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바라나시의 성지 조성과 사원 건축: 여성의 후원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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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25-06-18 12:07 조회40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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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 소개: 신희륜 박사는 뉴욕 주 바드 대학 미술사와 시각문화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예일대학교에서 인도미술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근대 인도의 시각문화와 물질문화를 중심으로 문화 교류와 이동성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바라나시는 바나라스, 베나레스 등으로도 불리나 바라나시가 1956년부로 정부 지정 공식 명칭이다. 바라나시는 성스럽고, 예스러운 신비로움 등의 이미지가 강하며 이는 힌두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모디 정부에 의해 그러한 정체성이 더 강해지는 양상이다. 그 결과 성지에서 관광지로 변하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라나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공간이 되었다. 바라나시 강변에는 힌두 사원들이 늘어서 있는데, 18-19세기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지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선 바라나시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바라나시는 갠지스 강변에 위치한 도시로서 남쪽으로는 마라타 연맹, 동쪽으로는 동인도회사, 북쪽으로는 델리를 잇는 상업적 중심지였다. 그러자 사람이 몰리고, 건설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는 마라타 연맹의 가문들이 바라나시 사원 건설에 후원을 하면서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되며, 이미 18세기 이전부터 마라타 연맹에서 바라나시로의 인구 이동은 시작되었다. 이러한 마라타 연맹 가문의 후원은 건설과 성지순례의 붐을 유도하였다.
주목할만한 점은 바라나시 성지의 조성에서 여성 후원자들의 이름도 드러난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비슈바나트 사원은 아힐리야바이라는 여성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아힐리야바이는 홀카르 왕조의 왕비였으나, 남편과 아들이 일찍 죽어 통치자가 되었다. 이후 인도 전역에 걸쳐 종교 후원 활동을 진행하였는데, 과부라는 정체성을 잘 활용하여 종교적 이미지를 잘 형성하였다는 평을 받는다. 아힐리야바이와 같은 과부들은 수도원 설립에 후원을 많이 하였고, 수도원 간 네트워크를 잘 활용해서 경제적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바라나시는 경제적 요충지이자 금융 허브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아힐리야바이가 후원한 건축물들은 겉모습만 보면 통일성이 크지 않다. 따라서 건축물의 내부를 관찰해야 하는데, 사원 내부에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두었다는 공통점이 드러난다. 이는 그녀가 종교적 이미지와 동시에 종교를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양면적인 모습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바라나시 성지의 18세기 양식은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동기가 복잡하게 작동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의 건축 양식에는 전통적 힌두 사원 특유의 양식과 함께, 무굴 제국의 양식도 함께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칸다리야 마하데바 사원 등에서 돌출벽 등 힌두 양식이 드러나는데, 자갓 시로마니 사원, 고빈다 데바 사원 등에는 돌출벽과 무굴 제국 양식이 모두 드러난다. 남아있는 부분을 통해서 비슈바나트 사원도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복고적인 힌두 양식 외에도 세부 장식, 아치, 기둥 주초 등에서 무굴 제국의 양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발표가 끝난 후 청중들의 질문이 이어졌고, 신희륜 박사는 정성을 다하여 답변하며 세미나를 마무리지었다.
출처: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2025 SNUAC WEEKLY (6월 셋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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