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행’이 아니라 ‘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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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8-02-23 13:34 조회4,340회 댓글0건본문
‘관행’이 아니라 ‘범죄’다
[연출가 이윤택, ‘성폭력’ 논란]
‘문화권력’ 쥔 거물의 열여덟해 동안의 여성 착취는 ‘권력형 성폭력’ 전형
피해자들 입 막은 ‘강간문화’ 뿌리뽑고 야만의 시대 끝내야
무대 위 ‘거물’은 무대 뒤에선 ‘괴물’이었다.
‘연극 거장’ ‘문화 게릴라’라고 불리던 연극연출가 이윤택(66)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19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상습 성추행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성폭행 의혹에 대해선 “합의된 성관계였다”며 부인했다. 낯 뜨거운 해명이었다. 열여덟해 동안 여성을 착취해온 ‘거장’의 민낯은 결국 두려움을 무릎쓰고 용기 낸 피해자들의 ‘말하기’를 통해 드러났다.
이른바 ‘이윤택 사태’는 ‘권력형 성폭력’의 전형이다. ‘권력’을 쥔 남성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여성들을 어떻게 착취하는지,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얼마나 공고한지, ‘관행’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강간 문화’(강간이 사회에서 용인되거나 정상으로 여겨지는 환경)가 얼마나 만연한지 보여준다.
이 연출가는 자신의 성추행을 “관행, 관습적으로 생겨난 나쁜 행태”라고 표현했다. 성추행이 연극계의 관행처럼 이뤄져왔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성폭력을 “관습”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범죄 의혹을 희석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연극계에서 벌어진 상습 성폭력은 ‘관행’이 아니라 ‘범죄의 일상화’라는 표현이 정확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윤택 사태’는 또 다른 유명인의 이름이 등장하며 연극계 ‘미투(#Metoo, 나도 같은 경험을 했다)’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피해자 상당수는 과거와 달리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고 구체적인 정황을 진술하고 있다. 이들은 도제 문화와 폐쇄적인 연극계 구조가 ‘가해자’를 낳고 ‘공범’을 키운다고 말한다.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는 14일 새벽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연출가가 과거 자신을 성추행했다고 가장 먼저 폭로했다. 김 대표는 이 연출가를 가리켜 “내가 속한 세상의 왕이었다”고 썼다. 또 다른 피해자인 이승비 나비꿈 대표는 이 연출가를 “왕같은, 교주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배우 김보리(가명)씨는 “이윤택은 저에게 연기를 가르쳐 준 선생님이자 제가 다녔던 대학교의 교수님이기도 했다.
단순한 연출자가 아닌 선생님이자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감히 쉽게 폭로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제왕적 권한을 가진 연출가의 요구를 쉽게 거부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다. 캐스팅 권한 뿐 아니라 ‘한 번 찍히면 연극계에서 생존하기 어렵다’는 폐쇄적 구조는 문제를 제기하는 일조차 어렵게 만든다.
실제로 안마 요구를 거절했다가 캐스팅에서 배제되는 불이익을 받았다는 주장도 나왔다. A씨는 JTBC 뉴스룸과의 인터뷰에서 “안마를 거부하면 전체 단원들 모아놓고 거부한 여자 단원을 두고 마녀사냥 하듯 그에 대한 안 좋은 점을 얘기한다”며 “그 전에 캐스팅된 것들이 모두 배제된다”고 전했다.
이승비 대표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성추행을 거부하자 “원래 7대3이었던 공연 횟수가 5대5로 바뀌었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며 “그날 (충격으로)공연을 못 하자 ‘공연 펑크 낸 배우’로 마녀사냥을 당했다. 모든 사람이 날 몰아세웠고 심지어 당시 남자친구도 연희단거리패였기에 모든 것을 묵인했다”고 주장했다.
연희단거리패 소속 배우과 스태프도 이 연출가의 성폭력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방조, 묵인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잇따른다. 이 연출가는 기자회견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일부 단원들은 끊임없이 제게 문제제기를 하고 항의했다”고 말했다.
내부에서도 이 연출가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는 정황이다. 더욱이 21일 연희단거리패 소속 남성 연출가가 내부에서 조직적인 은폐와 축소를 시도했다고 폭로했다. 오동식 연출가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윤택의 성폭행은) 사실이었고 그것은 강간이었다”며 연희단거리패가 이씨의 성추행 사과 기자회견에 앞서 사태를 덮기위해 조직적인 리허설을 가졌다고도 주장했다.
침묵한 선후배 동료들이 ‘괴물’을 키운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성폭력을 더 이상 묵인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성폭력을 관행이라고 말하는 ‘야만의 시대’는 저물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우리 사회가 묵인하고 용납하던 구태는 뿌리뽑고 ‘이성의 시대’로 나아가자는 여성들의 외침이다.
이번 사태가 문화예술계 전체로 확산되자 문화체육관광부는 20일 본격적인 대응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문화예술, 영화계, 출판, 대중문화산업 및 체육 분야를 대상으로 실태 조사를 실시하고, 3월부터 주요 분야별 신고·상담 지원센터를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문체부가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해결의 주체라는 점을 인정하고 직접 대응에 나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만 상담 지원센터 운영 방안이나 신고 접수 후 사건 처리와 징계 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지난해부터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온 여성문화예술연합 이성미 공동대표는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정책 방안이 제시됐다는 점에서 환영한다”면서도 “장기적인 대책은 있으나 최근 잇따른 사건에 대한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문화예술계 특성 상 사법 절차만으로는 구태 문화를 바꿀 수 없다”면서 “가령, 신고 상담 지원센터에 신고를 하고 문제가 드러난 가해자는 정부 지원사업에서 배제하는 식의 징계가 함께 이뤄지는 실효성있는 방안이 함께 모색돼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여성신문, 2018.02.21 이하나 기자 (lhn21@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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