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붓다 바람과 사자와 연꽃의 노래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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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2-06-13 13:05 조회1,396회 댓글0건본문
청년붓다 바람과 사자와 연꽃의 노래 8.
1. 이성간에도 우정이 가능할까?
자비수행을 할 때도 부인은 상상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애욕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정은 어떨까? 부부사이에도 우정관계가 성립될까? 대체적으로 힘들다고 본다. 왜 그런가? 청정도론 제9장 자애수행편을 보면 알 수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자애수행을 할 때는 연인이나 죽은 자에 대해서는 자애의 마음을 내지 말라고 했다. 왜 그런가? 부부나 연인사이에 자애의 마음을 내면 애정으로 변질되어서 자애수행이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경우는 죽었기 때문에 감응이 되지 않아서 자애의 마음을 내도 효과가 없다고 한다.
어느 대신이 있었다. 대신은 자신의 아내를 사랑했다. 대신은 자신의 아내를 대상으로 자애수행을 하기로 했다. 자신의 아내에 대하여 “행복하기를!”라며 자애의 마음을 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그가 그녀에 대하여 자애를 닦으면서 밤새도록 벽과 싸워야 했다.”(Vism.9.6)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애수행은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핵심이다. 가장 먼저 자신을 대상으로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부모나 형제와 스승이나 친구 등 가까운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그 다음으로 나와 무관한 사람이 된다. 최종적으로 원한 맺힌 자가 대상이 된다. 그런데 절대 자애의 마음을 내서 안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이성과 죽은 자를 말한다.
부부사이에도 우정이 존재할까? 가능하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일곱 종류의 아내의 경’에 따르면 친구 같은 아내가 있다. 경에 따르면, 친구 같은 아내에 대하여 “친구가 멀리서 오면 친구를 보고 기뻐하듯 여기 아내가 남편을 보고 기뻐한다.”(A7.63)라고 했다.
그렇다면 친구는 무엇일까?
『디가니까야』31번경에서는 좋은 친구의 조건에 대하여
“1)도움을 주는 사람, 2)즐거우나 괴로우나 한결 같은 사람, 3)유익한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 4)연민할 줄 아는 사람”(D31.16)
라고 했다. 한마디로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좋은 친구인 것이다.
친구중에는 절친이 있다. 그렇다면 절친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1)비밀을 털어놓고, 2)비밀을 지켜주고, 3) 불행에 처했을 때 버리지 않고, 4)목숨도 그를 위해 버립니다.”(D31.16)
라고 한다. 즉,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정도라면 절친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불교는 우정의 종교
불교는 우정의 종교라고 본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우정의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자애경을 들 수 있다. 자애경이 왜 우정의 경인가? 이는 자애를 뜻하는 멧따(metta)라는 말이 우정(amity)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애경을 보면 “삽베 삿따 바반뚜 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Stn.145)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라고 바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때 우정이 된다. 이와 같은 자애경은 테라와다불교의 예불문이자 동시에 수호경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로 다양하다. 사성제와 팔정도와 같은 근본 가르침부터, 염처경과 같은 수행의 가르침도 있고, 자비실천의 가르침도 있고, 평등의 가르침도 있다. 환자를 위한 가르침도 있고 사업에 대한 가르침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가르침 가운데 우정의 가르침이 가장 돋보인다. 왜 그런가? 불교는 우정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사랑의 종교라기 보다는 우정의 종교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부처님은 도처에서 우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상윳따니까야』꼬살라의 모음에 있는 ‘좋은 친구의 경’(S3.18)일 것이다. 어느 정도로 중요할까? 다음과 같은 경전 내용도 있다.
어느 날 아난다가 부처님에 좋은 친구의 조건에 대하여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했다. 아난다는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됩니다.”(S3.18)라고 말했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를 나무라면서
“그렇지 않다. 이러한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된다.”(S3.18)
라고 말했다.
아난다가 말한 좋은 친구는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친구 정도이고, 붓다께서 말씀하신 좋은 친구는 아마도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친구를 말한다. 이런 친구 하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의 전부와도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태양이 떠오를 때 전조가 있는데
고미숙 선생은 8강에서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말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정에 대한 것이다. 어쩌면 우정을 말하기 위해서 이번 강연을 했는지 모른다. 감이당이 추구하는 공동체의 이념과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으로 본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정의 수행공동체를 말한다.
부처님의 승가공동체는 한마디로 “우정, 지성, 구도”라는 세 가지를 가진 ‘우정의 수행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오래 갈 수 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는 빛이 되어야 한다.
불교에서 선우(善友), 즉 좋은 친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부처님은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된다고 했다. 그런데 고미숙 선생은 새벽을 비유로 설명하며 빛을 강조했다. 왜 빛을 강조했을까?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붓다의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태양이 떠오를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새벽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생겨날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좋은 벗과 사귀는 것이다.”(S45.49)
부처님은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하여 새벽의 비유로 설명했다. 해뜨기 전의 전조가 되는 현상으로, 해가 뜨기 전에 먼저 빛을 낸다. 그리고 해가 뜬다. 좋은 친구도 그렇다. 해가 뜨기 전에 먼저 새벽이 온다. 좋은 친구는 새벽과도 같은 것이다. 좋은 친구와 우정을 쌓아 놓으면 해탈과 열반의 길로 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좋은 친구는 청정한 삶의 절반이 아니라 청정한 삶의 전부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4. 선우로서 붓다, 스승으로서 붓다
도반은 서로에게 빛을 반사하는 것으로, 이를 우정의 기쁨이라고 한다. 마치 서로가 서로를 씻어 주는 것과 같다. 숭산스님이 미국에서 포교할 때 아이비리그 출신들이 참여했다. 그때 말한 것 중에 감자씻기 이야기가 있다. 감자를 씻을 때 개별적으로 씻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한소쿠리에 넣어서 한꺼번에 씻는 것을 말한다. 감자소쿠리를 물에 넣고 흔들면 서로가 서로를 씻겨 주기 때문에 효율적이라는 사실이다.
수행공동체에서 친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처님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때로 스승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라고 했는데 이는 부처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이는 경전에서
“아난다여, 이와 같이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과 사귀는 것이 청정한 삶의 전부라고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왜냐하면 세존을 좋은 벗으로 삼아, 태어나야 하는 존재가 태어남에서 벗어나고…”(S3.18)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어떤 권위도 없고, 스승으로 붓다이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도반으로서 붓다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세존을 벗으로 삼아(Mamañhi kalyāṇamittaṃ)”(S3.18)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을 수행도반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어떤 종교 창시자도 이렇게 말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붓다는 청정한 삶의 전부와도 같다. 도반으로서 붓다도 있지만 안내자로서 붓다도 있다. 이는
“바라문이여, 열반이 있고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고 내가 안내자로서 있는데, 나의 제자들이 나에게서 이와 같이 충고를 받고 가르침을 받고, 어떠한 이들은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을 성취하고 또는 어떤 이들은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다만 길을 안내하는 자입니다.”(M107)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5. 최상의 모임이란 무엇인가?
강사는 감이당 이전에 ‘수유연구실’, 일종의 지식인공동체였는데 갖가지 지식을 배웠다고 한다. 나이가 어려도 해당분야에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배웠다고 한다. 이럴 때 지식을 알려 주는 사람은 스승이 되고 배우는 사람은 학인이다. 반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었을 때 배우는 입장이 되기 때문에 학인이 된다.
때에 따라 스승이 되기도 하고 학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는 것이다. 서로 우정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그래서 고미숙 선생은 “우정이야말로 진리의 빛이 흘러 갈 수 있는 최고의 교량입니다.”라고 말했다.
부처님의 승가공동체는 위계가 없다. 이는 권위가 없음을 말한다. 마치 회사조직처럼 부장이 있고, 부장 밑에 과장이 있는 등 위계질서가 없음을 말한다. 모두 도반이다. 왜 그럴까? 구도 열정으로 모인 수행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승가공동체를 보면 특징이 있다. 뚜렷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해탈과 열반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만약 목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취미생활을 하기 위해서 모인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해탈과 열반이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스승이 있고 도반이 있다. 스승은 이끌어 주고 도반끼리는 서로 배운다. 누가 지시하고 감독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 ‘모임의 경’에 따르면 최상의 모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최상의 모임이란 무엇인가? 그 모임 가운데 장로수행승이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 그들도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최상의 모임이라고 한다.”(A3.93)
이것이 최상의 모임이다. 최상의 모임에서 가장 핵심적인 구절은 아마도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라는 말일 것이다. 해탈과 열반을 지향하는 모임에서 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고서 그 사람과 같이 되고자 할 것이다.. 모임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을 따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좋은 도반의 조건이 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된다.”(S3.18)라는 말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감이당에서 추구하는 공동체가 부처님의 승가공동체와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의 빛이 되어 주는 우정의 공동체로 설명할 수 있다. 우정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의 빛이 되어 준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서로가 서로의 스승이 되고, 서로가 서로의 벗이 되는 우정의 공동체를 말한다. 이런 공동체가 부처님의 승가공동체와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지향한다. 그러나 한 번에 되지 않는다.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이는 붓다께서,
“수행승들이여, 나는 최상의 지혜가 단번에 성취된다고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그와 반대로 오로지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닦고 점차적으로 발전한 다음에 지혜의 성취가 이루어진다.”(M70)
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의 점오점수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이끌어 주는 스승이 있어야 하고 서로가 서로를 씻어 줄 수 있는 도반이 있어야 한다.
고미숙 선생은 자신은 불교경전을 다 보지 않았다고 했다. 불교에 대해서도 깊게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은 강물과 같이 많이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하여 우물물이라도 나누어 마시고 싶어서 알려 주는 것이라고 했다. 또 “깊은 산속에 옹달샘이 있는데 저만 마실 수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보시는 능력껏 하라는 말이 있다. 이 다음에 돈을 많이 번 다음에 보시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 보시는 있을 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타카에서는 "조금이면 조금을 보시하라. 중간 정도면 중간 정도를 보시하라. 많으면 많이 보시하라. 보시할 것이 없으면 보시하지 말라.”(Jat.535)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아는 것이 있으면 아는 만큼 알려 주어야 한다.
고미숙 선생은 좋은 스승이자 동시에 좋은 도반이다. “누군가의 좋은 벗이 되기 위해서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들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의 좋은 도반이 되고 싶습니다.”하며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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