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기 한국 불교의 역동성과 현재적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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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교와젠더연구소 작성일24-05-13 13:52 조회460회 댓글0건첨부파일
- 2019년도 불교학연구회 추계 학술대회 자료집_김순석.pdf (4.8M) 0회 다운로드 DATE : 2024-05-13 13:5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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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 한국불교의 역동성과 현재적 반성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목 차>
Ⅰ. 머리말
Ⅱ. 불교계의 3·1운동 연구 동향
Ⅲ. 3·1운동기 불교계의 참여와 역동성
Ⅳ. 현시점에서 반성과 과제
Ⅰ. 머리말
2019년은 3·1운동이 발발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사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3·1운동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준비과정에서 종교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3·1운동을 촉발시킨 민족대표 33인이 모두 종교인일 뿐만 아니라 중앙의 만세시위를 지방으로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종교 조직이 크게 활용되었기 때문이다.1) 그렇지만 3·1운동에서 특정 종교의 운동만을 따로 살펴보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만세시위 군중 가운데 불교인들을 집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1 운동에서 불교계의 주도로 진행된 만세시위를 살펴보려면 사찰과 포교당 등에서 승려들과 불교인들이 모여서 논의되고 결행되었던 사건을 말할 수 있다. 독립운동에 있어서 불교인만을 굳이 고집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촉발시키는 주인공들만으로 운동과 시위가 성사될 수 없기 때문이고, 주동자의 선창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시위 집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시위는 의미가 있고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만세시위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만세시위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되었고, 이러한 시위는 지속적으로 이어져 그 해 5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런 까닭에 3·1운동의 시간적 범위는 1919년 3월부터 5월말까지로 잡는다. 왜나하면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집계된 통계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불교계 3·1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옥중에서도 투쟁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열람하고,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고, 그들은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 때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은 일부 민족대표들이 불안과 절망에 빠져 있었고 극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풍문이 돌자 몇몇 인사들 가운데는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한용운은 감방 안에 있던 분뇨통을 들어 나약해진 일부 대표에게 뿌리 며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는 민족대표의 모습이냐? 그 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 취소해 버려라!”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2)
한용운은 1919년 7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 검사의 요구로 옥중에서 집필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 하였다. 이 글은 조선이 왜 독립되어야하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조지훈에 의해서 당대 명문으로 평가되었다.3)
1919년 불교계 3·1운동은 해외에서 그 해 11월 15일 상해에서 불교계의 고승 12명이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를 발표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는 불교계가 일제에 투쟁을 선언한 것으로 해석하였다.4) 이 선언서는 평화를 지향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모습보다는 혈전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왔다. 김순석은 이 선언서를 독립쟁취를 위해 일제에 혈전을 선언한 투쟁을 넘어 세계평화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5) 물론 국외에서 3·1운동의 여파는 해가 바뀌어도 해마다 3월 1일이 돌아오면 해외에서 3·1운동기념식 거행되고 만세 시위도 이어졌다. 그런 까닭에 3·1운동의 범위를 1919년 5월 말까지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따르면 3·1운동에 참가한 사람의 수는 2,023,098명이고, 사망자 수는 7,509명이며, 부상자 수는 15,961명이다.6) 불교계 독립운동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불살생 계율의 문제를 어떻게 보야야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적이 나의 목숨을 요구하면 어찌할 것인가. 목숨마저도 내 주어야 할 것인가. ‘자비를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적에게 나의 생명을 맡길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살라는 말인가. 이와 같이 회색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사상이 어디 또 있단 말인가’라고 묻는다.7) 그렇지만 교리에 충실하자면 나의 목숨을 요구하는 적에게 나의 목숨을 내어줄지언정 적을 살상해서는 안된다.8) 그런데 이 문제는 나의 목숨 뿐만 아니라 내 이웃의 목숨도 함께 걸린 문제이다. 작은 희생을 감수하고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3·1운동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서 자유로운 독립운동이었다. 왜냐하면 3·1운동은 의병전쟁이나 무장투쟁처럼 적을 살상하는 투쟁이 아니었고, 평화적이었고, 비폭력적이었으며, 무저항의 만세시위였기 때문이다. 3·1운동은 비폭력의 무저항 운동이었음에도 일제강점기 그 어떤 독립운동보다도 대규모였으며 영향력과 파급효과도 지대하였다. 총칼 앞에 맨몸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에도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출처. 2019년 불교학연구회 추계 학술대회
[제2발표 한3·1운동기 한국불교의 역동성과 현재적 반성] 29p ~ 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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