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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참아카데미] 이중표 교수-불교의 이해와 실천5. 불교의 진리: 사성제(四聖諦)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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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9-02-21 10:49 조회1,3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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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개혁행동 '참'아카데미] 

 

2019년을 맞이하여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배우고 토론하는 자리

 

 

이중표 교수와 함께하는

불교의 이해와 실천 

 

[5강] 불교의 진리: 사성제(四聖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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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목적이 해탈, 열반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하나 이는 추상적 관념이죠.

불교의 실제 목적이자 진리는 ‘사성제’입니다.

사성제 (고집멸도) 속에서 해탈, 열반을 논의해야합니다.

불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것은 ‘사성제(四聖諦)’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중요합니다.


 

 

고성제(苦聖諦)란 어떤 것인가?

태어남이 괴로움이고, 늙음이 괴로움이고, 죽음이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불안이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괴로움이라오.
요컨대 오취온(五取蘊)이 괴로움이라오.

 

현실적으로 느끼는 괴로움들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오취온’이란 나라고 붙잡고 있는 것이고 즉, 자아를 뜻합니다. 몸을 나라고 부르지만 몸이 가지고 있는 일정한 형태를 말하는데 이는 색(형태적인 모습)이고, 젊었을 때 나와 나이들어서의 내가 다른 건 색(형태)가 변화한 것이죠. 오온의 색은 시각에 비치는 색이 아니라 우리가 그 형태를 다른 형태와 구분되는 '나'의 형태로 붙잡고 있는 것을 '색온'이라고 부릅니다. 신체적 구조를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면서 나타나는 감정을 '수'라고 부릅니다.

 

이 몸은 나도 아니지만 내 것도 아니다.

몸 속에 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 속에 몸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할 때 ‘나’는 실제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나'라는 말은 다 다르며 다섯가지 구조 속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다. 이를 빼놓고 보면 ‘나’는 없기에 부처님은 '오온' 속에서 나를 찾아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통찰을 통해 다섯 가지를 살펴보아도 나를 찾을 수 없고 긍정될 수 없다면 '나는 없다.' 이를 ‘무아’라고 나타냅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오온을 통해 통찰하고 관찰한 것이 무아이고,

우리의 현실 속에서 가장 핵심적인 고통은 ‘나’이고 고통은 없앤다는 건

'나'라는 ego를 지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취온(五取蘊)은 어떤 것인가?
색취온, 수취온, 상취온, 행취온, 식취온이라오.

색취온(色取蘊)이란 어떤 것인가?
사대(四大)와 사대(四大)를 취하고 있는 형색(色)이라오.

사대(四大)란 무엇인가?
지계(地界), 수계(水界), 화계(火界), 풍계(風界)라오.


*사대

 

 

사대의 숫자는 생산해서 증가하지 않으며 객관적 공간 속에 존재하는 실체.  

 

 

 

 

사대 →사계로 환치하여 부처님이 쓰신 ‘사계’는 불에 타는 연료로 '취하다, 집착하다'의 의미를 지닌 동사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사대들이 취해져서 색온이, 색이 된다를 나타냅니다.

 

 

 

 

 


 

계는 경계, 층을 나타내며 의식적으로 분류하지 않으면 '계'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계’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세상에 모든 것은 의식이 개념적으로 종류별적으로 했을 때 분류되는 내용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의 실체는 인간들이 의식적으로 구분해놓은 것임에 지나지 않음을 뜻합니다.


 

지계는 어떤 것이든 각자 안에 있는 단단한 상태를 취한 것이라오.


안에 있는 지계와 밖에 있는 지계, 이들 지계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
이와 같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
(通察智)로 통찰하고서,
지계를 염리하고, 지계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오.


지계, 단단하다고 부르는 것들 (내 몸 안에 든 뼈, 피 등)은 지각된 내용으로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이것이 지계다.'라기는 보다 지계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이 이름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불린다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나, 나의 몸을 붙잡지 말고, 붙잡으니 괴로움이 생기기에

우리가 그에 대하여 염증을 내고 멀리하고 마음을 두지 말라는 부처님 말씀입니다.

 

 

이것이 무상고 무아열반 '수행'입니다.

 


 

갈망하는 마음에 의해 취해진 초로 같은 몸을 가지고,
'나'라거나 '내 것'이라거나, '내가 있다'라고 할 수가 있겠소?
이 점에 관해서는 '아니다'라고 해야할 것이오.

 

 

'나에게 발생한 청각경험에서 생긴 이 괴로움을 느끼는 마음은 분명히 의지하고 있지,
독립적으로 있지 않구나.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경험을 의지하고 있구나.'

그는 '경험은 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느끼는 마음은 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생각하는 마음은 무상하다.'는 것을 관찰하고, 
'조작하는 행위들은 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분별하는 마음은 무상하다'는 것을 발견한다오.

그래서 마음이 통찰의 대상이 되는 계에 도약하여,
확신을 가지고 확고하게 머물면서 몰입한다오.

 

 

비구들이여, 양쪽에 손잡이가 있는 톱으로 비열한 도적들이 사지를 차례로 잘라낸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마음이 타락한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


'그러므로 나는 물러서지 않고 힘써 정진하겠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주의집중에 전념하겠다.

...


부처님을 생각하고, 가르침을 생각하고, 승가를 생각해도,

좋은 의지처가 되는 평정한 마음이 확립되지 않으면,

그는 그로 인해서 동요하고, 두려움이 생긴다오.

탐진치


...

내 몸에 몽둥이질을 하고, 칼질을 하도록 내버려두자.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어떤 사람이 톱으로 나의 몸을 잘라내더라도 악심을 갖지 말고 자비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위빠사나에서 있는 그대로, 마치 구경하듯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교리는 이처럼 어려운 것이죠.

이것이 생사해탈.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해야 하는 삶에 만족하고 충실함을 나타냅니다. 불교의 수행이고 자비입니다.

 

 


경험을 통해 느낌이 쌓이고 즐거움이 생겼고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집니다.  

결국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은 촉을 통해 늘어납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이 변화하려면 행동이 변화해야하고, 행동이 변화하려면 마음이 변해야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실천을 동반해야합니다.

이해를 하더라도 형성된 의식은 형성한 대로 움직이기에 통찰을 통해 내가 이해한대로 움직이는지 주의집중이 필요합니다.

주의집중을 하게 되면 어떤 대상에 집중하는 '삼매'에 들게 되고,

위빠사나(통찰,관찰)를 통해 알아차림이 생깁니다.

 


'내 몸에 몽둥이질을 하고, 칼질을 하도록 내버려두자.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도덕적, 윤리적 기준으로 아니지만 위 비유대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수준까지는 주의집중과 깊은 수행이 동반되기에

부처님의 말씀이 따르고 지켜나가기에 그토록 어렵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형색(色)은 색취온(色取蘊)에 모이고,

그렇게 형성된 느끼는 마음은 수취온에 수집되고,

그렇게 형성된 생각하는 마음은 상취온에 모이고,

그렇게 형성된 조작하는 행위들은 행취온에 모이고,

그렇게 형성된 분별하는 마음은 식취온에 모인다오.

'참으로 이들 오취온은 이와 같이 모이고, 집합되고, 결합된다.'라고 통찰하여 안다오.

 

 


세존께서는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보고, 법(法)을 보는 자는 연기(緣起)를 본다."라고 말씀하시었소.

... 오취온은 연기한 것들이라오.

오취온에 대하여 욕망, 애착, 호의, 탐닉이 있는 것이 고집(苦集)이며,

오취온에 대하여 욕탐을 억제하고, 욕탐을 제거하는 것이 고멸(滅)이라오.

비구가 이 정도가 되려면 많은 수행이 필요하다오.

 

 


색취온과 관련하여

 

우리들에게는 다섯가지로 형성되어있는 자아의식이 있는데 이 자아의식은 망상덩어리입니다.

이 망상덩어리는 우리의 삶, 경험을 통해서 신체적 활동, 지각활동을 통해서 일어나는 감정, 생각, 의지, 의식들이 계속 쌓이면

덩어리가 되어 신체적 자아의식을 형성함을 말하며, 실제로 공을 깨닫고 살아가는 삶에서 이런 것들을 사라집니다.  



앞서 살펴본 내용들은 고집멸도를 통해 수행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괴로움이 나타나서 사라지는 현실’

 

사성제는 다른 말로 하자면 연기법입니다.

괴로움은 연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괴로움은 실재하지 않고 조건이 나타나면 나타나기에

이와 반대로 그 조건이 사라지면 사라짐을 뜻합니다.

 


‘연기’를 봐도 ‘사성제’와 맞물려 보고 삶 속에서 통찰하고 깨달아가는 과정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연기학’은 상호적으로 연계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원인과 결과가 논리적으로 선관계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는 같이 존재하고 분리해서 볼 수 없다고 보셨죠.

 

 

함께.


 

싸리뿟따는 회의론자의 제자였는데 혹시 내가 모르는 진리가 있지 않을까 싶어 부처님을 찾아 갔고

5강에서 함께 살펴 본 경(맛지마-니까야 28)의 내용들은 사리뿟따 존자와 관련된 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경입니다.


살아가고 있는 현실세계와 맞물려 보았을 때 특히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처님의 말씀들이 많았던 경이었습니다.

위 경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 등 종교계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약자가 겪는 고통에 대하여 눈을 감아야하는 건지 

이중표 교수님과 나누는 토론 자리에서 열띈 질의응답이 오고 갔습니다.


이중표 교수님은 말합니다.

세존은 가장 낮은 곳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윤리적,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어긋나는 것들에 대하여 눈을 감자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그러지 않도록 노력해야하고,

위 내용들은 개인적 수행과 관련된 자세로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더 근본적인 것에 집중하여 함께 병행하고 정진함을...

부처님의 정신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해가고 그러한 모습을 키워가자는 것이죠.

 

 

 

 


질의응답을 통해 일방적인 소통이 아니라 이중표 교수님 포함 참여하시는 분들 모두 느끼는 바가 많은 자리였습니다.

 

앞으로도 남은 강의 시간동안 서로 의견을 주고 받으며 새로운 시각을 덧대어 갈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출처: 이중표 교수와 함께 하는 '불교의 이해와 실천' 자료집 pp.39-43 및 강의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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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개혁행동 담마발전소 ‘참아카데미’에서 2019년을 여는 첫 강좌로 ‘이중표 전남대 철학과 교수와 함께하는 불교의 이해와 실천’이 개강했습니다. 우리함께 빌딩 2층 문화살롱 기룬에서 1월 15일부터 3월 26일까지 설연휴를 제외하고 매주 화요일 저녁 7시에 열립니다.

 

 

이중표 교수는 초기불교 전문가이면서 대승불교 경전을 바탕으로 다양한 강의를 통해 붓다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열린 토론과 함께 소중한 도반들과 만나는 뜻깊은 시간을 가집니다.

 

 

총 10강으로 마지막 강의까지 빠지지 않고 참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부득이하게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서

불교아카데미 / 불교개혁행동 영상을 업로드할 예정이니 지속적인 관심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

 

강의 공지 ▼

http://cafe.daum.net/bsge/dyOX/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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