학풍을 갖춘 유학자로 아들에게 유학적인 지식과 소양을 물려주었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어머니 한씨 부인은 재가녀로 재가녀의 자녀는 과거(문과)에 응시할 수 없다는 당시의 규정(경국대전)으로 그는 출세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상황에서 그는 여러 곳을 방황하면서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과 관리의 수탈과 외세의 침략 등을 목격하게 되었다. 민중의 삶을 개선하고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출세의 길이 아니라 영적 깨달음의 길을 선택했다. 울산 여시바위골 〈을묘천서(乙卯天書)〉 체험과 양산 천성산 적멸굴 49일 기도 이후, 경주 용담정에서 득도하였다.

그의 첫 일성은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吾心卽汝心)”였다. 상제, 천주, 귀신으로 표현되는 신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다르지 않으니, 무극대도(無極大道)의 깨달음을 잘 닦아 21자 주문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법을 바로 세워 덕을 펴면 인간과 세상이 두루 빛날 것이라는 것이다.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으되,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 수심정기하고는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대답하시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너는 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 《동경대전》 〈논학문〉

동학을 창도하게 된 배경으로는 불안과 좌절을 극복하고 영적 구원을 찾고자 한 인간의 실존적 고뇌뿐만 아니라 양반과 관리들의 수탈과 외세의 침략을 막고자 하는 반봉건 반외세라는 시대정신 그리고 적서와 반상의 차별로부터 벗어나는 인간 평등주의를 들 수 있다. 

동학(東學)은 서학, 즉 천주교 명칭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사용된 것이지만 그 의미는 서학과 반대쪽에서 발생한 학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민족적인 자주 의미에서 여기 그리고 지금의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학이라는 의미가 크다. ‘한울을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를 통해서 하늘과 땅과 인간이 모두 평등한 존재라고 하는 동양의 전통적인 우주관을 종합하고 있다. 그래서 최제우는 동학의 유래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내가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특히 서도와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데, 서학은 실지가 없고 이치가 없다고 비판하였다. 동학은 무위이화의 법으로 마음을 닦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서학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 순서가 없으며, 천주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제 몸만 위할 뿐이며, 몸에는 기화지신(氣化之神)이 없고 천주의 가르침이 없다고 하였다(《동경대전》 〈논학문〉).

동학은 1대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에서 출발하여, 2대 해월 최시형의 양천주(養天主)를 거쳐 3대 의암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으로 발전하였고, 4대 춘암 박인호에 의해 민족문화운동으로 계승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도 동학사상에 그 뿌리를 두었다.

최제우에 이어 2대 교주가 된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 1898)은 동학에 대한 관의 탄압이 심해지자 강원도 오지 등으로 도피 생활을 하면서도 동학을 부흥시키는 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강원도 인제에서 《동경대전》을 편찬하였고 도피 생활 중에서도 어디를 가든 짚신을 삼는 등 쉬지 않고 일한다고 하여 “일하는 한울님” 또는 “최보따리”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한울을 키운다’고 하는 그의 양천주 사상은 시천주 사상을 사회 현실로 더욱 확장한 것으로 ‘사람 대하기를 한울 대하듯 하라’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낳게 되었다.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 1861~1922)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근대적 면모를 갖춘 종교로 정착시켰고 더 나아가 3 · 1운동으로 계승하였다. 춘암(春菴) 박인호( 朴寅浩, 1855~1940)는 근대 신문화 시기에 동학을 교육문화운동으로 전개하면서 근대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특히 동학은 189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사발통문, 우금치 전투, 포접제, 집강소, 기포령 등이 상징하듯이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민중적이며 가장 종교적이며 가장 민주적이며 인간적인 혁명으로 프랑스 혁명과 비견될 정도로 높이 평가되었으며,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은 자주, 민주, 평화와 같은 근대적인 이념으로 재해석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동학사상은 오심즉여심이라는 무극대도의 깨달음을 얻는 종교적 성격뿐만 아니라 이를 민족과 민중 운동으로 구체화한 사회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동학의 경전으로는 동학 창도의 배경과 21자 주문 풀이 등 동학사상의 핵심이 들어 있는 《동경대전》을 비롯하여 가사체로 된 《용담유사》가 있으며, 해월 최시형의 가르침인 《해월신사법설》과 의암 손병희의 가르침인 《의암성사 법설》이 있다. 수운 최제우가 종교체험을 통해 한울로부터 받은 것으로 주문 공부만 열심히 하면 누구나 무극대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이론이면서 수행 주문이다. 

주문은 강령주문 8자와 본주문 13자로 이루어졌다. 

강령주문: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지극한 기운 지금 여기 크게 내리소서.

본주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한울님 모시니 마음이 정해지고 영원토록 잊지 않으니 만사가 깨쳐지네.

‐― 《동경대전》 〈수덕문〉



21자 주문은 현송과 묵송의 방법으로 수행 공부의 초석이 되었다. 강령주문은 허령한 우주의 지극한 기운을 내 안에 내려주기를 비는 주문이고, 본주문은 내 안에 강령된 한울님을 지극히 모셔 조화를 이루어 영원토록 잊지 않고 모든 것을 알게 하라는 주문이다. 해월 최시형은 21자 주문을 풀이하여 “주문 삼칠자는 대우주, 대정신, 대생명을 그려낸 천서이니, ‘시천주 조화정’은 만물 화생의 근본이요, ‘영세불망 만사지’는 사람이 먹고사는 녹의 원천이니라.”(《해월신사법설》 〈영부주문〉)고 하였다. 

주문은 인간과 우주의 존재 법칙이며 삶의 바탕이 되는 동학의 종지이다. 이 주문을 외우면 우주의 기운과 나의 기운이 합치되는 경험을 함으로써 강령을 체험하고 누구나 한울님이 될 수 있다고 한다. 21자 주문은 동학을 하는 핵심 방법이요 동학의 원리이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수많은 농민군이 외웠던 것이며, 천도교에서도 오관종규 중의 하나로 수시로 주문 기도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주문 기도에 의해 마음이 안정되고 도의 이치를 깨치고 질병을 치유하는 효과를 본다고 한다.



3. 동학 지도자들의 득도 과정과 불교와의 관계

1) 최제우의 을묘천서와 49일 적멸굴 기도

앞서 언급했듯이 최제우는 을묘천서 후 양산 천성산 내원암과 적멸굴에서 49일 기도를 마치고 경주 용담정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현곡면에 있는 용담정은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의 성지로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천성산 적멸굴에서 수행은 교조 최제우뿐만 아니라 손병희 그리고 소춘 김기전 등 동학과 천도교 관련 주요 인물들이 수행했던 곳이어서 불교와의 인연을 짐작하게 한다. 천성산은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온 천 명의 대중들에게 《화엄경》을 강론한 곳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불교적인 영지이며 성산이다.

최제우는 처가인 울산에서 을묘천서라는 최초의 종교체험을 하였다. 을묘천서란 1855년 3월, 꿈속에서 금강산 유점사로부터 온 승려로부터 한 권의 책을 전해 받게 된 것을 말한다. 을묘천서 체험은 불교에 대한 수운의 잠재의식의 표현으로 19세기의 불교가 수운과 같은 재가녀의 자식으로 재주는 있어도 시험에 나갈 수 없는 불우한 신분이었던 최제우 같은 사람들이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민중불교적 성격을 보여준다. 또한 숭유억불 정책으로 19세기 중엽 쇠락한 처지에 놓여 있던 불교와 역시 소외된 최제우와의 친화 관계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아울러 민중들의 의식 속에는 여전히 불교가 위상을 갖추고 있었기에 이 체험을 계기로 불교 친화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기도하라는 내용으로 된 을묘천서 체험 후 기도의 방향은 향외적 구도 중심에서 향내적 구도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1856년 천성산 통도사 적멸굴에서 49일 기도는 향후 동학의 주요 수련 방법으로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는 불교식 49일 기도 방식에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최시형이 38년간의 포덕 과정에서 제자들을 지도하는 방식 중의 하나는 49일 기도였다. 1909년 말 손병희 또한 내원암에서 임명수, 최준모, 김상규, 조기간과 함께 49일간 독공 수련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소파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 운동을 주도하고 남녀평등 운동을 펼쳤던 소춘(小春) 김기전(金起田, 1894~?)은 적멸굴에서 49일간의 기도 후 소감을 작성하였는데, 천지인(天地人)에 대한 느낌과 처절한 고절감(孤節感)에서 대자비심이 분발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1860년 4월 5일 득도 후 1861년 12월 최제우는 《동경대전》 〈논학문〉을 비롯한 동학의 핵심 내용을 저술하였는데, 그곳이 남원 은적암이었다. 이곳에서 스님들과 생활하면서 동학의 학문과 논리를 체계화했다는 것은 동학 교리 형성에 불교의 영향을 추론할 수 있게 한다.

2) 최시형의 포덕 활동과 불교 

최시형은 1863년 8월 최제우로부터 동학의 도통을 전수받는 과정에서 동학이 유, 불, 도의 삼교 합일 사상 체계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1864년 3월 최제우가 체포되어 처형당하자 수배자의 처지가 되었는데, 1898년까지 계속되었다. 태백산에서 49일 기도를 올렸다는 태백산공 기도 장소는 갈래산 정암사 적조암이었다. 영해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 약화된 교세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강원 지역 동학 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수련 후 최시형은 그 소감을 남겼는데, 속세에서 벗어나 적멸의 궁전에 들어섰다는 내용으로 그 의미와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태백 산중에서 행한 사십구일 기도 덕분에

봉황 여덟 마리를 얻어 각각의 주인을 정하였고

천의봉 꼭대기에는 흰눈꽃이 온 누리에 피었으니

오늘에야 비로소 옥을 갈아 오현금을 타는도다.

적멸(寂滅)의 궁전에 들어가 진세(塵世)를 벗어났으니

뜻있게 마쳤도다 사십구일의 기도여!


태백산공은 당시 철수좌라 불리는 주지 스님의 호의 덕분에 성공했다. 적조암 기도는 당대 민중의 정신적 의지처와 귀의처로서 기능하고 있었던 불교 공간과 당시 승려들의 민중 지향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884년 6월에 전라도 지방 동학 포교 활동을 위해서 은거했던 곳이 익산의 미륵산 사자암이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공주 마곡사의 부속 암자인 가섭암에 머물면서 장차 동학 지도자가 될 손병희, 박인호, 송보여 등과 함께 49일 기도를 하면서 강서(降書)를 받고 동학교단의 조직을 체계화하였다. 6번의 강서를 받았는데 그중에서 동학 탄압에 대비하기 위하여 주문 중에서 천주라는 말을 뺄 것과 육임제 창설은 동학 조직의 체계화를 위한 획기적인 조처였다. 그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교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한울님을 정성 들여 모시도록 하라.

둘째, 역사에는 성쇠의 이치가 있으므로 기우는 때가 있으면 반드시 드러나는 때도 있는 법이라. 동학의 도인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눈앞의 어려움을 극복해 가면, 우리 도가 장차 크게 펼쳐지리라. 

셋째, 동학이 서학으로 오인, 지목을 받고 있으므로 주문 속에 들어 있는 천주(天主)라는 두 글자를 빼고 ‘봉천상제일편심 조화정만사지(奉天上帝一片心 造化定萬事知)’로 고쳐 외우도록 하라.

 .... 

여섯째, 동학 직제로서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 등 육임제(六任制)를 창설하라.


교조 최제우를 비롯해 그 제자들인 최시형, 손병희, 박인호 등이 49일 기도를 절에서 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동학과 불교의 친화성을 보여준다. 천성산 적멸굴, 정암사 적조암, 미륵산 사자암, 마곡사 가섭암 등에서 이루어진 기도와 수행 그리고 교리 정립 활동은 공간적 정신적 측면에서 동학사상 형성에 불교의 영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4. 동학 경전에 나타난 불교적 성격

불교는 동학의 교리와 교단 성립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교리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최제우가 종교체험 후 첫 일성인 “오심즉여심”과 “동귀일체”는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불교의 “심즉시  불(心卽是佛)”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중심으로 동학의 교리를 설명하는 부분은 《동경대전》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중에서도 의암 손병희가 쓴 《무체법경(無體法經)》은 그 구성과 내용이 불교적이어서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는 무아와 공 사상이 전편에 흐르는 논지인데, 이는 반야부의 대표 경전인 《금강경》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무체법경》은 손병희가 통도사 내원암에서 49일 기도 후 저술한 것이다. 무체성이란 생사가 없고 공적함도 없고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는 성품을 의미한데, 이는 불교의 무아와 공의 개념과 다르지 않다. 무체성의 인식과 실천의 과정으로 수행을 통하여 자리심, 이타심, 공화심, 자유심, 극락심에 이르는 자천자각의 경지를 서술한 부분도 불교의 수행법을 연상하게 한다. 

1) 존재론적 측면: 무아(無我)와 공(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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