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라는 큰 그림에서 이해하는 여성의 경험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4-07-23 13:11 조회278회 댓글0건본문
종교라는 큰 그림에서 이해하는 여성의 경험
[양혜원의 종교 페미니즘 수업] '한국 기독교인 여성'을 둘러싸고 있는 이야기들
한국의 기독교 출판사들이 열심히 번역해서 소개한 복음주의 진영의 여러 저서를 볼 때, 복음주의 페미니즘으로 분류될 수 있는 책들의 소개도 적고 별 파급 효과도 없었다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복음주의도 남성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한국 기독교 여성들이 스스로를 임파워(empower)하는 방식은 서구 여성들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 두 가지를 같이 놓고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
한국의 기독교가 가부장적인 것은 따로 지적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가부장적 종교의 일방적인 피해자인 것도 아니다. 그렇게 여성을 일방적인 피해자로만 보는 것은 여성의 행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비서구 종교 전통 여성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가고 있는 서구 페미니즘에서도 그러한 관점을 지양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그동안 어떻게 한국 복음주의 여성들이 복음주의 담론 안에서 스스로를 임파워했고 왜 지금은 더 이상 복음주의가 여성들을 임파워하지 못한다고 보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Pathmaker세대, 여성을 말하다'[<페미니즘 시대의 그리스도인>(IVP) 86~131쪽]에서도 논의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복음주의는 전통적인 한국 기독교의 틀을 벗어나 좀 더 신세대다운 감각으로 그 당시 20~30대들을 끌어들였다. 그때의 복음주의는 전통 교회보다 확실히 여성들 숨통을 틔워 주었고, 여러 패러 처치 기관들은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하다는 의식으로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세계관 운동과 평신도 운동의 확장은 종교성과 연결되었던 한국교회 안의 위계를 어느 정도 상대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목사·장로 등 위계적 직분이 종교의 본질적인 요소로, 그리고 교회 활동만이 종교성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이해했던 데서 벗어나 평신도도 사역의 주체가 될 수 있고 교회 밖의 활동도 종교성의 연장이 될 수 있다고 보게 해 준 것이다. 여성들이 가정에서 하는 일도 사역의 이름으로 더 고귀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그냥 집에서 밥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환대를 통해 기독교의 선의를 전파할 수 있는 사역 주체들이 된 것이다.
이 당시 복음주의 여성들이 읽었던 책은 반드시 여성 저자 책이 아니어도 충분히 여성적인 언어로 쓰인 책들이었다. 물론 신학책들은 훨씬 더 추상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언어였지만, 세상에서 소금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일상에서의 영성은 중요했고 그러한 영성 책들은 여성적인 언어로 쓰인 것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헨리 나우웬의 책이다. 동성애자였지만 가톨릭 사제가 되어 독신으로 지낸 그는, 남성적이고 권위적인 언어가 아닌, 여성적이고 관계적인 언어로 상처에 대해서 그리고 연약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가 제시한 리더십 모델은 강단에서 남성 권력을 전시하는 리더가 아니라 자기 의사 표시도 제대로 못하는, 세상에서 소외된 장애인들 곁에서 개인적인 사랑의 언어로 그들과 깊은 소통을 하는 리더였다. 그는 상처 입은 치유자를 강조했고 그리스도의 길은 더 낮아지는 길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가 이성애자 남성이었다면 이런 정도의 감수성을 가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사제로서 독신 서약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특별한 경험과 통찰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기독교 안에서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또 다른 전범을 제시해 주었다. 그래서 그를 복음주의자들이 가장 사랑한 가톨릭 저자라고도 한다.
이처럼 전통 교단에서는 잘 교류하지 않는 가톨릭 저자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 또한 복음주의의 강점이다. 특별히 에큐메니컬 입장을 취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실용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복음주의는 개인 영성의 필요에 따라 가톨릭이나 성공회 저자들의 자원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한 경우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복음주의가 문화적 상관성을 가지려 하면 할수록 종교적 색채는 약해지기 때문에 종교성을 찾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가시적으로 성례 등을 통해 종교성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교파들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기도 하다.
헨리 나우웬에 이어 적극적으로 번역 소개된 유진 피터슨은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던 한국 복음주의의 흐름에 또 다른 획을 긋는다. 그가 좀 더 적극적으로 성경을 일상으로 끌어들이면서 우리가 종교적으로 믿던 성경의 언어에서도 종교성을 빼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은 이윤 문제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한국인에게 개역성경의 어투는 종교적인 언어로 고착돼 있었다. 즉 성경이 성경인 이유는 그 내용만큼이나 어투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진 피터슨이 어투는 중요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주장해 한국의 전통 교회가 기대던 종교성의 기반을 또 한 번 흔든 셈이다.
피터슨을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가 일상과 현실을 강조한 만큼 인간의 경험이나 이성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의 영역 또한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비의 세계와 일상의 세계가 별개가 아니라 이 세계 자체가 신비로 가득한 세계라고 보았다. 이처럼 신비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기 때문에 우리가 흔들 수 없다고 여기던 종교성의 영역인 성경의 어투를 그는 문제 삼을 수 있었다. 우리의 거룩은 내용을 알아먹을 수도 없는 고상하고 고풍스러운 언어가 아닌, 우리가 물고 뜯고 씨ㅂ어 삼켜서 속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 두렵고 떨림으로 조심스럽게 내뱉는 하나님 언어에 있다고 그는 본 것이다.
이러한 저작들에 힘입어 더 적극적으로 세상에 관여하면서 신앙의 영역을 넓힌 것은 복음주의가 한국교회에 기여한 바다. 그런데 피터슨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강조가 된 '현실'은 한국의 특성과 묘하게 맞물리면서 정치적 현실로 축소가 되었다. 정확히 어떤 과정을 통해 그렇게 됐는지는 연구를 해 봐야겠지만 당시 세계관 운동을 주도하던 세대를 통해 종교성을 교회 밖에서 실천할 수 있게 해 주는 지적 기반들이 이루어지자 갈수록 많은 사람이 한국의 정치적 현실과 역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것에 관여하는 것만이 종교를 '현실'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라 보게 되었다. 즉 한국 상황에서 기독교를 말하는 방법은 한국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라는 공식이 성립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정치란 정당정치와 같은 협소한 의미의 정치가 아니다. 한국의 사회적 현실을 해석하고 구성하는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담론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성의 상당 부분을 이념 싸움의 영역으로 옮겨 놓았고, 그러한 정치의 논리로 교회를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신들을 키워 준 기성 교회와도 어느 정도 대립하는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권력자와 소수자라는 구도로 교회를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페미니즘 논리와 마찬가지로 기성 교회의 타락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기에 다니는 대다수의 신도는 제대로 의식이 깨지 못한 신도들이 된다.
미국 스펠만대학의 한국인 여성 교수 김나미의 <The Gendered Politics of the Korean Protestant Right: Hegemonic Masculinity(한국 기독교 우파의 젠더 정치: 남성성의 헤게모니)>(Palgrave, Macmillan, 2016)는 전형적으로 그러한 정치적 이념 시각으로 한국의 복음주의를 분석한 책이다. 그는 엘리자베스 쉬슬러-피오렌자의 주主장제 이론을 그대로 한국 사회에 적용한다. 한국 사회에 복음주의가 전혀 기여한 바가 없는 것으로 평가하며, 복음주의 여성들의 경험과 행위성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다.
남미에서 복음주의가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인정하지만, 한국에서는 보수적 가부장제만 더 강화할 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페미니즘적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복음주의 진영에서 자라고 형성된 나로서는 그의 분석에 그야말로 '의심의 해석학'을 적용할 수밖에 없다. 남미의 경우 그들의 마초 문화 때문에 남성들이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 도박이나 외도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복음주의가 그러한 남성들을 길들여 일부일처제의 결혼 생활에 충실하게 해 주었다면, 왜 한국에서는 그러한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그는 보는 것일까. 군대 가기 전이면 으레 성매매촌을 찾아가 총각 딱지 떼는 게 관습이었고,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합법적으로 다른 여자를 취할 수 있었던 한국의 관습을 바꾸는 데에 어떻게 복음주의가 기여한 게 하나도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밖으로 도는 남자를 가정에 충실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그의 책임을 묻는 것이라면, 그러한 부부 윤리에 충실한 복음주의가 기여한 게 없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주신 대로 낳는 게 신앙인 줄 알고 성 감별 낙태도 안하고 태아 장애 검사도 안 한 복음주의 여성들은, 태아부터 남녀를 차별하고 장애인은 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기는 한국 문화에 적잖은 저항의 행위를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김나미의 연구는 서구 페미니즘 이론이라는 안경을 쓴 채로 한국의 종교 사회를 분석한 것인데, 그의 연구는 서구 페미니즘 이론에는 충실할지언정 한국 복음주의 여성의 경험을 제대로 드러내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의 목적 자체가 페미니즘 계보를 더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면에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으나 복음주의 여성들이 복된 삶을 누리는 데에는 기여하는 바가 없다.
그런데 지금 복음주의 안에서는 이러한 페미니즘 계보의 연구로 복음주의 안의 경험을 자꾸 재구성하려 하는데, 그 안경을 끼고 복음주의를 바라보면 복음주의가 답답해 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 안에 촉발된 불만을 이해하는 데에 페미니즘 이론들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인의 경험은 페미니즘 이론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잘못된 이론 틀을 가져다가 상황을 정당화하는, 학문적으로도 초보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우선 한국 기독교인 여성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세 번째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유교의 종교성을 이해해야 한다. 젠더 관계에서 한국인의 기본 문법은 유교의 젠더 질서이다. 종교 스펙트럼을 근본주의에서부터 자유주의까지로 볼 때, 근본주의에 가까울수록 젠더 질서 자체가 종교적 의미를 표상하는 것으로 여기고, 전통 남녀 관계는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근본주의적인 유교는 남녀유별의 도를 엄격하게 지키면서 서로의 영역을 넘어가지 못하게 하고, 근본주의적인 기독교는 교회나 가정이나 사회에서 남성의 리더십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
알다시피 한국 사회에 정착한 유교는 유교의 여러 갈래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유교다. 그만큼 남성들이 누리는 영역으로 넘어가고 싶어 하는 여성에 대해서도 규제가 많았다. 이러한 젠더 질서를 종교적 질서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기독교는 그 질서를 어느 정도 변형시키기는 해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한국교회의 성적 순결에 대한 집착이 그 한 예이다. 이것은 실제로 성적 순결을 지키느냐의 문제와는 별개인데, 사실 확인은 어렵지만 한때 회자되던 처녀막 재생 수술과 같은 이야기는 어쨌거나 표면적으로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처녀성을 유지하는 것이 여성들에게는 명예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문화라는 것을 뜻한다. 또한 외도에 대해서도 영어로는 사건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affair라고 부르는 것을 한국어로는 불륜, 곧 인간이 따라야 할 윤리가 아니라고 부르는 것 또한 남녀 간의 애정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서구와 한국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젠더 질서의 관습이 유교의 종교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일단 이해하면 우리가 상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따라서 전략도 그에 맞게 짤 수 있다. 종교성은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신성한 영역으로, 그 영역이 침범당하면 그것을 믿는 사람은 어떠한 식으로는 반응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단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면, 유교라는 종교에서 비롯된 문화적 관습들도 우리가 성경적이라고 해석하는 것들에 맞게 바꿔야 한다는 기본 합의가 이루어진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자유주의 기독교 페미니스트들이 유교와 기독교의 상관성을 끊으려 한 것은 일면 타당하다. 이것은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이 사용한 문화와 종교를 구분하는 전략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가부장제는 잘못된 문화이고 종교는 마땅히 그 문화와는 구분되며 그것을 수정할 힘도 가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두 번째 글에서도 설명했듯이,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의 경우와 달리 한국의 기독교 여성들에게 기독교는 자기 토양에서 발원한 종교가 아니라 서구를 경유해서 서구의 옷을 입고 들어온 종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여성들은 자신을 주체로 구성한 유교 문화의 문법을 완전히 버리고 서구의 논리를 따라갈 수가 없다. 심지어 나처럼 영미 생활을 오래하고 두 문법을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도 저변에 깔린 기본 문법은 유교 문화의 문법이다.
내 책에서도 말했지만, 나 스스로는 그렇게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미국인 친구는 내게서 유교 문화권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을 쉽게 알아봤다. 또한 미국 이민자라 하더라도 1.5세와 2세는 차이가 있는데, 1.5세들은 유교 문화의 문법을 여전히 기본 문법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을 형성한 문화와 자기 자신을 그렇게 쉽게 분리해서 볼 수 없다. 유교는 성별 분리가 엄격한 만큼 여자들끼리의 영역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권력 행사가 가능하다. 성별 분리는 여자가 남자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도 막지만 남자가 여자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것 또한 막기 때문에 소위 '내명부'에 해당하는 일은 여자들 중 우두머리가 관할할 권한이 생기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 시어머니가 가졌던 막강한 권한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기혼 여성들이 남편은 전혀 모르는 가운데 낙태든 피임이든 자신의 몸을 조절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일은 여자들이 알아서 할 여자들의 영역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구 여성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여성들의 권한이다. 목회자 사모 자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일단 담임목사의 사모가 되면 그 대우도 제법 괜찮고 권한도 제법 가진다. 근대사회로 이동하면서 이러한 성별 분리는 점차 없어졌지만, 여전히 기본 문법으로 남아서 서구 사회와는 다른 여성들만의 문화가 한국이든 일본이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일단 이것을 이해하고 난 후에 교회 문화를 보아야 하는데, 교회의 질서를 이루는 핵심으로 갈수록 유교 젠더 질서는 더 강하다. 그래서 평신도 사역자들은 남자든 여자든 동등하게 교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어도 목사와 사모는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패러 처치에서는 부부가 어느 정도 동등하게 활동을 해도 일단 남편이 목회의 길을 걸으면 여자는 사모가 된다. 내 경험으로도 그렇지만 교회는 기본적으로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목사와 사모의 자리는 다르다. 서구 사회에서 목사와 목사 아내 역할을 구분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목사와 사모는 좀 더 본질적인 역할 구분이다. 이것은 유교 문화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힘을 발휘하는 방식의 차이이기도 한데, 일단 이러한 종교적 기반이나 문화적 기반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서 여성 안수 문제도 다루어야 한다. 단순히 페미니즘 논리에 기반해서 권리 이슈로 혹은 노동 이슈로 다루면 사역이라고 하는 종교의 고유 영역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여성들이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기반도 잃게 된다.
나는 성경적으로 여성 안수가 별 문제 될 게 없다고 보는 입장이고 내가 만난 보수 교단 소속 남성 목사들도 같은 입장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것을 교회 전체 차원에서 논할 때는 사안이 좀 달라진다. 종교성과 문화를 포함하는 한 사회의 구성 문법을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법 오래전 장신대에서 만난 어느 여자 교수이자 목사님은 자신의 언니가 사모라면서, 자신은 목사이지만 사모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있다고 했다. 피터슨도 사실상 아내 잰은 자기와 공동 사역을 한 것이라 했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목사와 사모는 공동 사역자이다. 다만 서로의 성 역할이 확실히 구분돼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하지도 명명하지도 않았을 뿐이다.
따라서 한국교회 안에서 여성 리더십을 논할 때는 전통적 방식으로 리더십을 발휘해 왔던 사모들의 역할과 존재를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여성들끼리의 문화가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 리더로서 사모는 여성 교인들에 해 줄 수 있는 게 많다. 그래서 나는 여성 안수를 준다면 사모들도 동역 목사로서 마땅히 안수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사모가 감당해야 하는 많은 수고에 대한 우리 세대의 거부감은 자신들의 기여가 교회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공로를 공적으로 가시화해 사역으로 인정해 준다면 여성들의 전반적 지위 향상과 자존감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어차피 사모는 직분은 아니어도 사명감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사모를 동역 목사로 인정할 경우 적어도 두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하나는 여성이 자신의 결혼이 앞으로 무엇을 의미할지, 그리고 자신이 동참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그 소명이 자신에게 있는지 물을 수 있다. 사역은 소명 없이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소명이 있다면 마땅히 함께 안수를 받고 사역을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소명이 없다면 교회는 그에게 사역자의 역할을 요구하지 말고 그냥 목회자가 함께 사는 동반자로 여기고 그가 자신의 소명을 따라 살 자유를 주면 된다.
이렇게 되면 내가 결혼하고 싶은 대상이 목회자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 즉 사모로 사는 게 자기 사명이 아닌데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데서 오는 갈등을 많이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목회자 아내를 개별적 주체로 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물론 이 두 선택지 사이에는 다양한 타협안들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각 부부와 교회의 협상에 맡기면 된다.
전통 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전환은 여성들도 공적 공간에 참여할 기회를 열어 가는 과정이었고, 일반 사회에서 이것을 경험한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망은 타당하다. 그러나 교회라는 공간은 세상과 구분되는 종교적 공간이고 거기에서 젠더 질서는 세상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는 일단 전통적 젠더 질서를 옹호하는 것으로 단정 짓는데, 이 글에서 언급한 나우웬이나 피터슨의 리더십만 봐도 전통적 젠더 질서를 뒤집는 리더십이지 옹호하는 리더십이 아니다. 세속 남자의 남자 행세를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섬김의 리더십을 주장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말하는 종교이다. 실천이 미약하다고 해서 이 기본 정신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리더십을 여성들은 강조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기독교의 리더십을 한국교회에서 잘 구현한 사람은 남자 목사가 아니라 여자 사모라고 할 수 있다. 주변에서 충분히 안수를 받을 수 있음에도 받지 않는 여성 사역자들에게서 나는 여자 목사가 구현해야 하는 리더십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았다. 남성 리더십 모델이 문제라면, 여성은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해야 남성적이지도 않으면서 여자라는 성별에도 갇히지 않고 제대로 대표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것은 종교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고민이다. 페미니즘은 말로는 남성 중심 권위주의를 배격한다 하면서도, 전복적이고 대안적인 가치를 구현하기보다는 같은 권력을 누리는 쪽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세상의 질서를 뒤집지 못한다.
어린이 사역을 하신다는 성공회 여자 일본인 신부님과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그냥 인사만 나누었는데도 남성 사역자와는 다르게 풍기는 이분의 겸손하고 인자한 모습에 절로 감화가 되었다. 종교인에게 금욕과 절제 등, 더 나은 것을 사모하기 위한 훈육은 기본이다. 이것은 다분히 종교의 문법으로, 권력과 해방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페미니즘의 논리로는 이해 및 설명이 불가한 영역이다. 아마도 그분은 여성 사역자로서 그러한 종교의 문법을 제대로 익힌 분이 아닐까 싶다.
결국 종교 안에서 여성의 경험을 논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문법에만 능해서는 제대로 다룰 수가 없다. 페미니즘이 기독교를 공격할 때 세상만도 못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계몽주의 문법으로, 서로 다른 문법을 구사하는 영역을 향해 우리 문법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폄하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으로 종교를 전복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종교를 개선하는 게 목적이라면 종교 문법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서구 자유주의 기독교 페미니즘과 다르게 이 연재 글에서 살펴본 이슬람 페미니즘, 유교 페미니즘, 복음주의 페미니즘은 모두 그 종교 문법 안에서 여성들의 삶을 돌아보는 작업이다. 비서구 사회에서 유일신교를 받아들인 한국 기독교 여성에게는 이 세 가지 페미니즘이 다 참고가 된다. 우선 복음주의 페미니즘은 아직도 한국 신학이 많이 기대고 있는 복음주의 신학 안에서 여성들이 성경에 기반해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들을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는 비서구 사회의 여성으로서 백인 여성들이 자기 사회에서 대면하는 이슈들과는 다른 이슈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서구에 대항해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이슬람 페미니즘의 작업은 참고가 된다.
흔히 보수적 기독교를 믿으면 서구 백인 중심 종교에 세뇌된 것이라 생각하는데, 서구 자유주의 기독교를 따르는 것도 편만 바꿨을 뿐 백인 중심 종교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슬람 페미니즘은 이러한 백인들의 의제를 벗어나서 유일신교를 믿는 비서구 여성들이 그야말로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들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유교 페미니즘은 유교의 기본 문법 안에서 남녀평등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유교가 그렇게 수정이 될 수 있다면 우리가 기독교 안에서 믿는 남녀평등의 작업을 하기도 훨씬 수월해진다. 젠더 질서에 집중된 종교성의 핵이 바뀌기 때문이다.
현재 페미니즘의 논리로만 지적되는 교회 안의 여성 문제가 페미니즘의 계보에 봉사하면서 한쪽 방향으로만 지식이 형성되는 것을 나는 우려한다. 단 하나의 이야기는 위험하다고 페미니즘은 말하는데, 그렇다면 페미니즘도 마땅히 종교 여성들의 이야기 앞에서 상대화되어야 한다. 그 단 하나의 이야기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종교 전통 안에서 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작업들을 대략적이지만 소개했다. 마지막까지 누가 가라지이고 누가 곡식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종교다. 심지어 일반 학문도 그 불확실의 영역을 인정하는 게 요즘 추세인데, 그 가운데서 유독 페미니즘만 확신에 차 있는 것이 생경하다면 생경하다.
[출처: 뉴스앤조이] 종교라는 큰 그림에서 이해하는 여성의 경험 2019.02.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