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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만들기: 한국 가톨릭의 천진암 성역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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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5-05-13 14:41 조회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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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만들기: 한국 가톨릭의 천진암 성역화를 중심으로

 

<초록> 


이 논문은 한국 가톨릭 천진암 성역화 사업의 전개 과정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성지가 본래 성스러운 땅이 아니라 특정한 맥락에서 인간적인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이고자 했다. 천진암 성역화 사업의 전개 과정을 들여다보면, 사업 주체들이 한국 가톨릭의 초창기 인물들, 기원, 발상지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구축하고, 각각을 새롭게 이름 지어 의미 부여하고, 새롭게 제안한 기년에 의례를 행하는 등의 작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천진암 성지 만들기의 사례는 특정한 종교적 공간이 이름 짓기, 서사의 구축, 의례 만들기 등의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들은 해당 공동체가 그 공간과 관련하여 선별한 기억, 현재의 해석을 전달한다. 그럼으로써 성지라는 특정 공간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성스러움의 의미 역시 만들어지고 유포된다. 

 

Ⅰ. 서론 

 

엘리아데가 “종교적 인간에게는 공간이 균질하지 않다”는 유명한 말을 기조처럼 남긴 이후(엘리아데, 1998: 55), ‘성스러운 공간’은 ‘성스러운 시간’과 함께 종교학의 핵심 범주로서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는 “인간에게는 성스러운 장소를 선택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오직 발견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으나(엘리아데, 1998: 60), 현재 성스러운 공간에 대한 논의는 인간적 노력과 의도를 포함하는 행위의 산물로서 다각도로 논의되고 있다(Smith, 1995; Gill, 1998; Brereton, 2005; Brockman, 2011; Chidester, 2018). 최화선은 성스러운 공간에 대한 이러한 담론 변화에 대해 “성스러운 장소에 대한 이해가 ‘장소의 성스러움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부여되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인간이 장소의 성스러움을 창출해내고 이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적절하게 지적한 바 있다(최화선, 2004: 339). 

 

이 논문은 한국 가톨릭 천진암 성역화 사업의 전개 과정을 당시 역사적 맥락과의 관련 하에 살펴보고, 이 사례를 통해 성지라는 것이 실재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이고자 한다. 성지는 본래 특정한 땅을 명명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맥락 하에 만들어진 장소다(장석만, 2022: 55). 천진암 사례에 주목한 것은, 이 성지 조성 단계의 초기에 산발적으로 제기되었던 문제들이 최근 한국 가톨릭 성지 조성 사업 전반에 대한 사회적, 학문적 관심 속에서 재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진암을 둘러싸고 제기되었던 문제들은 한국 가톨릭이 이 성지를 어떻게 의미화해 가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천진암 성역화 사업의 전개 과정을 면밀히 다룬 연구 결과는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이 논문을 통해 가톨릭 내부에서 성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면면들을 확인하려 한다. 천진암은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 5위가 강학을 열었던 공간으로 부상하여,1) ‘한국천주교회 발상지’로서 새롭게 의미화된 공간이다. 지금까지 천진암을 직접적으로 다룬 연구 성과들이 많이 축적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천진암이라는 장소를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은 논문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이는 어느 정도 천진암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 자료가 정약용이 남긴 몇몇 묘지명과 시, 달레(Claude-Charles 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1874) 정도로 한정적인 데에서 비롯한 것이라 여겨진다. 문학 및 역사학계, 그리고 천주교계에 속하는 연구자들은 이 자료들에 등장하는 강학의 성격과 내용 등에 대해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고 있는 편이며, 논의의 결이 다양하지 않고 ‘강학이 이루어진 장소가 실제로 천진암인가’, ‘강학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었는가’ 등을 두고 다소 논쟁적인 성격의 논의가 이루어졌다.먼저 가톨릭 및 서학과 다산의 관계를 다룬 연구 성과들이 있다(김상홍, 2004; 김치완, 2012; 조성을, 2013; 김봉남, 2014).

 

 주로 문학 및 역사학 분야에 속하는 이 논문들은 다산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조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천진암 강학을 언급한다. 그리고 역시 공통적으로 다산이 천진암 강학에 참여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천진암 강학에서 서학 또는 천주교 교리를 학습했다는 증거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직간접적으로 천진암이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이며 한국 천주교의 기원은 1779년이라는 주장을 논박한 셈이다. 다음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문제를 다룬 연구 성과들이 있다. (이원순, 1983; 조광, 1984; 김옥희, 1990; 김규성, 2004). 주로 한국 천주교회사를 기술하는 맥락에서 함께 다루었던 것들로, 가톨릭 내부에 속하는 연구자들의 관점을 담고 있다. 가톨릭 내부의 목소리는 단일하지 않다. 김옥희와 이원순은 다산의 기록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다산이 강학에 참여했으며 모임 참석자의 면면으로 보아 천주교리를 학습했다고 짐작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입장이다. 비교적 최근 연구인 김규성의 논문은 권철신, 정약전, 이벽,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등 6명 이외의 참석자는 확인할 수 없다는 점과 1779년을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연도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김규성, 2004: 35, 44).

 

그러나 남인 계열 소장학자들의 수사학적 지향으로 미루어볼 때 상제와 천주의 연관성을 토론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보았다. 그가 이 가능성을 제안한 것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자생성이라는 신학적 의의와의 연결고리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지리 및 경관, 성지 조성에 대한 관심을 표하는 지리교육학과 건축학 논문들이 있다(문진호, 1986; 강윤구, 1999; 최진성, 2003; 이현삼, 2006; 최재상·고성룡, 2013). 이 논문들은 천진암을 비롯한 한국 가톨릭 성지들을 사례 조사하여 특성을 파악하고, 공간 구성에 대한 건축학적 분석 또는 성지 조성 사업의 방향에 대한 제안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최재상과 고성룡은 천진암 성지를 중심 사례로 삼은 문진호의 논문에 대해 한국 가톨릭 순례성지에 대해 처음으로 학술적 접근을 시도한 연구라 평가하고 있으나(최재상·고성룡, 2013: 120), 이는 건축학계 내부 성과만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종교학계에서는 성지 조성 사업의 전반적인 쟁점들을 개관하거나, 종교 간 갈등을 피하기 위해 ‘공공성지’, ‘공유성지’ 등을 대안으로 제안하는 논문들이 있다(정진홍·이창익, 2020; 윤용복·고병철, 2022; 장석만, 2022; 이창익, 2023). 이들의 논의 가운데, ‘문화’나 ‘관광자원’ 이라는 이름으로 성지를 개발할 경우 종교 간 형평성 논란과 이로 인한 종교 갈등을 조장하게 된다는 지적은 시사적이다(이창익, 2023:126). 성지 조성 사업에 집중되어 있는 최근 연구와 달리, 성지와 장소에 대한 연구 관점의 변화를 포착하고 개관한 선행연구들 역시 빼놓을 수 없다(최화선, 2004; 허남진, 2010). 

본 논문은 종교학계의 이러한 관심을 인지하고 일면 공감하며, 또 다른 맥락에서 성지 조성 사업을 바라보려 한다. 성역화 사업의 구체적인 대상인 성지 자체에 눈을 돌려, ‘성지 만들기’가 의례화와 해석이라는 인간적인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천진암 성지 연구와 관련하여 자료상의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으로서는 천진암을 직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몇몇 논문, 언론 보도, 온라인 정보를 선별하여 가톨릭 성지에 대해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천진암과 관련하여 가톨릭 내부에 입장 차를 보이는 다양한 주제들이 있고, 그중에는 역사학적 방법론을 통해 전개된 논증이라기보다는 단정적인 주장에 가까운 내용도 있다. 이로 인해 강학의 장소, 내용, 참석자 등 천진암 성지의 역사적 진실에 대한 신뢰성은 가톨릭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의심받고 있으나(최석우, 1991; 김규성, 2004; 김봉남, 2014; 대한불교조계종 전국비구니회, 2022; 이창익, 2022), 담론과 논쟁 자체는 장기간 존재해왔고 성역화사업을 통해 천진암 성지라는 장소 및 그곳에서 행해지는 특정 의례라는 물리적 실체 또한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몇몇 주요 주장들(최석우, 1991; 변기영, 1991) 또한 자료로 채택했다. 자료에 대한 신뢰성 역시 현재진행 중인 사건을 연구대상으로 삼을 때 맞닥뜨릴 수 있는 난점이라 생각하며, 그럼에도 여러 자료를 비교·대조함으로써 논문의 오류를 줄이고자 노력했다는 점을 미리 밝히고자 한다.

 

출처: 최연정, 이유나, 종교와 사회(Asian Journal of Religion and Society) Vol. 12, No. 1 (2024): 189-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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