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32만명의 딸들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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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교와젠더연구소 작성일22-02-02 16:31 조회1,723회 댓글0건본문
1954년. 전국에서 32만여명의 딸들이 태어났다. 정확히는 그보다 더 많은 아이가 출생했겠지만 통계는 없다. 1955년 실시된 인구주택총조사의 1세 여야(32만4018명)로 추정할 뿐이다. 1953년 정전협정 직후, 출생신고가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때였다.
1954년. 전국에서 32만여명의 딸들이 태어났다. 정확히는 그보다 더 많은 아이가 출생했겠지만 통계는 없다. 1953년 정전협정 직후, 출생신고가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때였다. 책보를 든 국민학교 어린이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또 다른 ‘정애씨’들의 삶
▶️참고 기사 [젠더기획]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그들은 ‘1950년에 태어난 1954년생’ 손정애씨와 비슷한 모습으로 태어나고 자랐고 나이 들었다. 전쟁 직후 혼란과 엉성한 행정 속에서 자란 것, 서울 아닌 경상도에서 태어나 경상도 아닌 서울에서 일해온 것, 10대부터 시작된 노동이 진행형인 것이 그렇다. 그때는 서울보다 경상남도 인구가 더 많았는데, 0~4세 여아도 경남(29만459명)이 서울(10만8194명)의 2.68배였다. 65세 이상 여성 133만명은 국숫집에서, 아파트 복도에서, 텅 빈 강의실에서, 또는 누군가의 집에서 취업 중이다. 정애씨의 호적상 친구들, ‘54년생’ 딸들의 궤적을 통계와 숫자로 쫓았다. 곳곳에서 평생을 노동과 함께한 정애씨의 모습이 보였다. 이들의 삶은 통계청 인구총조사·한국통계연감·경제활동인구조사·인구동향조사, 문교부 교육통계연보, 노동청 직종별 임금조사결과보고서와 임금구조기본통계조사보고서 등을 통해 복원했다. 언론보도와 연구논문도 참조했다.
1950년대에는 ‘영숙’이라 불리는 딸들이 가장 많았다. 정애, 순자, 영희도 숱했다. 꽃부리 영(英), 맑을 정(晶), 순할 순(順), 사랑 애(愛) 자 같은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상이 곧 이름이 됐다. 어떤 딸들은 이름부터 차별받았다. 말순, 종숙, 후남, 끝순 등은 모두 ‘다음에는 아들을 낳자’는 바람이 반영된 이름이었다. 1950년대 합계출산율은 6.3명, 한 집에 자녀 수가 5~6명은 됐는데 딸들은 아들 없는 집에서는 눈칫밥을, 아들 있는 집에서는 식은 밥을 먹으며 자랐다.
학업은 여러 의미로 ‘좁은 문’이었다. 54년생 딸들이 대부분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던 1961년, 26만7333명이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전국 5264개 학교, 3만9342개 교실에 385만4779명의 학생이 있었다. 한 학급에 학생 98명이 들어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2부제, 3부제 수업도 했다. 학교를 계속 다니지 못하는 딸들도 많았다. 54년생이 6학년이던 1966년, 4040명의 여학생이 국민학교를 중퇴했다. 가장 많은 이유는 빈곤(2073명)이었고, 기타(1659명), 질병(279명), 결핵(29명) 순이었다. 장기결석자는 6466명이었다. 그해 한 해만 유급(상위 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남는 것)하는 국민학생이 1만7000명에 달했다. 유급하는 학생, 늦깎이로 온 학생, 등교하지 않는 학생들이 혼재하던 때였다. 1961년 1학년 입학생과 1966년 6학년 졸업생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다.
1960~1970년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서는 학생 수에 비해 학교·교실이 부족해 2부제·3부제 수업이 표준이었다. 사진은 1960년대 초반 국민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경향신문 자료사진1967년 국민학교를 졸업한 여학생 36만556명 중 16만7011명만 중학교로 진학했다. 졸업생 절반 이상이 중학교를 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등학교 진학도 어려웠다. 1970년 중학교를 졸업한 여학생 11만6244명 중 인문계·실업계 고등학교 진학생은 7만9938명이었다. 197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학생은 4만4330명으로 또 반토막 났다. ‘장남에게 부담주지 말아라’ ‘남동생에게 양보해라’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거들어라’ ‘여자가 재주 많으면 안 된다’ 등 그 시절의 상식으로는 여학생이 학업을 그만둘 이유가 차고 넘쳤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의 문턱이 그물처럼 딸들을 교육에서 걸러낸 이유들이다. “(공부를) 그만둔 게 항상 후회된다”는 회한은 정애씨만의 것이 아니다.
학교 대신 공장으로
학교를 못 간 딸들은 일터로 갔다. 54년생 딸들이 16세가 되던 1970년, 15~19세 여성 147만6000명 중 65만1000명(44.1%)이 경제활동인구였다. 15~19세 여성 10명 중 4명이 일하고 있거나, 일할 의사가 있었다는 뜻이다. 전체 여성 취업자 중에서도 15~19세의 비중이 가장 높아, 여성 노동자 6명 중 1명꼴로 10대 노동자였다.
54년생 10대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 전략은 가발·합판·섬유·신발·전기제품 같은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중심으로 설계됐다. 열악한 작업장의 10대 여성 노동자들은 베니어합판으로 대충 나뉜 기숙사에서 출퇴근 구분 없이 일하거나, 타이밍(잠 깨우는 각성제)을 먹어가며 저임금·장시간 노동으로 산업을 떠받쳤다. 대접은 달랐다. 여성 노동을 보는 시선부터 차별적이었다. 1971년 1월13일 인력개발연구소가 작성한 ‘한국의 여성인력의 현황보고’를 보면 그 시절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설문조사에서 남성 경영자의 70%는 ‘남성의 능력이 여성에 비해 우월하다’고 답했다. 여성 경영자의 40.5%는 ‘여자와 남자가 같다’고 했고, 36.5%는 ‘여성이 열등하다’고 했다. 보고서에는 “직장 여성의 특성을 조사한 결과 가사에 소홀하고 사치하는 편”이라는 표현도 실렸다. 급여 차는 당연했다. 1970년 남성 재봉공(4576명)의 평균 임금이 1만4950원일 때 여성 재봉공(2만2349명)은 9460원을 받았다. 딸들은 이 돈을 아껴 생활에 쓰고, 남는 돈을 고향 집으로 보냈다.
여성의 초혼 연령은 1975년에 22.8세, 1981년에 23.2세였다. 만 23세가 되는 1977년에 많은 54년생 딸들이 혼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애씨처럼 연애를 통해 이뤄진 결혼을 당시에는 자유혼이라 불렀다. 1981년 신고된 혼인 중 35%가 자유혼이었고 나머지는 중매혼이었으니, 정애씨는 꽤나 신식 결혼을 했던 셈이다. 1980년대 여성의 첫 출산 평균 연령은 23~24세였다. 1977년 23세에 결혼한 54년생 딸들은 1980년 26세에 이미 어머니가 됐다는 뜻이다. 1980년의 합계출산율은 2.82명이었으니, 정애씨처럼 54년생 어머니 대다수도 두 아이 또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고 볼 수 있다. 말띠(1978년생), 양띠(1979년생), 원숭이띠(1980년생)의 어머니 중 다수가 54년생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휴일 없이 매일 12시간 ‘가사·육아’ 노동
결혼·출산·육아기의 여성들은 일터를 떠났지만 노동은 멈추지 않았다. 임정빈 한양대 명예교수(1980년과 1990년 도시주부의 생활시간 비교, 1992)의 연구를 보면 1980년 주부들의 가사노동시간은 평일 평균 11.8시간, 휴일 평균 12.4시간이었다. 통계는 가사·육아를 생산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한다.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마이크로데이터를 활용해 54년생 어머니들의 ‘온전한’ 노동을 복원해봤다. 1953~1957년생(5세 단위) 여성들로 조사 대상을 정하고, 시기별로 이들의 취업자 수, 가사·육아를 이유로 한 비경제활동인구를 파악했다. 가사·육아 비경제활동인구가 취업자 수에 더해지자 130만명대 언저리에서 규모가 유지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김난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여성은 없다. 이를 경제활동과 노동의 범주에 넣는다면 모든 여성이 경제활동인구며, 취업자고, 노동자였다”고 말했다.
학교 갈 나이가 된 아이들은 손이 덜 가지만 돈은 더 든다. 54년생 여성들은 서른 초중반(1985년 전후)부터 일터로 복귀했다. 54년생이 서른하나가 된 1985년, 30~34세 여성 취업자는 63만9000명으로 다시 늘어, 15년 전 청계천·구로공단에서 일하던 10대 노동자만큼의 숫자를 회복했다.
임금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1995년, 40~44세 여성 취업자의 절반(45.1%)이 서비스 근로자 및 상점과 시장 판매 근로자였고, 5명 중 1명(16.9%)이 단순노무직 근로자였다. 남성 서비스 근로자가 월 급여 103만7444원을 받을 때 여성은 66만5952원을 받았다. 단순노무직도 40~44세 남성 근로자는 82만8014원, 여성 근로자는 53만9500원을 벌었다. 여성은 더 긴 시간을 일했지만 직장을 다닌 기간이 짧았고 돈은 덜 받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들은 노동자였다
54년생 여성들은 나이 마흔 중턱에서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일은 남녀 모두 했지만 “돈은 남자가 번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당연한 듯 여성이 먼저 일터에서 내몰렸다. 1998년 정리해고 등의 이유로 고용보험 자격을 상실한 27만명, 금융보험업(여성 20.9%, 남성 13.5%)·제조업(15.7%, 12.1%) 등 모든 부문에서 남성보다 여성 상실자 비중이 높았다. 40~44세 여성 실업자는 1997년 1만8000명에서 1998년 5만4000명으로 3배 증가했고 실업률도 1.6%에서 4.8%로 급등했다.
1999년 6월 한국여성단체연합·한국여성민우회 등 여성단체들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여성 노동자에게 집중된 조기퇴직·감원 조치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일자리가 없어진다고, 돈 나갈 곳이 줄지는 않는다. 정애씨의 자녀들처럼, 1998~2000년은 54년생 여성들의 말띠·양띠·원숭이띠 자녀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다. 54년생 여성들은 졸라맨 허리띠로 부족해 식당·마트·공장을 찾아다녔다. 정애씨가 옷가게를 접고, 국숫집을 시작한 시기에 40~44세 숙박 및 음식점업 여성 임금근로자 수는 10만7600명(1998년)에서 11만2700명(1999년)으로, 도·소매 및 소비자용품 수리업 근로자는 6만7300명에서 7만9100명으로 늘었다. 40~44세 여성 임금근로자 중 임시·일용직 비율은 68.9%(1995년)에서 76.87%(2000년, 45~49세 여성)로 뛰었다.
54년생 여성들은 쉰 살 이후 빠르게 제조업에서 밀려났다. 2004년 50~54세 여성 취업자 중 16.4%가 제조업에 종사했는데, 2013년 55~59세 여성 근로자 중 제조업 종사 비율은 11%였다. 50대 여성 종사 비율이 빠르게 오르는 산업군도 있다. 건물 청소·유리창 세척·화장실 위생 서비스 등이 포함된 사업시설 관리 및 사업지원 서비스업, 방문간호·재가 요양서비스·방문 목욕서비스 등이 포함된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이다.
54년생 딸들은 10대에 여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20대에 엄마가 돼 가사노동을 도맡았다. 30대에 다시 공장에서 일했다. 40대에 외환위기를 겪으며 비정규직이 됐다. 50대 이후부터 청소·요양·간병 등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했다. 그들은 나이 육십을 훌쩍 넘긴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있다.
장은교(젠더데스크) 이아름·심윤지(플랫) 조형국·이수민(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 이하늬(정책사회부) 이준헌(사진부) 최유진(뉴콘텐츠팀) 김윤숙(교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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