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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와 여성 지도력: '여성 문제'인가, 역사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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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5-06-12 18:01 조회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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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와   여성  지도력 : ' 여성   문제' 인가,  역사  문제인가

(기사 출처 = America Magazine, 5월 20일, 브론웬 맥셰이 역사학자)


지난 1월, 프란치스코 교종은 콘솔라타 선교 수녀회 회원 시모나 브람빌라를 교황청 축성생활회와 사도생활단부 공동 책임자로 임명하여 장관 직무대행인 앙헬 페르난데스 아르티메 추기경과 함께 이끌도록 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앞서 시노달리타스(함께 걷기)에 관한 시노드에 여성을 투표 참여자로 포함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을 바티칸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언론들은 이 조치가 전례 없는 성격을 지녔다고 강조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전통주의자들과 일부 교회법 학자들은 남녀 불문하고 서품 받지 않은 사람이 축성생활부를 운영할 권한을 갖는 것에 반대했다.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브람빌라 수녀가 추기경과 직책을 공유해야 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이 조치를 교회 고위 의사결정권에 여성이 더 많이 포함되도록 하는 역사적 진전이라며 반겼다. 이는 이 조치가 전례 없는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지 60년이 지난 지금, 여성에게 지도자 지위를 부여한 것이 가톨릭교회 사람들에게 뉴스거리가 된다는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전적으로 옳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충분한 증거로 보인다. 즉, 우리의 종교 전통에는 수 세기에 걸친 여성 혐오와 가부장적 구조, 특히 남성으로만 구성된 성직자에 뿌리를 둔 "여성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새로 선출된 교종 레오 14세도 유지할 것으로 보이는 교도권의 일관된 가르침, 즉 남성만이 성사 직무에 서품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또한 나는 교종의 권위와 성사 문제에 관한 한 성직자의 권위를 보수적으로 존중한다. 하지만 현대 가톨릭교회에 여성 문제가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교회가 이 분야에서 역사적 특성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교회 사람들이 여성과 평신도의 교회 지도력에 관한 중요하고도 역사적 선례에 대부분 무지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교 초기 시대부터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까지도 많은 여성이 교회 통솔에 참여했다. 단순히 주교의 권위 아래에서 자문하고 종속적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니다. 아래 소개하는 사례들은 가부장적 틀 안에서 소수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새 교종 취임과 함께 새로운 활력으로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교회 내 여성 지도력에 대한 추가적 고려가, 이러한 여성 지도력에 대한 인식 없이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제안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의사 결정에 참여한 여성

1세기 초부터 여성은 로마를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다. 성바오로의 서간과 다른 사도 시대의 저술에 그러한 여성에 대한 언급이 있고, 교부들의 자료에도 다양한 형태의 교회 지도력을 발휘한 여성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다.
비록 자료의 한계로 그들의 지도력 특정 측면을 명확하게 확증할 수는 없지만, 신심 깊은 로마 귀족 여성들의 관계망이 때때로 로마의 주교가 될 사람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로마의 주교를 교종이라 부르기 시작한 4세기에도 그랬다. 예를 들어, 서기 352년에 선출된 리베리우스는 로마의 신심 깊은 귀족 여성들에게 큰 빚을 졌다. 이 여성들은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그를 대립 교종 펠릭스로 교체하려 했을 때 리베리우스가 로마의 주교로 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중세 초기에 수도원 대수녀원장들은 성장하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자신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때때로 연계된 남성 공동체에 대해서도 운영권을 행사했다. 영국 제도에서는 주교, 다른 성직자 및 남성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지역 교회 시노드에 참여하기도 했다.
성 베다와 리폰의 스테파누스를 비롯한 앵글로색슨 작가들은 지역 교회 공의회에 대수녀원장들이 참석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켄트 주 민스터-인-타넷의 대수녀원장이었던 밀드레다 성녀는 다른 대수녀원장 네 명과 함께 694년 바칸셀드 시노드에 참여했다. 휘트비 수도원 설립자인 힐다 성녀는 노섬브리아에서 열린 첫 번째 시노드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수녀회 안에서 시노드를 주최했다. 이 시노드는 로마 교황청에서 선호하던 부활 주일을 계산하는 방법을 채택해, 아이오나와 아일랜드의 남자 수도자들과 불화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성상 숭배 논쟁을 해결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한 여성이 소집하고 주재했다는 사실은 더욱 잘 기록돼 있다. 바로 아테네의 이레네다. 그는 750년에서 803년경에 살았던 비잔틴 제국의 섭정이자 통치자였다. 역사학자 주디스 헤린에 따르면 이레네 황후는 자신이 신뢰하던 평신도 타라시우스를 서품받게 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세계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787년, 타라시우스와 함께 이레네는 공의회의 마지막 회기를 주재했다. 그와 우호적인 서신을 주고받고,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교종 하드리아누스 1세가 주재한 것이 아니다.
이 회의에서는 수십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을 격렬하게 분열시켰던 그리스도, 그의 어머니, 성인, 천사의 이미지를 그리스도교 예배에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결정적으로 다루었다.

여성 통치자와 영지를 관할하던 대수녀원장

이레네 황후는 일부 성상파괴주의자들과 너무 친했던 자신의 아들을 폐위시키고 눈을 멀게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수 세기 동안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거나, 마키아벨리처럼 무자비하거나, 그보다 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교종과 주교들이 많았는데도 가톨릭 신자들은 그들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기에, 여성의 교회 운영 참여에 대한 풍부한 역사는 도덕적 이력에 비슷한 의문을 제기하는 여성들을 위한 자리가 될 수도 있다.

로마 귀족 여성이자 교종 요한 11세의 어머니인 마로치아는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10세기 초, 교종 요한 10세는 전례 없는 예식을 통해 마로치아를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신생 교황령의 사실상의 통치자로 활동하며 북쪽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교황령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 번은 요한 10세를 폐위하고 살해한 뒤 레오 6세를 교종으로 앉히기도 했다.
마로치아는 아들 요한 11세를 비롯해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들을 교종으로 선출했지만, 문제의 사건이 일어난 지 수십 년 뒤, 친제국주의 연대기 작가들은 그가 전임 교종 세르지우스 3세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그 결과 그는 이 시대의 전통적인 역사 기록에서 악녀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와 관련된 교종 중 누구도 대립 교종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전통 가톨릭 역사에서 더 사랑받는 중세 여성은 이탈리아의 성녀 아델라이드다. 그는 오토라는 이름의 신성로마제국 초대 황제 3명의 배우자, 어머니, 할머니였다. 그가 고위 교회 운영에 참여한 것은 당대 교회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마로치아 통치 말기에 갓난아이였던 그는 이탈리아 여왕이었다가 독일 왕비가 되었고, 962년에는 교종 요한 12세에 의해 전례 없는 방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남편 오토 1세의 제국을 공동 통치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로 축성되었다.

실제로 요한 12세는 성경의 에스테르로 거슬러 올라가는 성스러운 황후의 전통과 연결되는 새로운 축성 예식을 개발했다.
아델라이드는 교종이 부여한 권한을 이용해 다양한 교회 기관을 설립하고 보호했다. 또한 클루니의 마욜루스와 오딜로라는 성인품에 오른 두 베네딕토회 수도원장의 아주 중요한 친구로서 방만하고 부패한 수도원들을 개혁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중세 시대 가장 유명한 국제 수도원 개혁 운동인 클루니 개혁이다. 말년에는 손자의 섭정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하면서 알자스에 셀츠 수도원을 만들고, 그곳에 합류한 남성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에게 스스로 수도원장을 선출할 권리를 부여하는 등 교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또한 이 남성 공동체에 대한 교종의 보호를 확보했다.

역사학자 페넬로페 내쉬는 아델라이드의 효과적인 교회 지도력 방식을 그의 뒤를 이은 여성 통치자들이 모방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교종 그레고리오 7세의 유명한 서임권 논쟁을 일으켜 전도유망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군사적, 물질적으로 무너뜨린 토스카나의 성주인 카노사의 마틸다는 교황청의 지원을 받아 교회에 대한 일부 운영권을 행사했다. 심지어 교종 우르바노 2세는 마틸다에게 임명권이 있는 수도원에 대한 그의 권리를 빼앗으려는 만투아 주교를 소환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그리고 다른 주교와 다른 저명 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틸다와 수도원에 속한 모든 것을 평화적으로 복원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그에게 주었다.

또한 이 시대에 일부 대수녀원장은 자기 지역의 수도 공동체뿐만 아니라 먼 거리에 있는 다른 수도 공동체에도 막강한 권위를 행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퐁트부로의 대수녀원장은 중세 후기까지 최소 78개의 수도원에 대한 권한을 가졌는데, 모두 남성과 여성이 섞여 있는 공동체이며 여성이 더 고위 지도자 직책을 맡았다. 일부 대수녀원장들은 수도원 영지로 불리는 교회 관할 구역 전체를 통솔하기도 했는데, 이는 어떤 면에서 주교의 교구와 유사했다. 그러한 여성들은 (그리고 더 많은 남자 수도원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존 교구에 지리적으로 속하지 않은 지역에서 교구장에 준하는 관할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고위 성직자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여성 중에는 작센의 크베들린부르크 공주 대수녀원장과 취리히의 황실 대수녀원장이 있었다. 이들은 성사 문제를 제외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수도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를 운영했다. 그들은 교종, 황제, 왕, 이웃 주교들의 인정을 받아 그렇게 했다. 크베들린부르크의 첫 번째 공주 대수녀원장이었던 마틸다는 10세기에도 대수도원장, 즉 주교들의 감독자로 불렸고, 대수녀원장으로서 축성서원 예식에서도 그렇게 불렸다. 한때 그는 도른베르크에서 열린 교회 시노드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함께 소집하기도 했다.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과 18-19세기 유럽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양한 수도원 영역이 해체되고 변모하면서, 그러한 대수녀원장들과 남성 수도원장들, 그리고 이들이 교회 운영의 다양한 영역에 참여했던 가톨릭의 집단적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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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오스트리아의 요안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 여왕. (사진 출처  commons.wikimedia.org)

 
초기 근대 교회를 이끈 여성들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교회법을 집행하고 가톨릭교회를 이끈 중세 말과 근대 초의 많은 여왕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기억도 마찬가지다. 카스티야의 이사벨라가 그 대표적 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대서양을 건너게 하고 무서운 스페인 종교재판소를 설치한 것으로 더 잘 알려진 이사벨라는 세 교종에게 연이어 자신의 영토 전역에 걸쳐 수많은 주교와 기타 교회 관리들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기도 했다. 이를 통해 그는 남편 페르디난드와 함께 부패한 수도원과 만성적인 주교 부재로 고통받는 주교 관할지역 개혁이 절실히 필요했다.

16세기 후반, 나바르의 마르그리트 여왕은 개혁적인 가톨릭 신자들과 마틴 루터와 존 칼뱅의 추종자들이 돌이킬 수 없이 분열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왕국에서 개혁적인 사제 제라르 루셀을 올로롱 주교로 임명했는데, 그는 자기 교구에서 모국어 설교와 신조 및 교회법에 대한 지침을 제정했다.
북쪽으로는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의 손녀인 영국의 메리 1세 여왕이 로마 가톨릭 성직자 교계 제도, 전례, 수도회 및 교육 기관을 복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는 (종종 잊혀지곤 하듯) 이전 시대에 소수의 가톨릭 주교와 사목자들이 교황권과 결별하고, 그의 아버지 헨리 8세와 남동생 에드워드 6세가 이런 기관들을 착복하고 억압하는 것을 돕기로 결정한 뒤였다.

한편 메리 여왕의 시누이이자 16세기 중반 스페인의 섭정이던 오스트리아의 후아나는 새로운 수도회인 예수회가 스페인의 교회 관리들에게 큰 반대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예수회를 보호하고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결국 후아나의 지원으로 예수회는 스페인 왕실의 공식 후원을 받게 되었고, 당시 주교와 교종이 임명을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페인 군주제로부터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후아나가 기억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예수회가 여성을 배제하는 관례에도 예수회 학자로서 비밀리에 서원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과 관련이 있다.

16세기 후반, 개혁적인 트리엔트 공의회의 다양한 규범을 시행하는 데는 남성 평신도뿐만 아니라 지배층 가톨릭 평신도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예를 들어, 스페인 네덜란드에서 트리엔트 공의회 시행과 공의회의 목표를 자신 있게 구현하고 발전시킨 개혁 가톨릭 수도회(맨발의 가르멜 수도회, 카푸친 수도회, 예수회 등) 설립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사벨라 클라라 에우헤니아와 그의 남편인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다. 그들 영지의 주교들은 문서를 작성하는 바티칸 관료들의 꿈이 아니라 북서부 유럽에서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가톨릭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교황청 참사들뿐만 아니라 이사벨라와 알베르히트와도 정기적으로 협상해야 했고, 이들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

여성 가톨릭 통치자들의 교회 개입은 18세기에 절정에 달했는데, 당시 호전적인 가톨릭 신자였던 합스부르크 황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주도한 활동이 그 정점에 달했다. 교종 클레멘스 13세는 교황청으로부터 ‘레지나 아포스톨리카’(사도 왕후)로 인정받고자 하는 그의 대담한 요청을 받아들였다.

클레멘스 13세의 후계자인 클레멘스 14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기 영토에서 공적으로 기념할 가톨릭 축일을 변경한 뒤에도, 이전에는 면제되었던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한 뒤에도, 신학교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규제한 뒤에도, 자신의 영토 내 다양한 ​​수도회의 청원자와 수련자에게 새로운 입회 조건을 부과한 뒤에도, 심지어 특정 수도회를 억압하고 그들의 재산뿐만 아니라 그 단체에 소속된 성직자와 서원자의 재산뿐만 아니라 그들의 미래까지도 결정할 권리를 주장한 뒤에도,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았다.
그는 제국 안팎의 일부 고위 성직자들의 바람에는 반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의 열렬한 동의를 얻어 이 일을 많이 해냈다.

근대 초기에 교회 고위급 의사 결정에 참여한 여성은 저명한 대수녀원장과 여성 통치자만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교종 그레고리오 13세와 필리페 2세의 직접 승인에 힘입어 스페인의 일부 지역 주교, 종교재판관, 가르멜 수도회 장상들의 반대에도 남성 수도원과 여성 수녀원을 포함하여 자신이 설립한 새로운 맨발의 가르멜 공동체의 역사적인 개혁과 지도력을 밀고 나갔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딸회를 설립한 루이즈 드 마리약 성녀는 여러 교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수년간 혁신적인 수도회를 이끌고 발전시켰으며, 개별 지역 주교와 심지어 교종의 공식 승인을 받기까지 했다.

근대 초기의 왕족이 아니며 수도자가 아닌 가톨릭 평신도 여성들이 때로는 주요한 형태의 교회 지도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는 역사 기록에 많이 남아 있다. 사실 내가 이 주제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역사 연구 분야이며, 17세기 프랑스 귀족 여성인 마리 드 비네로에 관한 책을 쓰게된 배경이기도 하다. 에귀용의 공작부인인 마리 드 비네로는 루이 13세 왕의 초대 국무장관인 리슐리외 추기경의 조카이자 상속녀였다.
비네로는 삼촌의 생전 및 그 이후에도 교종 알렉산더 7세가 세운 아시아와 북아메리카의 새로운 선교 교구를 비롯한 프랑스 주교 선출에 관여했는데, 여러 저명한 성직자들이 주교 선출에 실패한 뒤 교종을 설득하여 주교를 선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비네로는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그가 설립에 관여한 신학교인 신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와 관련된 훌륭한 주교와 사제들을 그들에게 보내주겠다는 매력적인 제안 덕분에 성공했다. 

또한 비네로는 친구인 성 빈센트 드 폴(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 중 한 명으로서 북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의 빈첸시오회 선교뿐 아니라 일부 프랑스 국내 빈첸시오회 선교에 관한 통제권을 행사했다. 또한 프랑스, 로마 교황청 및 전 세계 선교 현장에서 가톨릭 병원, 신학교, 학교, 수녀원, 새로운 축성 생활회 및 기타 다양한 사도직을 설립하는 데도 중책을 맡았다. 또한 알렉산더 7세 교종과 당대의 저명한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전 유럽을 대표하는 가톨릭 신자 중 한 명으로 칭송받았다. 성 빈센트 드 폴의 첫 전기 작가인 루이 아벨리 주교는 가톨릭 교회의 기둥으로서 그의 이름과 명성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의 상황

그러나 비네로는 오늘날 거의 잊혀졌다. 이는 역사가로서 나의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내가 쓴 그의 이야기가 현대인, 특히 교회사와 프랑스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이 있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너무나 놀랍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처음에 언급한 '여성 문제'를 시사하는 것 같다. 가톨릭 여성이 고위직에서 교회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은 급진적이고 전례 없는 일이라고 가정할 때,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는 가부장적 규범에 의해 얼마나 제약을 받는지가 아니라, 가톨릭 과거에서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지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가톨릭 논평가들이 앞서 언급한 역사의 절반만이라도 더 잘 알고 있는 가톨릭 교육자나 가톨릭 지도자들이 장려하는 역사적으로 엄격하고 균형 잡힌 자료를 통해 배웠다면, 프란치스코 교종의 고위직 여성 임명에 대한 반응이 전체 전통주의-진보 영역에 걸쳐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만약 그랬다면 고인이 된 교종이 이 분야에서 한 일을 그렇게 뻔하게 한목소리로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았을뿐더러, '전례 없는 일'이라고 단정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레오 14세의 교종 임기가 시작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미 프란치스코 교종의 임명이 가톨릭의 깊고 풍요로운 과거의 다양한 선례와 어떤 면에서는 일치하고 어떤 면에서는 다른지에 대해 더 성숙한 토론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에게는 현대적이고, 성직주의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 부제직에 관한 질문에도 덜 집중할 수도 있다.

우리는 교황청 교회법학자 지안프랑코 기를란다 추기경(예수회)이 제기한 교회 운영의 비성사적 영역에 대한 평신도의 참여와 관련된 질문에 대해 토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대 교회 사람들이 자주 반복해서 주장하는, 성직과 교회 운영 자체가 성사적 차원을 넘어 성직자와 수도자의 규율과 같은 영역에서 불가분 관계에 있다는 격언은 수 세기에 걸쳐 발전해 온 가톨릭 사상과 실천에 얼마나 확실하게 뿌리내리고 있을까?

나는 로버트 프레보스트 추기경(레오 14세 교종) 시절 프란치스코 교종이 주교부에 임명했던 여러 여성과 긴밀히 협력했던 새 교종이 역사에 근거하고 오늘날의 사고방식에 응답하며, 최근뿐 아니라 더 오랜 기간에 걸친 가톨릭 전통에 대한 경건함을 동시에 갖춘 논쟁을 촉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기사 원문 : https://zrr.kr/jMzNEq
번역 : 예여공(예수님과 여성을 공부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 네이버 카페 '예여공'에서 월례 모임 등 정보를 볼 수 있다.)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s://www.catholicnews.co.kr202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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