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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붓다 바람과 사자와 연꽃의 노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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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2-06-13 12:42 조회1,4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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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붓다: 바람과 사자와 연꽃의 노래 7

 

1. 연기법에 대한 해석

 

연기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조건에 대한 결과를 말한다. 연기는 빠띳짜사뭅빠다(paṭiccasamuppāda), 즉 조건(paṭicca)하여 함께 발생함(samuppāda)의 뜻이다. 그래서 조건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무아’를 설명하는 핵심 용어이다.

그런데 강사는 프로세스process로 해석하면서, 연기법은 과정법이라고 설명한다. ‘무아’는 조건 지어 일어난다는 뜻이므로 과정이 있으며, 이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질서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생성하고 소멸하는 일종의 프로세스이며, 이를 추동하는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연기이며, 무아이며, 이를 프로세스와 운동으로 설명하는가? 그것은 붓다의 가르침의 출발인 “자아, 고정된 실체는 없다“를 가르치는 것이며, 결국 ”자아“라는 고정된 실체, 불면의 실체라는 개념을 부수기 위한 것이다. 왜냐면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아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또한 타인들과 연결되어 존재하지 홀로 존재할 수도 없다.

 

2. 고정불변한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이 세상에 혼자서 독야청청할 수 있는가? 외부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고정 불변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붓다는 이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연기법에 따르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존재하므로 저것이 존재한다.”라고 한다. 이는 만물이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며, 나홀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하느님이라는 말도 해당될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하느님 브라흐마(Brahma, 전재성님 번역)는 한역으로는 범천(梵天)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하느님도 윤회하는 중생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존재 유형이 달라진다. 그런데 그는 너무 하나님으로 존재하므로 스스로 윤회하는 존재임을 망각했다. 이를 부처님이 깨우쳐 주기 위해서 신통으로 하느님 처소에 나타났다. 그러자 하느님 바까(Baka)는 이렇게 말했다.

 

“존자여,

나는 항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말하고, 견고한 것을 견고하다고 말하고, 영원한 것을 영원하다고 말하고, 홀로 완전한 것을 홀로 완전한 것이라고 말하고, 불멸인 것을 불멸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서 참으로 생겨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윤회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생겨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M49)

하느님 바까는 자신은 홀로 완전하며, 영원히 존재하며, 윤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이 세상에 어느 것도 나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나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있다면 이는 연기법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이런 생각을 “망상”이라고 하셨다.

 

3. 창조주는 존재할 수 없다.

 

창조주란 세상을 처음으로 창조한 자이므로, 제 1 원인(第一原因)이라고 할 수 있다. 유일신교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다. 그런데 붓다는 제일 원인이 되는 창조주를 다음과 같이 부정했다.

 

“하느님이여,

창조주를 창조주로 곧바로 알고 창조주가 창조주라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님을 곧바로 알고, 나는 창조주라고 생각하지 않고 창조주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창조주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창조주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창조주를 긍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여, 이와 같이 곧바로 아는 것에 관한 한, 그대와 동일하지 않은데 어떻게 내가 그대보다 열등합니까? 오히려 내가 그대보다 훌륭합니다.”(M49)

 

부처님은 창조주는 경험되지 않는 것, 즉, 나홀로 존재할 수 없는 자로, 연기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누군가 창조주, 하느님, 영혼, 자아 등을 말한다면, 이는 단지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것도 연기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므로 홀로 존재할 수 없고, 그 명칭만 주어졌을 뿐이다. 그래서 붓다는 창조주를 부정했다. 명칭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실체성이 없다 고 보았으며, 그래서 창조주에 대해서는 “나는 창조주를 긍정하지 않았습니다.”(M49)라고 했고, 하느님에 대해서는 “나는 하느님을 긍정하지 않았습니다.”(M49)라고 하여 홀로 존재하는 하느님을 부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상적 유형의 하느님은

“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이 뭇삶들은 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예전에 ‘다른 뭇삶이라도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바랬는데, 그러한 내 마음의 서원 때문에 이 뭇삶들이 여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D1)라고 말했다.

 

망상적 유형의 하느님이 있다면 망상적 유형의 중생도 있을 것이다. 이는

“이 존귀한 자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우리는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는 여기 먼저 태어난 자를 보았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D1)

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하느님 바까는 자신이 창주주라고 믿었지만, 그는 수명과 복이 다하여 색계 초선천에 떨어진 윤회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중에 태어난 존재들은 그를 창조주로 모셨다. 놀랍게도 초기경전을 보면 오늘날 유일신교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한 것이 실려 있다. 이는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 교리, 오늘날 유일신교의 그것과 비슷함, 에 대하여 비판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라흐마를 창조주 개념으로 보아 하느님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4.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을 할까?

 

강사는 계속 질문을 한다. 나는 누구인가?, 자아는 무엇인가?...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 불자라면 오온(五蘊)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내가 간다.”라고 말하면 틀린 것이고, “오온이 간다.”라고 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나’는 없다. 그래서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은 존재의 다발에 의해서 뭇삶이란 거짓 이름이 있다네.”(S5.10)라고 했다. 여기서 존재의 다발은 오온을, 뭇삶은 중생을 말한다.

중생이라는 거짓 이름이 있다면, 자아도 거짓 이름이다. 나라는 말이나 중생, 사람이라는 말은 관례상 붙여진 명칭에 지나지 않으며, 어떤 명칭도 실체가 없다. 있다면 오온의 연기적 인 프로세스만 있을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심오하고 심오하다. 특히 연기의 가르침이 그렇다. 어느 날 아난다가 연기법이 심오한 것에 대하여 찬탄하면서 “그러나 저에게는 아주 명백한 것으로 드러납니다.”(D15.1)라고 말했다. 이에 붓다는 아난다가 심오한 연기법을 다 이해한 것처럼 말하는 것에 대하여 나무랐다. 그래서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D15.2)라며 두 번 말했다. 부처님은 연기법에 대하여 “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는 깊고, 심오하게 출현한다.”(D15.2)라고 말했다. 누구나 연기법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면, 이와 같은 이 뭇삶들은 실타래에 묶인 것과 같이, 마름병에 덮인 것과 같이, 문자 풀에 엉킨 것같이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지옥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D15.2)

라고 말했다. 이 세상에 나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자아는 있을 수 없다. 누군가 아트만이나 영혼과 같은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강사는 “순수하게 분리된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조작입니다.”라고 말했다.

 

7. 자아는 소멸 대상이 아니다. 자아는 부정해야 한다.

 

고미숙 선생은 자아와 무아와의 관계에 대하여 “자아는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아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자아는 소멸 대상이 아니다. 나홀로 존재하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소멸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대신 부정해야 한다. 연기적 프로세스를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부정된다. 어떻게 부정하는가?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내가 있으면 반드시 내가 아닌 것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내가 있으면 내가 아닌 것이 있게 되어서 자아는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리고 무아에는 차별이 없다. 마치 이데올로기 없다는 말과 같다. 반면에 자아가 있다면 이는 차별이 있다는 말과 같다고 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이데올로기가 있다는 말과 같다.인도에 브라만교에서는 네 가지 계급으로 차별했다. 이렇게 차별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여러가지 있지만 그것은 자아 개념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순수한 자아개념이 있다는 것이 계급의 차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자아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인정하게 되므로, 편을 가르고, 배제하고, 혐오하게 된다. 오늘날 보수와 진보처럼, 그러나 무아를 말한다면 이데올로기는 사라진다. 주체가 없기 때문에 프로세스만 남게 된다. 그래서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로 인해 장사치가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고용인이 됩니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로 인해 제관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왕이 됩니다.”(Stn.651-652)라고 했다.

붓다는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한다.”(S7.9)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연기법에 이며, 카스트제도의 해체를 말하는 것은 무아사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무아사상은 어떤 이데올로기도 허용하지 않는다. 프로세스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누군가 정의나 평등을 외친다면, 이런 구호는 모두 이데올로기이다. 이 세상의 모든 구호는 이데올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가 자아에 기반한 집착이 되면 폭력적으로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의, 평등, 자유, 여성 등 온갖 구호가 있다. 그러나 자아에 기초하게 되면 집착이 되고 또 폭력이 된다. 내편과 네편으로 편가르기 하며 배제하고 혐오로 폭력으로 나아간다. 이는 애착과 분노,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5. 지혜와 자비는 어떤 관계일까?

 

그렇다면 지혜와 자비는 어떤 관계일까? 불교인들이라면 누구나 동전의 양면 같다고 말할 것이다. 지혜가 있는 곳에 자비가 있고, 자비가 있는 곳에 지혜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깨달음의 완성은 지혜와 자비로 나타난다. 그런데 고미숙 선생에 따르면 지혜와 자비는 모두 무아에서 나온다고 했다. 연기적 프로세스를 이해하여 무아를 체득하게 되면 지혜로울 수밖에 없고 자비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는 지혜와 자비가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고미숙 선생에 따르면 자아에 집착하면 자비, 유머, 기쁨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했다. 무아의 마음이 되었을 때 자비심도 있고, 유머도 있고, 기쁨도 있다고 했다. 무아일 때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있고, 동시에 무아일 때 자비심이 있다고 했다. 무아라야 진정한 자비심을 낼 수 있다. 숫따니빠따 자애경의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Stn.149) 처럼...

 

티벳불교에서는 누구나 한번쯤 나의 어머니가 아니었던 존재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의 출처는 니까야에 있다는 사실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일찍이 한 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S15.14)라고 했다. 어머니뿐만 아닐 것이다. 아버지의 경에서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일찍이 한 번도 한 번도 아버지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S15.15)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윤회하는 삶속에서 누구나 한번쯤 나를 낳아준 어머니였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누구나 한번쯤 아버지였을 것이고 형제였을 것이고 자매였을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일체중생에게 자비의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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