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미술, ‘드러냄’과 ‘감춤’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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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4-12-13 11:01 조회23회 댓글0건본문
종교미술, ‘드러냄’과 ‘감춤’의 미학
1. 들어가며
시인은 절 마당에 서 있는 ‘석불’을 보고 이렇게 읊조린다.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꿈꾸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 문정희 〈돌아가는 길〉 전문
천년의 세월, 비바람에 씻기고 또 어쩌면 누군가의 손길도 스치고 닳아서 이제는 눈과 코도 보이지 않는 석불. 이제 불상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워질 만큼 형상도 스러졌다. 이승에서는 마지막 육신의 흔적도 거두고 열반을 목전에 둔 노승처럼. 어떤 인연이 얽히어 누구는 간절한 바람[誓願]을 내고 또 누구는 정성껏 돌을 쪼고 깎아서 부처의 모습을 새겼으나 이제 그 인연도 끝나고 ‘부처의 감옥’에서도 벗어나 다시 ‘본래면목(本來面目)’인 돌이 되고 있다, 그동안 중생들의 온갖 합장배례(合掌拜禮)와 원망(怨望)까지도 말없이 받아 주었던 그 자비, 그 너그러움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연꽃처럼 성스러웠다. 꽃이 피고 나면 지는 것,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돌도 무너졌다 새 인연을 맺어 먼 훗날 다시 돌로 돌아오리라.
사족(蛇足)이 길어졌다. 돌-부처님 모습-석불-돌. 하나의 물질인 돌이 형상(形相)을 갖춰 부처의 모습이었다가 형상이 스러지고 다시 돌이 되어 간다. 왜 사람들은 돌에 형상을 새기고 그 돌을 불상이라 하여 성스럽게 여기고 숭배하는 걸까. 의문이 일어난다. 《금강경》에는 널리 알려진 사구게(四句偈)가 있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을 진실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 가르침대로라면 굳이 돌에 형상을 새겨 불상이라 떠받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이것은 화두다. ‘이 뭐꼬![是甚麽]’
프랑스 철학자이자 문인으로 새로운 인문학적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는 ‘매개론’의 창시자인 레지스 드브레는 그의 매개론을 이미지에 적용해 본 첫 번째 응용서인 《이미지의 삶과 죽음(Vie et mort de l’image)》(1992)의 〈책머리에〉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술작품’은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지만, 그런 것도 쇼펜하우어가 말했던 ‘의지의 드라마’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지 효과는 주로 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가 우리를 막아서며 본래 단순한 지각 작용 이상의 힘을 보인다면 아우라, 위신, 광채 같은 그 능력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이 힘을 문제 삼고, 그 변신을 추적해보고 그 전환점을 짚어보자. 이와 같은 역사를 찾으려면 ‘미술사’는 잊어야 한다. 미술 아닌 다른 것을 재현하는 것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역사는 소란과 광증으로 가득하며, 번번이 바보들이 했던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 의미는 항상 무겁다. 미리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형상은 집단적인 눈에 다양한 영향을 준다. 또 이런 무의식은 재현술에 따라 우리의 눈에 다르게 투영된다. 따라서 이 책은 보이는 것의 보이지 않는 암호를 다룬다. (……) 따라서 우리가 보는 행위만을 전적으로 살펴보기가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우선’ 서구적인 눈이라도 알아보자. (……) 이미지 매개론은 내가 그 앞에 나설 자격이 거의 없는 수많은 길의 교차로를 어슬렁거리는 수상한 행보다. 즉 미술의 역사, 기술의 역사, 그리고 종교의 역사를 두루 둘러보는 거동이다.
글쓴이는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오래전부터 ‘이미지와 상징’을 틀을 가지고 접근하려 해왔다. 불교미술을 전공으로 삼다 보니 헬레니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나아가 종교미술 일반에 대한 비교 연구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기독교 미술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미술사에서 ‘형식’과 ‘내용’은 기초적이면서도 피해 갈 수 없는 문제이다. 여기서 기표(記標, signifiant)와 기의(記意, signifié)의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라캉(Jacqes Lacan)은 시니피앙의 우위를 나타내며,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경계선 결여가 정신병을 초래한다며 이를 정신병리학에 원용하였다. 예술에서도 작품의 감각적인 표현양식과 그 이념적 내용의 관계가 이 같은 상호 불일치를 초래할 수 있다. 한편 바르트(Roland Barthes)는 시니피앙이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미지 자체이고, 그 뒤에 숨어 있는 함축적인 의미와 내용이 시니피에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사물에 점점 이야기를 붙여서 눈사람처럼 확대되어 가는 상황을 신화(神話)라고 설명하였다.
‘불상(佛像, Buddha pratima)’과 기독교의 ‘성상(聖像, icon)’의 관계를 살펴보면, 별개의 존재인 듯하면서도 연관성이 전혀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종교미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면 이미지(image)의 표현이란 면에서는 ‘기호’로서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겠으나, 양자가 담고 있는 메시지 즉 교의(敎義, dogma)의 측면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기’ 위해 거쳐 온 과정을 보면, ‘믿음’의 차원에서 상호 간의 비교고찰을 통해 둘 모두에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2. 이미지와 종교의 탄생
1) 이미지의 탄생
아득한 그 옛날, 200만 년쯤 전에 원시인은 돌[石]을 주워 가지고 놀다 땅에 줄을 긋거나 단단한 열매껍질을 깨뜨리기도 했다. 돌이 쓰임새 노릇을 하게 됐다. 도구 즉 석기(石器)가 되었다. 손에 잡을 때나 아니면 다른 용도로 쓰다 보니 불편한 점이 있으면 몸돌을 떼어내거나 다듬기도 하였다. 이 시기를 고고학에서는 뗀석기[打製石器]를 만들어 돌날을 사용했다 하여 중석기(中石器) 시대라 하니 20만 년 전의 일이다. 그 뒤를 이어 3만 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라 부르는 시기에는 점점 작고 섬세하게 떼어낸 돌날로 만든 다양한 도구가 나타나고 도구의 재료도 다양해졌다. 돌뿐만 아니라 다양한 재료로 만든 도구가 등장했다. 이 시기를 인류학계에서는 ‘사람의 혁명’ ‘창의의 혁명’이라고도 일컫는다.
그런데 이렇게 불리게 된 것은 단지 도구의 재료가 다양해지고 많은 종류의 도구 유형이 나타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양식(style)’이라는 요소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양식’은 기능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으니 꾸밈새가 덧붙여진 것이다. 예를 들어 돌칼의 모양은 기본적으로 똑같지만, 칼자루와 칼끝 등의 모양새가 다르게 꾸며진 것이다. 단순히 쓰임새를 벗어나 만드는 사람 나름의 꾸밈새가 즉 장식적(裝飾的)인 요소가 표현된 것이다. 이는 만든 이가 자기를 나타내거나 자기가 속한 집단을 나타내기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돌로 석기를 만드는 과정과 절차이다. 석기를 만들고자 하면 먼저 먼저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요소(쓰임새나 꾸밈새, 돌의 종류 등)를 생각하고 완성품을 상상하면서 여러 돌 중 알맞은 돌을 선택해서 작업을 거쳐 드디어 석기를 완성한다. 이 모든 과정은 오늘날의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다를 바가 없다. 다시 말해 눈으로 보이지 않는 형상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손으로 작업을 마치면, 눈앞에서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완성품(석기)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도구를 만든다는 단순한 기능을 넘어서서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여기서 이미지 또는 상상력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고인류학자 아구스틴 푸엔테스(Agustín Fuentes)는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돌을 매만지고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통해 도구를 쓰는 일련의 과정은 창의적인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을 갖기 위해서 혁신적인 혁명이 필요했다. 그 혁명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정신적인 혁명이었다. 유인원에서 인간으로의 전이 과정에서 일어난 획기적인 사건은 바로 ‘예술’이다.
인류는 생존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조각, 회화, 악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즉 ‘지혜로운 인간’으로 불릴 만큼 새로운 것들을 발견해냈다.
이전까지 인류가 보여준 변화는 생존을 위해 환경에 맞게 자신을 변화하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 예를 들면 불을 채집하는 등의 소극적인 변화였다. 그러나 인류는 ‘상상’을 통해 조각, 회화, 악기 연주와 같은 ‘예술’이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발전시켰다.
‘예술’이라는 뜻의 영어 ‘아트(art)’ 혹은 라틴어 ‘아르스(ars)’는 오래된 인도-유럽어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우주의 원칙에 맞춰 연결하다’라는 뜻이다. ‘예술’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어는 ‘테크네(techne)’다. ‘테크네’는 ‘기술’로도 번역하는데, 본래 의미는 ‘연결하다’이다. 말하자면 예술이란 다른 사람은 볼 수 없고 연결할 수 없는 것을 하나로 엮는 혜안이자 실천하는 의지다. 호모 사피엔스는 예술을 고안해내고 창작한 동물이다.
그렇다면 구석기 시대 유럽의 한 동굴에서 의도적으로 제작된 물건은 예술일까 아니면 도구일까?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동굴인 프랑스 쇼베(Chauvet)와 라스코(Lascaux) 그리고 스페인의 알타미라(Altamira)에서 발견된 그림과 조각, 새김 모형들을 무엇을 근거로 예술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런데 예술의 기원은 이보다 앞서서 후기 구석기 시대의 동굴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의 전문가도 놀라워할 만큼 생동감 넘치는 동물 그림이 유럽의 석회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라스코나 알타미라, 쇼베 동굴 등에서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인도네시아 섬에서도 발견되었다.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있는 순다 열도 중 하나인 술라웨시(Sulawesi)섬의 동굴 벽화는 유럽의 벽화보다 앞선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술라웨시섬 남부 지역은 석회암 지대여서 수많은 동굴이 있는데, 이 가운데서 벽화가 발견된 곳만 40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새롭게 고고학계에 알려진 우할리에(Uhallie) 동굴의 4만 4천 년 전 벽화에는 동물뿐만 아니라 동물과 사람이 혼합된 형태인 반인반수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눈길을 끄는 것은 손 그림이다. 특히 쇼베의 동굴에서 손 그림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방에서는 붉은색 손바닥으로 마치 도장을 찍듯이 손자국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브루넬 방이라 불리는 곳에서는 볼 수 있는 손 그림은 그린 방식이 다르다. 손가락을 펼친 손바닥을 벽면에 밀착하고 입에 머금은 물감을 손의 주변을 향해 골고루 뿜으면 물감이 손 주변에만 묻는데, 손바닥을 벽에서 떼 내면 손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기법을 ‘네거티브 페인팅’이라 부른다. 이 두 방식은 마치 인장(印章)에서 음각을 새겨 흰 종이에 찍으면 백문(白文)이 드러나고, 양각으로 새기면 주문(朱文)으로 찍혀 나오는 것과 같다. 백문으로 드러나게 손 그림을 남긴 이들의 지혜로움이 놀랍다.
2) 죽음을 넘어서 : 종교의 기원
많은 사람들이 종교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궁금해한다. 그 해답은 찾기 쉽지 않다. 다만 그 실마리는 원시인들이 죽음을 목격하고 그 주검[屍身]을 매장하던 방식에서 믿음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술이 장례에서 태어나며, 죽음에 떠밀려 죽자마자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확실하다. 무덤을 존중하는 태도는 여기저기에서 조형적 상상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거물의 묘소는 우리의 첫 번째 박물관이었다.
모든 동물은 죽는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시체를 그 자리에 버려두지 않는다.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보면, 인간은 죽은 자를 위해 장례를 치러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어떻게 장례를 치렀는지를 보면 그들의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죽은 사람을 매장하도록 촉발한 것은 무엇일까? 죽은 사람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가장 놀라운 사실은 항상 일어났던 일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숨은 물질적인 신체는 아니지만 우리 안에 들어와 신체에 생명을 주는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첫걸음이다. 그리스어 프시케(psyche), 라틴어 스피리투스(spiritus)는 둘 다 ‘숨 쉬다’ 혹은 ‘불어넣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였다. 정신(sprit) 또는 영혼(soul)은 육체에 생명과 숨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동안 육체 안에 머물다가, 육체가 죽으면 떠나간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로 가는가?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 바로 저 너머의 세상, 정신의 세계, 우리가 사는 지상의 다른 편으로 갔다는 설명이다.
이제 우리는 인류의 조상이 남긴 죽음의 자취를 찾아 그 현장으로 가보자.
이스라엘 카프제(Qafze)는 기원전 10만 년 전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매장터로서 어머니와 아들의 무덤에서 주검에 붉은 황토(ochre) 칠을 한 것이 발견되었다. 또 오스트레일리아의 문고(Mungo) 매장터에서도 주검이 붉은 황토로 덮여 있었다. 이렇게 주검에 색칠하는 것은 인류가 가진 탁월한 능력 중 하나인 상징적 사유(symbolic thinking)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한다. ‘붉은 황토’로 주검에 색칠하거나 덮어주는 의미는 죽은 사람이 새로운 다른 장소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 떠난다는 믿음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예로서 흥미로운 것은 이라크 쿠르디스탄에 위치한 샤니다르(Shanidar) 동굴이다. 1950년대에 발굴이 이루어져 총 10명의 네안데르탈인 화석이 나와 유명해졌다. 무덤은 약 5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에서 낙상해 죽은 네안데르탈인의 시신 주변에는 돌을 쌓아 올린 조그만 봉분이 있었다. 이 동굴 안에는 40세 정도로 추정되는 네안데르탈인의 무덤도 있었다. 그런데 무덤 주위가 여러 종류의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시신이 꽃의 분으로 칠해져 있었다. 샤니다르 동굴 입구부터 15m 떨어진 들판에 꽃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의도적으로 동굴 밖의 꽃을 가지고 와 시신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새나 설치류 혹은 포유류의 흔적은 없었다. 학자들은 이곳에 장식된 꽃들이 국화, 마황, 백합화 화분과 줄기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인류는 이미 5만 년 전부터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을 가졌다. 네안데르탈인은 지상의 삶이 죽음을 통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계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라고 생각했다. 2019년에 재발굴이 이루어졌다. 최근의 연구 결과, 다양한 꽃가루는 동굴에 살던 동물들이 모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꽃가루를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꽃은 여러 종류로 같은 시기에 피는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그러나 조사자들은 유골이 큰 돌기둥 근처에 의도적으로 매장되었다며 이 장소가 원시인에게 아주 특별하고 중요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더 놀라운 유적이 발견되어 학계가 떠들썩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이 유적은 종교의 기원에 대한 기존의 학설에 새로운 의견이 제기될 만큼 주목을 끌고 있다. 비어 고든 차일드(Vere Gordon Childe)의 이른바 ‘신석기 혁명’ 학설에 도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유적은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라고 불린다. 괴베클리 테페는 튀르키예어로 ‘불룩한 언덕’이라는 뜻이다. 터키 남동부에 자리한 아나톨리아 지역에 있는 괴베클리 테페는 높이 15m, 지름 300m에 달하는 언덕으로 몇 개의 고고학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층은 기원전 10,000~8,000년에 형성되었다. 이 시기는 고고학적으로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 A(Pre-Pottery Neolithic)’, 말 그대로 인류가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기 전인 수렵채집 시대다. 현재 그곳에는 높이 3~6미터, 무게 40~60톤에 달하는 200개 이상의 T자 모양의 거석들이 있는데, 대략 10개의 거석이 하나의 원을 이루는 무리 원 20여 개가 발굴되었다. 두 번째 층인 대략 기원전 7,600~6,000년경 ‘토기 이전의 신석기시대 B(PPNB)’ 층에는 이전 것보다 작고 사각형 형태의 거석이 늘어서 있다.
괴베클리 테페는 인류 최초의 신전(神殿)이 있는 ‘순례지’였다고 한다. 이곳은 인류가 다가올 농업 기반의 정착 문명과 떠돌이 사냥-채집 생활의 경계에 서 있는 중요한 흔적이지만, 아직 이 유적이 지닌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3. 성상인가 우상인가
사람을 동물과 다르게 여기는 의미의 여러 단어가 있으나 ‘말하는 인간(Homo lquitur)’이란 정의가 가슴에 와닿는다.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을 할 수 있으며, 사유(思惟)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이런 구절(句節)이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느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런데 구약성서 《창세기》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구절을 보면 ‘빛’ 곧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미지의 탄생이 종교적 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미지에 대한 가장 강렬한 반대가 종교 영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이미지와 관련하여 가장 격렬한 논쟁을 벌인 종교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성서에는 이미지에 대한 최대의 긍정과 최대의 부정이 동시에 있다. 구약성서에서 이미지에 대한 최대의 긍정은 신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imago)과 모양(similitudo)으로 만들었다고 반복해서 강조하는 데에 있다(창세기 1:26~27).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선언은 인간이 곧 신상(神像)이라는 뜻이고, 인간이 거주하는 곳이 신전(神殿)이라는 의미다. 신전에 신상을 모시던 당시 고대 근동의 주변 종교들과 비교하면 이것은 대단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당시 신상은 신 자체였다.
잘 알고 있듯이 초기 불교미술의 역사를 보면,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라 하여 부처님의 형상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보리수 · 법륜(法輪) · 탑 또는 불족적(佛足跡) 등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어, 형상을 금기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증일아함 권28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일찍이 33천에 오르시어 어머니(마야부인)를 위해 설법하는 동안 지상에서는 진신(眞身)을 뵙고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을 때 우전왕은 우두전단(牛頭栴檀)이란 나무로 높이 5척의 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파사익왕(波斯匿王, Prasenajit)도 자마금으로 된 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들이 최초로 조성한 불상이라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전의 기록은 후대에 엮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림으로 그려진 부처님의 화상에 얽힌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불상의 근본은 우리 부처님 중년의 때에 중천국 병사왕(甁沙王, Bimbisāra)이 멀리 벗을 파견하여 세존의 화용(畵容)을 구했는데, 이를 정상(㡧像)의 시작을 삼았다. (협주(夾註) : 때에 화공이 불신이 내뿜는 빛에 눈이 부셔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에 부처님께서 물가에 앉으시길 청했다. 그리고 물속에 비치는 모습을 삼가 취해서 법식을 삼아 성용(聖容)을 묘사할 수가 있었다. 헌데 잔물결이 일므로 법의의 모습이 실이 늘어져 구부러진 모습을 그리게 되었다. 따라서 수사의불(水絲衣佛)이라 이름을 불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화공이 불신이 내뿜는 빛에 눈이 부셔서 바라볼 수가 없었다’는 대목과 더불어 ‘물속에 비친 모습을 삼가 취해서 성용(聖容)을 묘사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경전에는 제자들과 재가 신도들이 부처님을 뵙고 정례(頂禮)를 올리는 내용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데, 왜 화공이 부처님을 그릴 때는 눈이 부셔서 부처님의 성용(聖容)을 직접 바라볼 수 없었다고 했을까. 그리고 결국 물속에 비친 모습을 취한 것이니 참모습[眞容])이 아닌 부처님의 그림자[佛影]인 셈이다. 이것은 신학(神學)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인간의 신화(神化, divinization)가 아닐까. 결국 이는 교학적으로 불신론(佛身論)과 불타론(佛陀論)의 문제를 낳는다.
성화상에 대한 기원은 성상(聖像, eikon)인가 우상(偶像, eidol-on)인가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신앙의 대상이 존재를 이미지로 나타내는 데 대한 옹호와 배척의 두 주장이 맞서게 된다. ‘말씀’을 추종하는 개신교나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입장은 배척의 편에 선다.
그리스도교에서 성화상에 대한 공경과 파괴의 논쟁은 초대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세기 동안에는 형상에 관한 모든 상징적 이미지는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거부되어 왔다. 그러다가 2~3세기 그리스도교 묘지였던 카타콤베(Catacomb)의 벽에 그림이 그려졌다. 교회 안에서 이미지의 사용이 허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 제국에서 가톨릭이 국교가 된 후 서양의 시각예술은 결국 이미지에 대한 긍정적 성서 본문과 계명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성상파괴주의(iconoclasm)의 신학과 열정을 모두 제거할 수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미지에 우호적인 세력이 우위에 있었다. 우호적인 세력의 한편은 이미지를 교육과 목회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590~604년 재위)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미지 사용에 반대하고 파괴하는 마르세유의 주교 세레누스(Serenus)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 보냈다.
그림을 숭배하는 것과 그림의 이야기를 통해 숭배해야 할 것을 배우는 일은 서로 다릅니다. 그림은 문맹자들에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얻는 것을 줍니다. …… 이미지와 그림은 무식한 사람들의 교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를 통해 문맹자들도 그림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600년 10월의 두 번째 편지)
이미지에 우호적인 다른 한편은 이미지를 보다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들에게 이미지는 단지 교육을 위한 보조도구가 아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의 견해에 따르면 성만찬(聖晩餐) 제의(祭儀)에서 몸과 피로 선언된 빵과 포도주는 실제 예수의 ‘몸과 피’이다. 예수가 신이듯 그렇게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이다. 이것을 흔히 성변화(聖變化, transubstantiation)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에는 상징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significat)’. 이 둘은 모두 실재와 그것을 가리키는 상징적 이미지 사이의 관계에 관한 토론이었다. 이는 종교적 문제가 정치와 분리될 수 없는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어떤 이론이 옳든 예수가 만든 가장 중요한 제의는 이미지를 사용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신과 신의 이미지 인간, 그중에서도 신의 참된 이미지인 예수, 그리고 그 예수의 살과 피인 빵과 포도주, 곧 비인격적 물질 사이를 단단하고 뗄 수 없게 연결한다. 성육신과 성찬제의 제정은 그리스도교가 이미지에 매우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루가복음서》의 저자로 간주되는 ‘성 루가(Saint Luke)’는 화가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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