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 도나 해러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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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1-11-04 09:41 조회1,898회 댓글0건본문
인간 넘어 ‘함께-만들기’가 길이다
이분법 질서 해체해온 도나 해러웨이 새 ‘선언’
땅속 여러 존재들의 ‘촉수적 연결’ 함의하는 ‘쑬루세’ 제안
기후위기와 생태 파괴에 맞선 ‘공-산’의 ‘실뜨기’란?
베일라 골든샐이 그린 ‘실뜨기/끈이론’(Cat’s Cradle/String Theory·2008). 캔버스에 유채. 26쪽 이미지는 이 그림의 일부이다. 실뜨기에서 패턴을 만드는 능동과 상대에게 패턴을 내미는 수동은 거의 동시적이고, 주고받는 패턴은 계속 릴레이된다. 도나 해러웨이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서로 이런 관계 속에 놓여 있다고 보고 이런 주체와 대상의 역동성을 실뜨기로 형상화한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도나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l 마농지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는 대형 화재, 대홍수, 이상기온, 대기오염…. 극지대의 거대한 빙하는 빠른 속도로 녹아 사라지고 바이러스 감염병은 주기적으로 대유행하고 있다. 열과 불, 물과 공기, 전염병이 지구를 재앙으로 몰아넣고 있다. 누구 책임일까? 과도한 화석연료 사용과 무분별한 개발의 주체는 인류다.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지질시대가 제안된 이유다. 도나 해러웨이(78)도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이 용어(인류세)를 계속 써야 할 것 같다”고 인정하지만 ‘종으로서의 인간’보다 인류가 만들어낸 자본주의, 이윤 추구의 강력한 힘인 ‘자본’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자본세’(Capitalocene)를 거론한다. 인류세와 자본세는 지구가 맞이하고 있는 위기를 규명하는 데 일정한 구실을 하지만 한편으로 이를 극복하는 주체 역시 인간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중심주의’에 갇혀서는 ‘이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데 어려움에 빠져들게 된다. 해러웨이는 이때 ‘쑬루세’(Chthulucene·지하세)라는, 낯설고 기이한 명명을 꺼내든다. 쑬루세는, 그리스 신화에서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지옥의 신 타르타로스 사이에서 태어난 크토니오스의 ‘크톤’ (khthon, 땅을 의미)과 ‘피모아 크툴루’(Pimoa cthulhu)라는 거미의 학명을 바탕으로 조어됐다. 이는, 땅속(크톤)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연결망(거미의 기다란 다리, 혹은 촉수처럼)을 가리킨다. 인류세가 땅 위, 하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위계적 지배라는 뜻을 깔고 있다면, 쑬루세는 땅속 존재들의 ‘촉수적 연결’을 함의한다. 유일하고 중요한 행위자가 아닌 인간은 지구의 다양한 거주자(크리터)들과 “연대를 통한 함께 살기와 함께 죽기”에 나서야 한다.
해러웨이는 학부에서 동물학·철학·문학을 전공하고 생물학사·생물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학에서 과학사와 여성학을 가르쳐온 페미니즘 사상가이자 생물학자, 과학학자, 문화비평가다.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융합적 사유의 대가는, 제임스 러블록이 제창한 ‘가이아 이론’과 린 마굴리스의 ‘세포내공생설’을 바탕에 깔고 “인류세에서 분출하여 또 다른 충분히 큰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또 다른 형상”과 “수많은 이름을 가진 다른 무엇” 들을 소환하여 쑬루세를 제안하는 것이다.
앞서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1985)에서 인간과 기계가 연결된 존재임을 페미니즘 시각으로 보여주고, <반려종 선언>(2003)을 통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의 생명체 간의 관계를 드러냈다. 이런 개념 도구를 통해 남성/여성, 문명/야만, 인간/동물, 자연/인공, 유기체/기계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질서를 해체하는 전복적 사고와 융합적 사유로 페미니즘 이론을 확장해왔다. 해러웨이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인 ‘공-산’(sympoiesis)은 반려종의 세속성을 표현하는데, ‘함께(sym) 만든다(poiesis)’는 뜻이다. 사람과 개의 관계를 떠올려보라. 사람도 개에 길든다! 장인과 도구, 식물과 햇빛, 물, 땅속 균류와 영양소의 관계도 그렇다. 인간 몸의 90%는 박테리아 등 미생물이다. 그러니 ‘공-산’은 ‘공-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해러웨이는 끊임없이 ‘실뜨기’(string figure)를 형상화한다. 실뜨기는 혼자 할 수 없다. 주체와 상대가 끊임없이 바뀌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어진다. 실뜨기를 계속해도 결과를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한쪽에서 놓아버리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다. ‘공-산’과 ‘공-생’을 이루는 주체와 대상의 역동성을 실뜨기가 보여준다. 쑬루세는 결국,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반려종들 간에 벌이는 실뜨기의 지질시대다. 그러나 실뜨기는 쉽지 않다. 절망(비관주의)에도, 낙관(기술지상주의)에도 굴복해서는 실뜨기를 이어갈 수 없다. 문제투성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러블’ 그 자체는 비관도 낙관도 할 필요 없다는 점에서 “살기와 죽기 모두에 관한” ‘응답 능력’(response-ability)을 키워야 한다. 그러므로 ‘트러블과 함께하기’가 방향이다.
해러웨이는 스스로 포스트휴머니스트(posthumanist)가 아니라 퇴비주의자(compost-ist)라고 강조한다. 인문학(humanities)보다 퇴비학(humusities)이 더 중요하다는 ‘언어유희’로, 퇴비 속에 서로 연결되어 실뜨기하고 있는 미생물과 동물과 식물 등 크리터들의 미시생태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의 관계는 혈통이나 계보, 생식과 관련 없다는 점에서 ‘친척’(kin)이라고 규정한다.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Make Kin Not Babies)는 선언이 나온 배경이다. 해러웨이는 실천적 지침도 제시한다. ‘함께 만들기’(공-산) 방식으로 이뤄진 ‘과학-예술 세계 만들기’로, 로스앤젤레스의 실뜨기연구소가 주도하는 ‘산호초 코바늘뜨기 프로젝트’, 마다가스카르에서 과학자·예술가들이 연대해 진행한 ‘아코 프로젝트’, 이누피아트 에스키모들의 ‘스토리-만들기’에 집중하는 ‘네버 얼론’ 컴퓨터 게임 프로젝트 등이다.
아울러 이 책 5장 ‘카밀 이야기’는 해러웨이 자신의 사유를 과학소설(SF) 기법으로 구체화했다. 무엇보다 이 책 저술 자체가 ‘공-산’의 실천적 결과다. 본문만큼 긴 주석들을 통해 자신의 사유가 어떤 실뜨기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 읽기는 ‘공-산’의 실뜨기에 참여하는 과정이다. 정형적 독서는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고 독서 과정은 끊임없이 험난하고 막막하지만, 곳곳에서 순간순간 부풀어 오르는 영감을 느끼게 된다. 창의적 실뜨기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상징과 은유가 가득한 신화·과학·철학·문화적 글쓰기의 산만함은, 이 복잡한 퇴비의 세계에 거주하는 크리터로서 불가피한 일이며 또한 서사적 풍요로움의 다른 면모이기도 하다.
한겨례신문, 2021-08-06 09:30 김진철 기자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06667.html#csidxb045dd032248ce99d9a0c10cf572e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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