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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떠난 자리, 이준석이 온다 [정준희의 ‘미디어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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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5-07-21 09:06 조회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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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떠난 자리, 이준석이 온다 [정준희의 ‘미디어 레퀴엠’]

                                                                                                                      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

6·3 유권자 인식 ‘제멋대로’ 요약하면

이번에 내가 다루고자 하는 〈시사IN〉의 기사는 지난 2주에 걸쳐 대대적으로 지면을 할애한 대선 결과 특집이다(제927호와 제928호). 한국리서치와 공동으로 수행한 ‘6·3 대선 이후 유권자 인식 여론조사’에 바탕을 둔 분석이 담겨 있다. 〈시사IN〉이 이런 조사 분석 기사를 특집으로 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총선이나 대선 등 굵직한 선거나 사회적 이벤트가 끝나면 실증적이고 심층적인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꽤 탄탄한 기사를 냈다. 시사주간지라는 매체 특성에 걸맞은 기획이고, 대체로 꽤 의미 있는 정보와 통찰을 담고 있었다. 특히 지난 코로나19 국면에서 드러난 한국인의 사회심리적 기제를 공공 감각의 관점에서 다룬 연속 기사는 당장 사회조사 분석 논문으로 바꾸어도 좋을 만큼 상당한 심층성과 분석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번 유권자 분석은 그보다는 살짝 더 겉면을 훑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내란에 직간접으로 얽혀 있는 정치 집단을 여전히 지지하고, 우파 포퓰리즘적 갈등 정치에 동의하는 듯한 유권자층의 ‘판단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를 좀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다.

거칠게나마 그 내용을 ‘제멋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해당 기사가 실제로 이런 표현과 분석을 명시적으로 한 것은 아니니 유의해주시기 바란다.)  첫째,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 다수는 딱히 계엄을 지지하거나 내란에 찬동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민주당을 미덥지 못하다고 느끼고 이재명 후보에 대한 거부감이 큰데, 이들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므로 그들을 지지한다. 
둘째,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은, 같은 우파 성향에 근거를 두고 있기는 하나, 김문수 후보 지지자보다는 확연히 내란에 대한 반대 인식이 높다. 이준석 후보 지지자들은 민주당과 이재명을 제일 싫어하지만 국민의힘과 그 안의 세칭 ‘꼰대들’도 꽤 싫어한다. 셋째, 막상 김문수 후보를 지지하기는 했어도, 대선 결과가 나온 이후로는 ‘계엄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늘고 ‘부정선거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줄었다. 정상적 판단력이 완전히 망가져 있는 상태는 아니라는 뜻이다. 윤석열식 반민주적 태도가 정말 옳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민주당과 이재명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그때그때 무얼 행하고 무얼 주장하건 그 깃발 아래 똘똘 뭉쳐 있으려 한다. 이른바 ‘콘크리트’인데, 그 세력의 실체를 처음 확인케 해주었던 박근혜 시기보다 더 크고 단단해진 셈이다. 
넷째, 이준석 후보 지지자들은, 대선후보자 토론회에서 이준석 후보가 보여준 ‘망발’에 대해 약간의 문제의식을 느끼기는 하나, 크게 괘념치도 않는다. 그런 사고방식과 발언에 진심으로 동의하는 것 같은 이들도 적지만은 않고, 딱히 그 정도까진 아니라 하더라도 ‘이준석 부류의 망탈리테(mentalité: 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을 모두 아우르는 집단의식/무의식)’에 공감하는 성별성(주로 남성)과 세대성(주로 젊은 층)은 명백히 존재한다.

다시금 말하지만 내 비평이든 외부 비평이든 특정 언론사(들)의 저널리즘에 대한 내용적 비평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해 가타부타 세밀한 비평을 하지는 않겠다. 굳이 하자면 부정보다는 긍정, 깎아내리기보다는 추켜세우기에 훨씬 더 가까운 선에서 멈추겠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이런 자료와 분석을 토대로 무엇이 더 탐색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제언이고, 그 자체로는 아직까지 실증 데이터로 뒷받침되지 못한 보완적 사유를 풀어놓고자 함이다. 이를 위해 망탈리테와 아비투스(habitus: 습성으로서 체현된 사고)라는 다소 어려운 프랑스어 개념을 사용하려 한다. 망탈리테는 위에서 먼저 슬쩍 언급했으니 이번엔 아비투스를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주창한 개념인 아비투스는 이미 단단해져 어지간해서는 깨지지 않는 어떤 행위 양식을 가리킨다. 윤석열의 계엄 선포라는 정치적 헛발질, 그러나 대단히 위험한 반헌법적 행위에 대해서 우리 국민 대다수가 ‘강력히’ 반발할 것이며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혹은 전제를 깔고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이들은 6개월간 이어진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 국면에서 표출되었던, 2017년 박근혜 탄핵과 조기 대선 국면에 비해 확연히 더 결집된, 반민주 반공화적 우파의 기세를 보고 놀라고 또 좌절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정말 “총 쏴서라도 문 부수고 (계엄 해제 의결을 위해 본회의장에 모인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했다던 윤석열에게 동의하는 이들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계엄 선포에 긍정적인 답을 했더라도 정작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진심으로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내란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김문수 지지자라 하더라도 국회를 무력화시키는 게 딱히 못할 일은 아니라고 내심 여길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들이 ‘헌법적 사유’에 의해 판단하고 움직이는, 민주공화정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최우선 순위에 놓는 사람들, 즉 ‘공화적 시민’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헌법은 정파보다 상위에 있고 정파는 헌법적 가치 아래에서 분화된 정치적 입장이라는, 교과서적인 정치학에 의거해 (혹은 그런 기대를 품고) 설명할 수 있는 심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이들에게 정치는, 헌법과 법률에 의해 구속받지 않는 어떤 ‘힘’ 그 자체이며, 필요하다면 헌법과 법률을 넘어서라도 행사해야 하는 정의다. 그런 면에서 이들 가운데 다수는, ‘비상대권’이라는 시대착오적 사고를 운운했던 윤석열식 사유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들에게 ‘절차적 민주주의’는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형식이라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요식행위’가 아니라, 대충 지키는 척하면 된다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요식행위다. 언어의 타락 과정은 그걸 뒷받침하는 ‘본심’의 표현이다. 요식행위라는 말을 현재의 활용법으로 만든 주체들이자,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며 아비투스를 형성해온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망탈리테와 아비투스 사이

다른 한편, 이준석 부류의 망탈리테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은 이제 막 부상 중이며, 이번 대선을 계기로 드러나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했다. (자신들의) 정치가 헌법과 법률에 구속받지 않는 힘이자 정의라는 구세대 우파와 달리, 이들 신세대 우파는 오히려 스스로를 ‘비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의힘이건 민주당이건 다 구식 정치에 찌들어 있는 정파라면, 그걸 혐오하고 깨부수고 싶어 하는 자신들은 정파로 정의할 수 없는 어떤 (온당한) 태도이다. 헌법과 법률 같은 형식적 요건을 중시하기 때문에 민주적 절차성에 대한 감각은 구세대 우파보다는 훨씬 높다. 그러나 이들은 법치(rule of law)를 주창한 몽테스키외의 주저 제목인 ‘법의 정신’ 가운데, 형식으로서의 법은 중시하지만 내용으로서의 정신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특별히 법으로 규제되지 않는 거라면 무얼 하든 문제시될 것이 없다고 본다. 자유, 평등, 연대와 같은 인본주의적 상식에 의해 자신과 사회의 행동이 문화적으로 조율되는 것에 대해 거추장스러워한다. 지극히 자기본위적 자유에만 치중하여, 평등이나 연대는 그런 자유를 억압하는 구세대의 위선이라고 본다.

이걸 아비투스라 하기보다 망탈리테라고 표현했던 건, 아직은 체화된 굳건함보다 세상을 보는 미숙한 태도에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아비투스와 망탈리테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망탈리테가 아비투스를 형성하고, 육체와 행위의 영역인 아비투스에 의해 정신과 의식/무의식의 영역인 망탈리테가 유지되기도 한다. 또 둘 다 단기적인 현상보다는 장기 지속적인 환경에 의해 구조화된 질서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김문수 지지로 표현된 구세대 우파는 장기 군사독재 시기에 형성된 망탈리테를 유지하며 도통 변하기 어려운 아비투스로 이어진 한편, 이준석 지지로 표현된 신세대 우파는 민주화 이후 2000년대 신자유주의 국면을 거치면서 형성된 새로운 망탈리테의 정치 주체화라고 할 수 있으되 아직 아비투스로까지 견고화되지는 않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번 〈시사IN〉 기사에서 ‘각 집단의 지지 밀도 차이’로 언급된 내용과도 상응하는 진단이다. 전자가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진 콘크리트라면, 후자는 시멘트와 모래를 섞어 물을 부어 반죽하기 시작한 모르타르(mortar)인 셈이다. 이 모르타르에 자갈이 더 넣어지든가, 그 반죽을 틀 안에 부어 모양을 갖추는 쪽으로 가면 꽤 단단한 아비투스로 완성되어, 이후 수십 년 이상 우리 사회를 규정할 기본 구조로 자리를 잡게 된다.

망탈리테는 장기 지속적 사회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아비투스는 그것이 반복적으로 습성화되어 육체와 행동에 각인된 결과물이다. 망탈리테를 깨려면 사회환경을 바꾸어야 하고, 아비투스의 형성을 막으려면 습성화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나는 현대사회의 망탈리테를 자극하고 연결하는 주요 환경 중 하나이자, 현대적 아비투스의 형성에 핵심 인자로 등장한 것이 바로 미디어 이용 습성이라고 생각한다. 지극히 개인화된, 분노를 자극하는, 연결과 단절이 자유로운, 익명성과 다중 정체성이 가능한 스마트 미디어 환경, 그리고 그것의 습관적 이용으로 형성된 단속적(斷續的: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는) 미디어 아비투스.

2000년대 중반에 거의 동시에 등장했던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의 결합으로 이러한 사회조직화 메커니즘이 작동되기 시작한 지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전적으로 새로운 한 세대의 형성에 충분한 시간이 경과됐으며, 그동안 기성세대가 각각 갖고 있던 망탈리테와 아비투스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은 조건이 성숙됐다. 2022년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 이후 이번 조기 대선까지의 3년은 구세대 우파와 신세대 우파의 이런 미디어 아비투스가 어떤 사회 정치적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헌정질서 자체가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에도 어떤 정치적 선택과 의지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집단적으로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무엇에 주목하고 무엇을 바꾸어야 할까? 또 다른 불쾌하고 당황스러운 체험을 위해 낭비할 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출처: 시사인 202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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