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브리프> 한국 발전주의의 변화와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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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3-11-07 09:33 조회1,139회 댓글0건본문
한국 발전주의의 변화와 지속
본 글은 대표적인 국가조정모델로서 1990년대 말 경제위기와 함께 본격적인 세계화의 흐름에 휩쓸리게 된 한국 모델이 2000년대 이후 어떻게 세계화에 적응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어떻게 단순히 과거 모델의 지속이나 해체가 아니라 ‘변화를 통한 지속’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밝히는 데 주목하였다. 최근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글로벌 정치경제 환경의 불안정성이 심화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세계화에 적응해 온 한국 국가조정모델의 경험이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탈세계화 시대,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1990년대 이후 수십 년간 우리는 경제와 사회, 문화, 심지어 정치까지 모든 영역에서 세계화라는 현상이 브레이크 없이 확산되고 심화되는 것을 목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화는 ‘하나의 최선의 방식’의 확산을 통해 세계인들의 보편적 진보를 낳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무엇보다 각 국의 주요 기업들은 과거 국내 생산과 해외수출에 기초한 ‘일국적 생산체제’에서 벗어나 국경을 넘어 생산요소와 가치사슬을 재조직화하는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를 형성해 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벌어진 국제 정치경제적 상황들은 기존의 반세계화 운동이 제기해 온 문제의 수준을 넘어 ‘세계화’ 자체의 효율성과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탈세계화’의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무역 및 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중 간 갈등, COVID-19과 같은 전 세계적 팬데믹 위기, 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 정치경제 환경의 불안은 세계화에 기초해 국경을 넘어 재조직화된 ‘최선의 효율적인 공급망’을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뜨리고 각국 경제의 후퇴와 불안을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상황들이 과거 일국적 생산체제로의 일방적 회귀를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들은 없다.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global production networks)는 그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이미 수십 년간 일국적 생산체제보다 더 효율적임을 입증해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계화에 내재된 불안정성을 어떻게 통제하고 조정할 것인가에 있다. 그리고 최근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은 이 문제에 대한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이 글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 맞닿아 있다. 이 글은 세계화가 가져오는 문제의 본질은 세계화로 인한 새로운 긴장과 갈등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에 있음에 주목했다. 실제로 생산의 세계화와 함께 진행된 개별 기업의 이익 추구를 위한 해외생산 및 해외아웃소싱의 과정은 국민경제 이익과 개별 기업 이익 간의 긴장과 갈등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세계화가 가져오는 이러한 새로운 긴장과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고 해결하느냐에 따라 세계화가 각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다를 수 있으며 그 조정의 방식도 나라마다 다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 글은 무엇보다 바로 대표적인 국가조정모델(statist coordination model)의 하나로서 한국 발전모델이 80년대 이후 본격화된 세계화 경쟁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적응해 온 그 역사적 진화의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세계화 시대를 넘어 탈세계화의 시대로 나아가는 이 시점에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글은 한국이 세계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국가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목표를 둘러싸고 주요 경제 부처의 정책 엘리트들이 벌인 갈등과 경쟁이 어떻게 한국 경제를 유연하게 재편하고 적응시켰으며 동시에 한국 국가조정모델을 지속시킬 수 있었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이론적 배경: 내생적 변화와 경쟁적 상호조정
세계화를 둘러싼 논쟁은 “세계화가 국민경제의 해체를 가져올 것인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왔다. 이 문제에서 핵심은 세계화의 보편적 효율성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 제도적 다양성이 지속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국민국가의 역할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먼저 지배적인 입장으로서 세계화 수렴론은 생산의 세계화와 강화된 자본의 이동성 등으로 인해 국가별 다양성에 기초한 역량은 상당 부분 제한되며 ‘하나의 최선의 체제’로 수렴한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global production networks) 이론가들은 세계화의 환경 속에서 비교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의 발전주의적 개입이 제한되어야 한다고 본다. 한편 이와는 반대되는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초국적 자본주의 관점 역시 세계화에 따라 국가가 약화될 것이라는 주장을 제시한다. 이들은 세계화와 전 세계적 자본 계급의 등장으로 국가 엘리트의 힘이 제한되며, 계급 갈등 역시 개별 국가의 범위를 넘어 확장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40여 년간의 역사는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가 일국적 수준의 생산체제를 훨씬 능가하는 효율성을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세계화론자들의 주장은 무시하기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을 비롯한 많은 경험적 사례들은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다양성을 지속하고 있으며 세계화로 인한 국민경제의 재편 방식과 효과도 나라별로 상이함을 보여준다.
반면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다양성은 지속될 것이라는 관점에서 고전적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발전국가 지속론은, 세계화를 비롯한 변화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국가기구의 응집성과 통합성, 자원의 동원 능력 등과 같은 제도적 역량이 유지되어왔으며, 이것이 하나의 역사적 유산으로서 경로 의존성과 제도적 관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발전국가 지속론의 주장은 국가 역할과 발전주의의 지속을 단순히 과거의 유산, 제도적 경로 의존성에만 기대어 설명함으로써 세계화와 같은 변화가 유발하는 국민경제의 새로운 갈등과 긴장을 어떻게 조정하고, 또 그 과정에서 어떻게 적응해왔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실제로 세계화가 국민경제에 부과한 새로운 긴장은 국민경제의 지속적인 혁신과 발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산업 공유재’(industrial commons)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유지할 것인가에 있었다. 산업 공유재는 기술인력과 교육 훈련 센터, 주위의 부품업체들, 기술 개발과 시험센터 및 연구소들 등 새로운 혁신적 기술과 상품의 개발에서 상품화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경제발전을 위해 주요 행위자들이 공유하는 보완재를 의미한다. 산업 공유재는 혁신 경제를 위한 필수 요소이다. 세계화는 국민경제의 주요 산업과 대표 기업들이 최적의 효율성을 찾아 국경을 넘어 생산을 재조직화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산업 공유재가 완전히 새롭게 재편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동적인 국민경제의 발전과 산업역량의 혁신을 가져오지 않았다. 미국, 독일, 일본 등의 사례를 살펴보면 각국은 서로 다른 조정 패턴을 가지며, 이에 따라 산업 공유재를 형성하는 방식과 결과 역시 차이를 나타낸다. 대표적으로 자유시장주의에 기초해 기업들의 자유로운 세계화가 진행된 미국은 2000년대 이후 심각한 산업 공유재의 상실을 경험하면서 혁신 역량과 혁신 산업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위기는 최근 미국 정부의 공격적인 보호주의적 기술 및 무역 정책을 뒷받침하는 주요한 경제적 토대가 되고 있다. 다른 한편 독일은 미국과는 다른 제도적 관행을 바탕으로 세계화로 인한 산업 공유재의 상실을 국민경제 주요 행위자들 특히, 기업과 노동조직, 지역 정부와 공적 연구기관 등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사회적 조정 과정을 통해 방어하고 동시에 새롭게 재구성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또한 한국보다 앞서 대표적인 아시아 발전주의 모델로 주목받았던 일본은 국가기구와 주요 기업 집단 간의 협력을 통해 세계화의 전체적인 과정을 조정하였다.
일본과 유사한 국가주의적 조정 방식을 채택해 온 한국의 세계화 과정 역시 국가에 의해 조정되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제도주의적 발전국가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한국의 세계화 과정은 단순히 과거 발전주의 모델의 관행을 지속함으로써가 아니라 세계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세계화가 요구하는 변화의 많은 부분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발전주의 모델 자체의 변화와 업그레이드를 수반했다는 데 있다.
본 글은 이러한 점에서 여러 발전모델의 이념형들(ideal types) 중 대표적인 국가조정모델로서 한국 발전모델의 역사적 진화 과정을 ‘변화를 통한 지속’(continuity by changes)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은 국가기구 내부의 높은 응집성에 기초해 발전국가, 특히 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의 경제적 성공을 설명해 온 기존의 발전국가론과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이론적 전제에 기초한다. 발전주의 국가의 내생적 변화는 두 가지 전제에 기초해 이루어진다. 첫째, 기존의 발전국가론이 주장하는 국가의 단일성과 응집성과 달리,국가는 단일한 행위자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다양한 이해를 가진 엘리트들이 포함된 복합적, 다원적 행위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 엘리트들은 주어진 상황에 대해 서로 다른 아이디어(ideas), 즉 서로 다른 창조적 해석과 전략을 제시하며, 이것을 정부의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경쟁하는 관계에 있다. 둘째, 엘리트들 간 갈등과 경쟁이 정책의 혁신과 높은 제도적 적응성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엘리트들 간의 경쟁적 상호작용은 혁신적인 정책의 개발을 촉진하며, 집단적 숙의를 통해 조정되면서 변화하는 상황에 대해 보다 효과적인 적응을 가능하게 한다. 본 글은, 한국이 변화와 적응 속에서도 국가조정모델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로 기존의 발전국가론이 주장하는 국가의 단일성과 응집성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다원적 엘리트 사이의 ‘경쟁을 통한 변화’(changes by competition)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밝힘으로써 이러한 전제의 이론적 타당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한국 발전주의 국가의 변화와 지속
그럼 한국의 발전주의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함께 본격화된 한국 발전주의 국가의 변화는 발전 전략의 방향과 수단의 전반적인 변화를 포함한다. 한국의 발전 전략은 투입 중심(input-oriented)에서 혁신 지향적으로, 대기업 중심의 배제적 연합에서 중소기업의 전략적 육성에 기초한 포용적 연합으로, 그리고 ‘경제 챔피언’을 만들기 위한 강력한 통제 정책에서 세금 인센티브와 비금융수단을 통한 간접적인 정책으로 변화해 왔다. 그리고 이 변화 과정은 국가 내 다양한 정책 기구와 엘리트, 그리고 민간 영역의 경쟁적 상호작용에 기초한 유연한 적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 발전주의 국가의 역사적 진화 과정은 크게 네 개의 시기로, 고전적 발전주의 국가의 형성(1960~1980년대), 발전주의 국가의 변화(전두환 정부 시기), 민주화 이후의 변화(노태우-김영삼 정부 시기), 외환위기 이후의 변화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박정희의 집권 이후 부각된 한국의 고전적 발전주의 국가는 대규모 자본투입을 통해 경제 챔피언의 역할을 해줄 대기업을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이를 위해 재정과 금융을 중앙화하여 통제하고 권위주의적 권력을 활용하여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투자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고전적 발전주의 국가는 수출 지향 산업화, 해외 차관의 도입, 불균형적·선택적 산업 육성을 주된 특징으로 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상공부와 경제기획원 간의 경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처음 상공부는 수입 대체 산업화를 주장하였지만, 이후 수출에 대한 자신감이 누적되면서 적극적인 수출 지향으로 입장을 선회하며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던 경제기획원과 갈등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후 1960년대 말 부채 누적, 안보위기, 선진국들의 보호주의 경향 증대 상황에서 산업 구조 전환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이 갈등은 더욱 두드러졌다. 경제기획원은 IMF의 기조를 수용하여 정부 투자를 축소하고 신중한 정책을 펼칠 것을 요구하였지만, 상공부는 산업기술적 관점에서 중화학공업화와 산업구조 고도화를 주장하였다. 이 갈등에 있어 경제기획원은 초반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의 외채 도입 시도가 지속적으로 실패하면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결국 1971년 대통령이 상공부의 손을 들어주면서 중화학 공업화로의 전환이 본격화되면서 석유 정제 공장, 비료 공장, 나프타 공장, 제철 공장 등이 활발하게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발전주의 국가는 첫 번째 변화를 맞이한다. 이 시기에는 고전적 발전주의 국가의 초과 투자, 높은 재벌 집중도, 과도한 국가 통제 등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따라 경제 자유화와 산업 전환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발전주의 국가의 성향은 유지되었는데, 선택적 지원을 통해 기업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한편 연구개발 지원을 크게 늘림으로써(2,860만 달러 → 23억 7천만 달러) 기술 집약적 산업으로의 전환을 만들어낸 것이 그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 전환 과정 역시 미국 출신의 자유주의적 경제 관료가 주축이 된 경제기획원 및 KDI와, 수출의 질적 성장과 보호주의를 주장한 상공부 및 재무부 간의 갈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정책 대안을 두고 경쟁을 벌였지만, 경제기획원 측은 세부 사항의 부족, 시장 실패의 가능성, 버마 사태로 인한 인적 구성 변화와 정책 방침 변화에 따라, 그리고 상공부 측은 변화하는 경제 상황 속에서 국가 개입 명분이 약화 되었다는 사실에 따라 서로의 대안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1980년대의 발전주의는 “자유화를 추진하지만, 국가 조정력에 대한 합의는 유지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민주화 이후에는 정부 개입의 여부 및 필요성을 둘러싼 정부-기업 간 갈등과, 경제 및 산업 정책 주도권을 둘러싼 경제 관료 간 갈등이 부각되었다. 노태우-김영삼 정부 시기 기업들은 기존의 투입 중심, 양적 확장 중심의 정책을 선호하였지만, 정부는 5‧8 조치와 같은 구조조정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업들의 역량이 커져 과거와 같은 무조건적인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정부는 G7 프로젝트(과학기술을 선진 7개국 수준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범국가적 개발계획)와 같은 연구개발 증대 전략을 통해, 기존의 양적 투입 위주의 발전주의에서 기술-부가가치 중심의 신발전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전환의 과정은 경제 관료 부처들 간의 갈등 속에서 진행되었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는 산업 구조 변화 방안을 두고, 김영삼 정부 시기에는 연구개발 역량 증진 정책의 주도권을 두고 갈등이 이루어졌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는 기업들을 특정 분야로 전문화해야 한다는 상공부의 주장과, 하나의 기업에 많은 기능을 부여하여 재벌 기업 수를 줄여야 한다는 경제기획원의 주장이 대립하였다. 하지만 기술집약적 전문화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상황에서 선택적 전문화와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유리한 상공부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김영삼 정부 시기에는 반도체 개발을 반대한 경제기획원의 입장이 삼성의 DRAM 개발 성공으로 약화되면서 상공부, 과학기술부, 정보통신부가 정책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의 주축으로 떠올랐다. 갈등의 다각화는 부처 간 중복과 과잉 경쟁 등의 문제를 유발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경쟁적인 정책 제시로 이어지며 기존 전략에서 결여된 부분을 자체적으로 보완하고, 각자의 관장 영역을 확정하며 기구 간 분업화가 보다 용이하게 됨으로써 한국의 발전주의 국가가 더욱 높은 적응성을 갖도록 하는 기반이 되었다.
1997년의 외환위기는 발전주의 국가의 효용성에 가장 큰 의문을 던졌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위기에도 발전주의 국가는 해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첨단 벤처 육성(미국의 경우 사적 시장에서 성장한 벤처와 달리 한국의 경우 국가에 의한 전략적 육성), 중소 부품업체 지원 등의 형태로 국가의 역할이 더욱 부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시기 국가-기업 갈등은 관료들이 주도권을 쥐고 기업 간 빅딜을 통한 통폐합과 전문화를 주도하였다. 정부 지침을 거부하던 대우의 붕괴는 결국 이 갈등에서 기업과 재벌들이 패배하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편 관료 간의 갈등은 중경회(中經會, 92년부터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 자문을 한 교수들이 발족시킨 개혁성향 학자들의 모임)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적 입장과 경제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산업중심적 입장이 대립하였으며, 특히 후자가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였기에 김대중 대통령은 이들의 대안을 수용하였다. 비슷하게 이전 시기부터 이어져 온 산업부, 정보통신부 등을 중심으로 한 다각적 경쟁 역시 계속되었는데, 이는 중복 투자 등의 문제를 낳기도 했지만 다각적 지원 체계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벤처 기업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2010년대 이후에도 발전주의 국가는 지속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차세대 성장동력 육성 전략,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등은 한국 정치경제 모델의 발전주의적 속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특히 이 정책들을 통해 2010년대 이후 발전주의 국가는 산업 생태계를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기반이 되어 왔으며, 이 역시 정보통신부, 산업부, 과학기술부 등 다양한 국가 기관들의 경쟁과 조정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다원적 경쟁과 수평적 상호조정의 지혜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국 발전주의 국가의 지속성은, 신자유주의자들이나 세계화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변화하는 세계화의 환경 속에서도 국가의 조정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국가만이 유효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국가의 적극적인 조정 역할을 위해서는 과거 발전주의 국가가 그대로 지속될 때가 아니라 반대로 “변화해야만 국가조정의 유효성이 지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세계화 과정에서 과거 박정희 정부 시기의 발전주의처럼 규모의 경제를 위해 투입요소를 집중화하려는 권위주의적 배제적 발전주의를 지속했다면, 그것은 현재 고부가가치 혁신 경제를 위해서는 오히려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 “변화를 통한 (국가조정모델의) 지속”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단절적 균형이론”(punctuated equilibrium theory)와 달리 외적 충격으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 내생적 진화로 설명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경제 정책을 형성하고 운영하는 데 있어 국가 내부의 다양한 정책 기구들이 경쟁해 왔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본다. 발전주의 국가의 진화를 설명하는 이러한 내생적 접근법은 기존의 세계화 수렴론과 경로 의존성에 기초한 발전국가 지속론과 달리 유사한 변화의 압력에 적응하는 개별 국민경제의 다양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실제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이었고 그것이 어떻게 해결되어 나갔는지, 그 실질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한국의 사례를 놓고 볼 때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다양한 정책 기구들이 경쟁에 참여하였음에도 이들의 경쟁이 상호 파괴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발전을 이루는 방향으로 조정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무엇보다 주요 경제 부처들이 자신들의 조직적인 생존을 위해 경쟁하면서도 동시에 국가 산업 경쟁력의 발전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대안을 가지고 경쟁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는 1960년대 수립된 한국 발전주의 국가가 형식적인 면에서 많은 변화를 거쳐오는 과정에서도 각 부처 관료들이 제시하는 서로 다른 경쟁적 아이디어가 수평적인 관계에서 적절히 숙의되고 조정되는 제도적 관행은 지속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수평적 조정의 기반이 있었기에 각 기구들은 자신들의 아이디어에 기초해 새로운 정책안들을 제시하면서도, 상대방의 주장을 이해, 학습하고 그에 맞추어 조정해 갈 수 있었다.
최근 글로벌 정치경제 환경의 변화, 이와 함께 한국 경제가 마주한 위기 상황에서, 지난 수십 년간 한국 발전주의 국가가 겪어온 부침과 적응의 과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그 지속성이 공유된 목표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의 표출과 수평적 조정을 통해 가능하였다는 사실은 경제의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데 있어 ‘어떻게 대안을 마련할 것인가’에 앞서 ‘우리가 공유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출처: <아시아브리프> 3권 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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