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 [전환의 시대, 위로와 애도] 1) 관세음보살에게 치유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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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교와젠더연구소 작성일22-03-15 11:29 조회1,776회 댓글0건본문
위드 코로나 시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상실을 경험하며 불안과 고립을 경험하고 있다. 위로와 진심어린 애도가 절실한 시기다. 불교적 인식 아래 예기치 못한 질병이라는 재난 앞에서 어떻게 대응하며, 의도치 않은 이별과 상실에 어떻게 애도할 것인지 함께 이야기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①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 관세음보살에 치유를 묻다 - 옥복연(종교와젠더연구소장)
② 온 생명 평안하라. 오가는 모든 이에게도 축복 있으라 - 이미령(북칼럼리스트)
③ 나와 너, 우리를 치유하는 명상 이야기 - 김영란(나무여성인권상담소장)
④ 상실을 애도하는 불교적 방식 - 김성순(전남대 교수)
⑤ 코로나19를 통한 상실 애도하기 - 한혜원(불교환경연대 교육실장)
남해 보리암 법당벽화 사진=종교와젠더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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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렇게 잠에서 깨어나 살아 숨을 쉰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귀하고 얻기 어려운 인간의 몸을 지닌 나는 오늘 하루를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달라이라마존자의 아침 기도문 중 한 구절은 위드코로나시대에 더욱 와 닿는다. 격리 병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환자를 보며 무력감을, 예측할 수 없는 내일에 불안과 공포를, 갑작스런 가족이나 친지와의 이별로 인한 상실감을 마주하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인과응보니 착한 사마리아인이니 하는 종교적 가르침도 이전만큼 믿음이 가질 않는다. 착한 사람은 병에 안 걸리고 악한 사람이 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마스크를 쓰지 않고 손을 씻지 않으면 누구든 병에 걸리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에 광장이 닫히고 각자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민족이나 계급 등 과거 광장의 중심 테제가 가족으로 바뀌었지만, 가족들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다. 가족 간 친밀성이 강화되기 보다는 가족 내 학대가 증가하고, 돈과 행복을 동일시하면서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가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다. 자영업자들은 빚에 억눌려 고통을 호소하지만 플라스틱 공장은 쉼 없이 돌아가며 부를 축적하고, 무료급식소 긴 줄에 서 있는 노인과 명품 백을 사려고 백화점 앞에 새벽부터 줄선 젊은이가 대비된다.
부자 나라는 백신이 남아서 걱정이고, 가난한 나라는 백신을 구하지 못해 걱정이니, 만약 신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가혹하고 부자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듯하다. 종교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자유란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임에도 불구하고, 입시 기도나 사업 번창 등으로 끊임없이 탐욕을 자극하며 신도들을 끌어 모았던 기성 종교들도 거리두기로 인해 난감해한다. 이제 인류 역사는 기원 전후가 아니라 코로나 전후로 기준이 바뀌어야 할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코로나19로 인해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 또한 많다. 아마존 밀림을 불태워 공장을 세우고 개발이란 미명하에 욕망을 채우는 것이 행복의 척도였다면, 코로나19는 앞산에 오르면서 느낀 봄 내음이나 동네 뚝방 길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 군락을 보며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워 줬다. 이 지구는 인간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온 생명들의 공동체이며, 아무리 국경을 폐쇄하고 왕래를 막아도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이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거나 ‘신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추상적인 질문은 이제 큰 의미가 없어졌다.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보다, 유명 출가자를 만나기보다, 자기 내면의 영성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관심사가 됐다. 어떤 종교든 좋은 일을 하면 즐겁고 나쁜 일을 하면 괴롭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욕망을 채우기보다 욕망을 덜어내면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좋은 것은 좋다고 느끼고 신기한 것은 신기하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중요하게 됐다.
그러므로 이제, 종교는 탈세속이 아니라 세상 속의 윤리로 내려와 불안과 상실을 위로해주고 마음의 평온을 가져올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마치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세상을 굽어 살피며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헤맬 때, 한량없는 자애심과 깊은 연민심으로 그들을 구제하려는 관세음보살처럼.
“만약 온갖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백천만억 중생이,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그 음성을 듣고 모두 고뇌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고통 받는 중생을 외면할 수 없어 세상 속에서의 삶을 자처한 관세음보살은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과 함께 한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은 논에서 벼를 베는 여인으로, 생리대를 씻는 여인으로, 또 임신한 여인으로 나타난다. 쌀의 여신, 생명을 관장하는 여신, 생명을 창조하는 여신이다.
위드 코로나 시대에 삶과 죽음이 연기적으로 순환하는 수레바퀴 아래에서,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돌보듯이 모든 중생을 골고루 돌보는 자비로운 어머니 관세음보살을 통해 내 안의 영성을 만나보면 어떨까.
옥복연 종교와젠더연구소 소장
출처 : 여성신문(http://www.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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