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참아카데미] 이중표 교수-불교의 이해와 실천8. 대승불교의 이해: <금강경(金剛經)>을 중심으로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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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9-03-14 12:55 조회1,307회 댓글0건본문
[불교개혁행동 '참'아카데미]
2019년을 맞이하여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배우고 토론하는 자리
이중표 교수와 함께하는
불교의 이해와 실천
[8강] 대승불교의 이해: <금강경(金剛經)>을 중심으로
대승불교는 심하게 왜곡된 부분을 비판하고 실천적 의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승한 불교이다.
무비판적으로 아비달마불교를 따르는 것은 위험하기에 이중표 교수님은 대승경전을 니까야로 봅니다.
금강경을 중심으로 대승불교가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가
잠깐 살펴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대승불교는 불멸후 500년 경에 아비달마불교를 소승이라고 비판하면서 나타난 사회적인 실천운동이다.
초기 대승불교에서는 반야부 경전(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경전-'통찰하는 지혜로 저 언덕에 간다')을 통해 아비달마불교를 비판한다.
반야부 경전은 '열반은 반야, 즉 통찰하는 지혜를 통해 성취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경전이기 때문이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반야용선'으로 '반야는 괴로운 이 언덕에서 행복한 저 언덕으로 건네주는 배와 같은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22. Alagaddupama-sutta (독사 비유의 경), 벌유경-뗏목의 비유 경
'이 뗏목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하여 안전한 언덕으로 올라왔다.
나는 이 뗏목을 땅위에 올려놓거나, 물에 띄워놓고 갈 길을 가야겠다.
부처님은 뗏목은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강을 건너기 위해 존재하듯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라고 설법하셨다.
부처님은 열반을 저 언덕에 비유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고 있다면
열반으로 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무엇일까?
맛지마-니까야 111. Anupada-sutta
비구들이여, 싸리뿟따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멀리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멀리하고,
사유하고 숙고하여, 멀어짐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하여 머물렀다오.
...
즉, 사유, 숙고, 기쁨, 즐거움, 마음집중, 촉, 느낌, 생각, 의도, 욕망, 확신, 정진, 주의집중, 평정, 작의,
이러한 법들이 그에게 연속하여 나타났다오.
"이와 같이 지금 나에게 여러 법들이 없다가 타나났고, 있다가 없어졌다."
그는 그 법들에 집착하지 않고, 빠져들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한 마음에 머물렀다오.
두 번째 선정, 세 번째 선정, 네 번째 선정에 차례로 도달하여 머문 싸리뿟따.
싸리뿟따는 일체의 비유상비무상처에 대한 관념을 초월함으로써
상수멸에 도달하여 머물렀고, 통찰지로 통찰하자, 번뇌들이 멸진했다오.
싸리뿟따가 계, 정, 혜 (戒定慧) 삼학을 닦아 열반에 도달하는 과정을 구차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불교의 '계(戒)'와 '정(定)'에는 항상 '혜(慧)'가 수반하고,
마지막에는 '정(定)'에서 나와 반야, 즉 통찰지로 통찰함으로써 모든 번뇌가 소멸한다.
열반은 선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정에서 나와 반야로 통찰함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반야부 경전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열반은 '벗어남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을 말한다.
대승불교가 이처럼 반야바라밀을 주장하게된 시대적 배경은 선정 속에서 열반을 구하고 있었던 아비달마불교때문이었다.
현실을 직시하고 지혜로 통찰하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진정한 불교이고,
열반이라는 것이 초기 대승불교운동가들의 주장이다.
B.C 3세기경,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승려들이 승원에 머물며 불교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 논쟁을 일삼은
이 시기의 불교를 아비달마 불교, 부파불교라고 부른다.
금강경(金剛經)을 통해 대승불교는 부파불교에 대한 반성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인도에서 금강경(金剛經)을 만든 사람들은
불교의 목적이 아비달마불교에서 추구하는 개인의 성취, 즉 아라한이 아니라,
중생구제를 위하여 함께 가는 삶,
보살승에 있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깨달음을 향해서 함께 나아가는 사람들, 보살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할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수보리 존자의 깨달음은 부처님께서 한 끼의 밥을 구하기 위해 맨발로 일곱 집을 들려 밥을 빌고 나서
돌아오신 후 비구들에게 하신 설법,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에서 나타난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경은 다음과 같다.
맛지마-니까야 85. 보디 왕자에게 설하신 경
세존께서는 융단을 밟지 않으십니다.
여래는 가장 낮은 사람을 바라봅니다.
시인 박노해, 버마에서 탁발하는 스님들을 보고 쓴 글
일곱 집을 돌아도 밥그릇이 차지 않으면 가만히 돌아와
이렇게 모자란 밥을 먹으며 가난한 민중의 배고픔을 함께 느낀다.
<구도자의 밥>
부처님께서 맨발로 다니는 까닭은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함이고,
일곱집을 차례로 들리시는 것은, 주린 배를 채우는 것보다 그들의 삶을 살피시기 위함이다.
돌아와서 식사를 마치고 명상 속에서 생각하시는 것은
어떻게하면 중생들이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는 가르침은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그 길을 함께 가도록 가르쳤고, 그 가르침을 부촉하신 것이다.
"부유한 승원에 앉아서 이론을 만들어 논쟁하고,
자신이 깊은 선정에 들어 아라한을 성취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인가?"
"우리는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부처님께서 부촉하신 길을 가야한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가르치고 부촉하신 그 길,
즉 보살의 길을 함께 가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금강경은 논쟁과 분열을 일삼는 아비달마불교를 향해,
개인적인 열반을 추구하면서 논쟁에 빠져있는 것은 불교의 전통이 아님을 선언한다.
부처님께서 진정으로 마음에 두신 것은
개인적 열반을 추구하는 아비달마불교가 아니라
중생제의 큰 원을 세워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의 길을 가려고 하는 보살마하살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촉을 받들여
"어떻게 살고, 어떻게 실천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잡아야 할까?"
이것을 밝히는 것이 금강경의 취지이다.
금강경은 초기에 등장할 때 반야바라밀을 강조합니다.
반야바라밀은 '지혜의 완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통찰하는 지혜로 저 언덕에 건너 간다'(피안)를 의미하는데
이는 열반, 괴로움의 소멸을 나타냅니다.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교가 존재하는 것이고
생사는 괴로움이고, 열반은 괴로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불교 공부를 통해 다 없어진 자리가 열반입니다.
계정혜 삼학을 실천하는 것이 불교공부의 목적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돈을 잘 써야 부자가 되고, 보시를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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