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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갈리아는 일베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유일한 당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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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6-08-03 14:13 조회4,9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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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갈리아는 일베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유일한 당사자"


‘여자 일베’냐 아니냐는 의미 없어

그간 메갈리안의 활동에서 가장 논쟁점이 된 것은, “혐오에는 혐오로 대응한다”는 일부 메갈리안들의 입장이었다. 이는 사회운동에서 저항 세력의 논리와 대안에 대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보다 본질적인 화두는 20~30대 여성들의 성차별에 대한 분노를 공감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다.

내 또래의 40대 여성들은 지금 젊은 여성들과 같은 대중적인, 동등한, 현대 교육을 받았다. 여성들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고 배웠지만, 나는 동시에 (‘남존여비’에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그런 문화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들과 협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나는 여중·여고를 나와서 여학생이 9%에 불과한 남녀 ‘공학’ 대학을 다녔다).

지금 세대의 여성들은 규범적 평등과 실제적 차별 사이의 간극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세대다. 이들은 ‘우리’와 달리 참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는 이 넘을 수 없는 벽을 넘는 방식을 가르쳐주지 않았고(여성학 교육이 없었고), 남성 개인, 가족 제도, 국가는 변화가 없다.

이 상황의 가장 직접적인 변화가 저출산(만혼, 결혼 기피)이다. 이런 상태에서 이들의 문제의식과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온라인이며 에스엔에스 같은 매체이다. 이곳에서는 여성도 남성이 될 수 있다.

일베와 맞설 때 주먹이 필요할까. 페미니즘 이론이 필요한가. 아니면 중산층 여성성이 체화된 교양 있고 우아한 언어가 유용할까. 아니,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이제까지 메갈리아를 둘러싼 논쟁은 그들의 주된 활동 방식인 미러링(mirroring)에 관한 것이었다.

미러링은 글자 그대로 상대의 행위를 거울을 통해 되돌려 보여주는 것이다. 일종의 사상(寫像), 사진 찍어 ‘보내는’ 행위다. 그러므로 미러링 방식이 기대하는 효과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아, 내 행동이 그랬구나”라는 반성을 촉발하거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공감 능력이다.

그러나 메갈리아의 전략은 그들이 의도(인지)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일반적인 의미의 미러링이 아니었다. 일단, ‘메갈리아’의 뜻 자체가 노르웨이의 여성주의 작가 게르드 브란텐베르그의 가상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과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의 합성어다.

처음부터 이들은 그간 인터넷에서 남성의 세계와 언어를 지켜본 경험을 살려 그들 문화 속에 들어가, 나도 그 입장이 되어 보자는 게임에서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남성들도 겪어봐라”가 아니라 “우리도 그래 보면 저들이 어떻게 나올까”의 의미가 강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유명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처럼, ‘남자가 월경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가정(假定)의 세계다. 남자도 월경을 “해라”가 아니라 “한다면”이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얼마나 유세를 부릴까”와 같은 풍자의 의미다. ‘실제의 실천’을 제안한 것이 아니다.

메갈리아는 1983년에 설립된 ‘여성의전화’나 1984년의 ‘또하나의 문화’ 같은 전통적인 의미의 여성운동 단체가 아니다. 기존의 여성주의나 사회운동의 기준으로 보면 이들을 이해, 해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엉뚱한 전선에서 소모적 논의를 반복하게 된다.

이들의 목적은 대사회적 발언이나 구체적인 성차별의 피해여성 ‘구제’가 아니다. 지금 일부 메갈리안들의 미러링 언어는, 남자들 입장에서는 원래부터 자유롭게 했던 말들이다. 거듭 강조하면, 이제까지 남성의 여성에 대한 혐오를 돌려준다기보다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언어를 사용할 때 사회의 반응, 그 자체를 여성운동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꽃뱀”에 대해 “조ㅅ뱀”, “김치녀”에 대해 “조ㅅ치남”, “맘충”에 대해 “한남충”(한국남자蟲) 등이 그것이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메갈리안이 모두 여성일까” “일베가 모두 남성일까?”라고 질문한다. 이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모두 남성이라는 뜻이 아니다. 가까이는 지난 10여년 동안 인터넷 세계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 수천년간 여성에 대한 재현(‘지껄임’), 즉 남성의 말을 ‘복사’해서 사회에 ‘원본’을 보여준 것이다. 원본을 빼앗긴 혹은 무수한 원본이 돌아다니자 남성들은 당황, 분노하기 시작했다.

남성들에게 가장 공포는 여성의 자각이 아니다. 자신들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타인을 짓밟을 수 있는 쾌락의 언어와 맘껏 허용되었던 그 ‘권리’를 여자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좌절감이다.

철벽같았던 자기들만의 공간에 “이빨 세고 겁 없는 여자들”이 침입한 것이다. 게다가 일부이지만 자신보다 학력이 높고 고소득인 또래 여성이, 자신을 “조ㅅ뱀”이라고 불렀을 때 심정을 생각해보라.

메갈리아 활동에 대해 “여자 일베”라는 입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다”는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당연히 미러링은 성공하지 못했다. 성공할 필요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다.

이것은 메갈리아의 잘못도 실패도 아니다. 미러링이 성공하려면 성차별 현실을 인정하고 서로의 경험과 언어, 사회적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갑’인 남성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니다.

문제는(?) 이번 티셔츠가 원래 1천만원 정도의 판매를 목적으로 했다가 1억을 넘어 1억5천만원어치가 판매된 사실에서 보여주듯이, ‘예기치 못한’ 대중의 열렬한 지지다.

이는 그만큼 한국 사회의 성차별이 비상식적으로 심각했다는 뜻이다. 처음 출발과 달리, 메갈리아는 사회로 소환되었고 사회와 소통이 불가피해졌다. 책임이 부여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메갈리아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본다.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내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성차별 의식 없는 성차별 사회

 한국 사회 가부장제의 특징은 “가부장 없는 가부장제”이다. 한국의 남성성은 책임감, 부양자/보호자 의식, 자율성 등 전통적인 서구 백인 중산층의 남성성이 아니다. 제3세계나 피식민 지배를 경험한 남성성과 제국의 남성성은 같을 수 없다. 남성이 가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과 역할은 많을 수밖에 없다. 

이들 여성 중 몇몇은 미디어에 의해 과잉 재현되어 마치 모든 여성이 ‘출세’한 것처럼 보이고 남성은 여성 상위 시대(‘흑인 상위 시대라는 말이 가능한가’)라고 착각하게 된다. 가부장 없는 가부장제 사회의 특징은 성차별은 극심한데 여성운동은 복잡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남녀 임금 격차를 발표한 2000년부터 부동의 1위를 지켜왔다. 2014년도 역시 압도적 1위다. 한국 여성은 남성보다 36.7% 덜 받는다. 지난해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29개 조사국 중 29위를 기록했다. 세계경제포럼의 성차별 지수 역시 145개국 중 115위다. 

한국 여성의 교육 수준은 세계 1~2위인데, 노동시장 지위는 최하위권이다. 이 문단은 내가 노래를 부르는 내용인데, 많은 남성들은 한국에는 성차별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이번 사건, 앞으로 한국 사회를 전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미국에는 인종차별이 있다. 모든 미국인들은 인종차별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간에, 그런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때문에 인종 차별도 심하지만, 동시에 이에 대한 저항도 활발하며 사회 전반 고민과 문제의식도 깊다. 

의미 없는 말이지만, 미국의 인종차별이 우리의 성차별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 인식이다. 현실을 자각할 때 개선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한국 남성들은 규범적으로는 혹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여성차별에 반대하고 양성은 평등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성차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사회 구조적 제도로서 성차별의 심각성과 광범위성에 대한 인식이 없다. 여성문제는 언제나 ‘사소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여성운동에 대해서도 운동의 방법 등을 문제 삼아 실제로는 방관하거나 불편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차별에도 반대하고, 메갈리아에도 반대한다’는 이중적 언설이 가능한 것이다. 이는 일반인, 학계, 정치권, 시민사회 다 마찬가지다. 학문이 발전할 리 없다. 타자에 대한 인식이 없는데 어떻게 앎이 가능하겠는가.

 성차별이 작동한다는 의식(consciousness)이 없기 때문에, 많은 남성들이 그토록 자주 ‘실수’하는 것이다. 성차별주의자든 아니든 간에, 성차별이 있다는 의식이 있어야 미국처럼 최소한 공식 영역에서의 ‘n word 정책’(‘니그로’ ‘깜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조심’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러한 인식도 합의도 없다. 집권당 대표는 카메라 앞에서 흑인 유학생에게 “연탄”이라고 말하고, ‘오피니언 리더’들의 여성에 대한 발언과 행동에 나는 아직까지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남성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지적을 받거나 법적 처벌을 겪으면, ‘가해자의 피해의식’으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남성이 받는 대부분의 상처는 남성과 남성의 계급 차이 때문이다. 어쨌든, 이마저도 여성의 감정노동을 구입해서 해결하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말을 독점하는 사회. 이보다 끔찍한 공동체는 없다. 그래서일까. 여성이 술을 마시면 주로 울거나 신세한탄을 하는데, 남성은 일선 경찰의 최대 골칫거리 중 하나인 주취 폭력을 행사한다.

 “내가 누군지 알아!”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묻는다. 그것은 자기를 알고 싶은 무의식적 소망일지도 모른다. 정희진/여성학자

 

출처: 한겨레 2016.07.30 "메갈리아는 일베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유일한 당사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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