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성평등의 신호탄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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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교와젠더연구소 작성일24-07-23 14:20 조회293회 댓글0건본문
젠더, 성평등의 신호탄이 되다
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㊻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교수(신학대학원)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을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정치와 경제·사회와 문화·과학기술·철학에 대해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지난 15일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교수(신학대학원)가 「젠더와 성 평등」을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47강은 김현섭 서울대 교수(철학과)의 「민주주의와 정의」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우리가 진정한 성 평등을 위해서 모색해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을 동료 인간으로 보는 코즈모폴리턴 시각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나는 본다. 성 평등이란 궁극적으로 모든 종류의 차별을 넘어서는 평등과 연결돼야 한다. 성 평등의 모색은 다른 종류의 평등의 모색과 분리될 수 없다."
생물학적인 성(sex)과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젠더(gender)’라는 개념은 성의학자(sexologist)인 존 머니(John Money)가 1955년에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젠더’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여성 운동과 페미니즘에서 사용하는 ‘젠더’로서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이 개념 확산에 중요한 기점을 마련한 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다. 1949년에 『제2의 성(The Second Sex)』이라는 책에서 그가 말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women are not born, but made)”라는 구절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자연적인 것의 ‘탈자연화’를 하도록 하는 혁명적 사건이 됐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바로 여성이 인류의 역사에서 부차적 존재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간결하게 드러낸다. 인류의 역사에서 여성은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남성들의 분석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여성 스스로 자신에 대해 말하고 지식을 생산하는 ‘발화 주체(speaking subject)’가 되지 못했으며, 여성은 언제나 남성들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언제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이 아니라, 가부장제적 사회적 관습과 남성들이 ‘허용하는 일,’ 즉 ‘여성으로서의 역할들’만을 수행하는 삶을 살아왔다.
이러한 정황에서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녀왔다고 절대적으로 믿었던 ‘여성됨(womanhood)’ 또는 ‘남성됨(manhood)’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인식을 강조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젠더’라는 개념을 사용하거나 소개한 것은 아니지만, 젠더의 의미를 정확하게 담아내는 의미를 지닌다. 젠더 개념은 여자와 남자로 구분하는 성(sex)을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의 탈자연화(denaturalization)로부터 시작되면서, 매우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서 우리의 세계를 재구성하도록 촉구하게 된다.
위험한 사상으로 여겨지는 젠더 개념
여자와 남자라는 두 성(sex)은 신이 그렇게 창조한 신적 질서라고 굳건히 믿으며, 여자의 존재 이유는 출산과 양육이라는 사적 영역에서의 일이라는 것을 절대적 진리로 생각해온 사람들에게, 젠더 개념의 등장은 하늘이 내린 자연의 질서, 또는 신적 질서를 거스르는 반인륜적·반종교적·반가정적 인식으로서 매우 ‘위험한 사상’이라고 간주된다.
오늘 주제는 ‘젠더와 성 평등’이다. 매우 단순해 보이는 그 두 개의 개념은 사실상 참으로 복잡하고,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젠더’라는 개념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모든 측면과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학제가 아니라 다학제적(multidisciplinary)·간학제적(interdisciplinary), 그리고 더 나아가서 초학제적(transdisciplinary) 조명을 해야 한다. 정치·경제 문화·역사·철학·종교·의학·문화·경제·법·예술, 또는 테크놀로지 등과 같은 공적 영역은 물론, 사적 영역에서의 무수한 측면들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유리 천장의 사생활
기업·종교·정치·사회 단체 등 다양한 제도들 안에서 법령이나 규정 등을 통한 보이는 차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유리 천장(glass ceiling)’이라는 개념이다. 미국 기업에서 고위직 여성들은 5%밖에 되지 않고, 여성들은 남성이 받는 임금의 75%밖에 받지 못한다. 한국에서 2017년 여성 공무원 합격자 비율은 46.5%이나, 3급 이상 고위직 공무원 가운데 여성은 6.5%에 불과하다.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교수(신학대학원)는 “인류의 역사에서 여성은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남성들의 분석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여성 스스로 자신에 대해 말하고 지식을 생산하는 ‘발화 주체(speaking subject)’가 되지 못했으며, 여성은 언제나 남성들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들이었다”라며 “그래서 여성들은 언제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이 아니라, 가부장제적 사회적 관습과 남성들이 ‘허용하는 일,’ 즉 ‘여성으로서의 역할들’만을 수행하는 삶을 살아왔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여성과 남성의 채용이나 임금에서 여성들은 남성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들은 어느 정도의 위치에 가면 더 이상 진급이나 중요 직책을 맡는 것으로부터 배제된다. 표면적으로는 평등한 법과 규율이 있어서 성차별은 사라진 것 같아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기회균등이 주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유리’가 있을 때 멀리서 보면 보이지는 않아서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 다가가면 앞으로 진행을 하지 못하는 장애물이 되는 것처럼, 여성은 자신의 경력을 쌓고 지속하면서 자신의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지 않는다.
이러한 정황에서는 여성들이 다수인 분야에 남성들이 등장할 때, 비록 소수라 해도 사람들은 ‘남성-지도자·여성-구성원’이라는 젠더에 관한 고정 관념을 작동시키게 된다. 그래서 ‘어쨌든’ 남성이 지도적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사고로 이어지는 것이다.
인간사 모든 영역에 대한 근원적 질문
‘젠더’의 등장은 인간사 모든 영역에 근원적인 문제 제기를 하게 되는 크고 작은 혁명을 불러일으킨다.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절대불변의 성(sex)과 연결돼 고정됐던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이 신이 부여한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의미를 담고 있는 사회문화적 구성 ‘젠더’ 개념은 21세기인 지금도 여성을 포함해서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이해하거나 동의하지 못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초기에 남자와 여자라는 두 가지 정체성이 선천적인 것이 아닌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강조하는 ‘젠더’라는 범주는 이제 그 젠더 정체성(gender identity)의 구성에는 태어날 때 지정된 성과 자신이 느끼는 성별 정체성이 동일한 시스젠더(cisgender)를 비롯해서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non-binary)에 들어가는 젠더 퀴어· 젠더플루이드(gender fluid)·에이젠더(agender)·빅 젠더(big gender)·트라이젠더(trigender)·젠더 논컨포밍(gender non-confirming)·안드로진(androgynous)·데미젠더(demigender), 또는 간성(intersex) 등 많게는 72가지로 세분화돼 분류한 젠더 정체성의 범주들이 있다.
젠더 개념의 등장은 우리 일상 세계의 다양한 차원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젠더 개념은 우선 사회문화적 차원·정치적 차원, 그리고 종교적 차원 등 세 영역에서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근원적 문제 제기를 한다. 사회문화적으로 전통적인 성 분업, 즉 여자-사적 영역·남자-공적 영역으로 나누던 역할 분업에 대한 문제 제기, 따라서 여성의 사회정치적인 개입과 참여, 여성의 참정권과 교육권은 물론 여성의 지도자로서의 문제에 대한 사회적·정치적·변화의 요청이 시작됐다.
성평등을 배격하는 종교
‘젠더’라는 하나의 개념은 종교적 영역에서도 새로운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다.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영역이라고 간주되던 여성의 지도력 문제가 여성의 목사 안수와 신부 서품을 요구하는 제도적 변화를 위한 혁명을 가시화시켰다.
젠더의 등장은 특히 종교적으로 ‘혁명적 사건’의 의미를 지닌다. 소위 ‘신적 질서(Divine Order)’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 제기를 하는 인식론적 근거가 되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공식적으로 여전히 이 ‘젠더’ 개념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1995년 9월 베이징 세계 여성 대회를 앞두고 가톨릭교회는 ‘젠더’가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부정하는 입장을 다양하게 밝혔다.
한국의 교육계나 종교계에서 터부시하는 개념이 있다. 바로 '성 평등'이다. 내가 교육청이나 교육 관련 단체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을 때 강연 제목에 ‘성 평등’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반드시 ‘양성 평등’으로 수정해달라는 요청을 받곤 한다. ‘양성 평등’은 전통적인 여성-남성 범주에서 이 두 성의 평등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성 평등’이란 시스젠더(cisgender)라고 할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성만이 아니라, 트랜스젠더·간성 등 성 소수자·성 정체성, 그리고 성적 지향 등에서 그 다양한 사람들의 평등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 보수 단체나 보수 여성 단체는 ‘성 평등’이라는 개념을 배격하고 비판한다.
언제쯤 소수자 토론 진행자 볼 수 있을까
새해를 맞이하면서 방송들에 나오는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신년에 기대하는 희망 등을 토론하는 신년 토론 프로그램과 같은 것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여성 배제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일상화되고 있는가를 보게 된다. 진행도 남성 언론인이 하고, 토론자도 100% 남성들이다. 그 남성들은 중년·비장애인·이성애자, 그리고 전문가로서 고학력자들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에서 누가 ‘보이지 않는가’를 보는 그 인지의 정도가, 바로 평등 감수성 지수의 척도로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생략에 의한 차별은 방송에서만이 아니다. 종교·정치·경제·교육·언론 등 한국 사회 곳곳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오늘의 세계’를 조명하며 그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다층적 위기와 차별의 문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맥락에서, 젠더 인식과 성 평등을 위한 변혁을 모색하기 위해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으로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기본적인 과제를 사회적으로 확산하고 공유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성차별만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차별에 대한 인지, 즉 ‘차별 문해력’ 확장을 위한 지속적인 학습이 있어야 한다.
둘째, 차별에 대한 인지가 확장되면서 직장·가정·종교 단체·시민 단체·정부 단체 등에서 차별을 목격하거나 경험하게 됐을 때 침묵하지 말고 문제 제기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셋째, 성차별을 포함해서 다양한 얼굴의 차별이나 혐오가 피해 당사자만이 아닌 사회 구성원 ‘모두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문화를 확산해야 한다.
넷째, 나와 직접적 관련이 있든 없든, 다양한 양태의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는 운동에 연대하는 ‘다름의 연대(solidarity of alterity)’를 실천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다섯째, 그 어떤 개인이든 각자가 지닐 수 있는 ‘인식론적 사각지대’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그 사각지대를 넘어서기 위한 부단한 학습과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성 평등을 위해서 모색해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을 동료 인간으로 보는 코즈모폴리턴 시각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나는 본다. 성 평등이란 궁극적으로 모든 종류의 차별을 넘어서는 평등과 연결돼야 한다. 성 평등의 모색은 다른 종류의 평등의 모색과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한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는 ‘젠더’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발점은 성 평등의 모색이지만, 도착점은 결국 모든 종류의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는 인간 평등이 돼야 한다. 코즈모폴리턴 권리·코즈모폴리턴 정의·코즈모폴리턴 평등과 같은 개념에서와 같이 바로 인간 개별인으로부터 출발해서 다양성을 지닌 ‘모든’ 인간을 동료 인간(fellow human)으로 보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장받도록 하는 정신이 확산될 때, 비로소 총체적 의미의 성 평등은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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