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참아카데미] 이중표 교수-불교의 이해와 실천10. 불자(佛子)의 삶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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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9-03-29 16:51 조회1,292회 댓글0건본문
[불교개혁행동 '참'아카데미]
2019년을 맞이하여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배우고 토론하는 자리
이중표 교수와 함께하는
불교의 이해와 실천
[10강] 불자(佛子)의 삶
겨울에 이중표 교수님을 만나 따뜻한 봄날이 되어 어느덧 3월의 마지막 강의입니다.
강의가 끝난 후 그 동안의 만남에 감사드리며 불교의 이해와 실천에 관해 못다한 질문과 이야기가 오고가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오늘뿐만 지난 강의들을 통해 앞으로 불자로서, 불교를 어떻게 가까이 하며 살아가야할 지
스스로 되돌아보며 물으며 삶의 방향성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돈벌이가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해 살아가는 것이 ‘원’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이 모두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내 주변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내 삶이 아름답고 행복해짐을 아는 것이 ‘자비’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겠다는 삶의 목표(지혜)를 세우고, 삶의 주인이 되어 팔정도로 바르게 살아가는 삶을 지속하며,
자비와 지혜로서 붓다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불자의 삶이겠죠.
‘지금, 여기’를 놓치면 우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being이 아니라 to be, 여기 있음에 충실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다보면 있는 것도 다른 이에게 주면 (탐이 사라지면) 욕심에 얽매이지않기를...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불자(佛子)는 부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아들은 부처님의 법을 상속받아 이를 후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불자가 있기 때문에 불법은 이어지는 것이다.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쳤는가? 부처님은 무아(無我)와 공(空)과 연기(緣起)를 중심으로 四聖諦를 가르쳤다.
우리는 사성제를 개인적인 의미와 사회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사성제를 개인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개인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되고, 사회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된다.
사성제를 개인과 사회, 두 가지 측면에서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바람직한 불자의 삶을 제안하고자 한다.
(1) 삶의 주인이 된다.
부처님이 깨달아 가르친 가르침은 주인으로 사는 삶이다. 붓다는 자신의 삶을 통해 무아를 실현하신 것이다.
붓다의 죽음을 예상한 아난다 존자는 붓다에게 붓다의 사후에 교단을 이끌어갈 후계자를 정해줄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디가-니까야 16. Mahā-Parinibbāna Sutta
"이제 그대들은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고, 다른 사람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 진리(法)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귀의처로 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고 살아가도록 하라.”
붓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이 경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깨달아서 중생들을 제도하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큰 교만인가를 이 경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미 붓다가 깨달아서 숨김없이 가르친 진리가 있는데, 우리가 다시 깨달아야 할 진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할 일은 붓다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붓다가 가르친 진리를 스스로 실천하는 일이다.
붓다는 열반에 이르는 길을 깨달아 알려주는 안내자일 뿐이며, 그 가르침에 따라 길을 가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내가 깨달았으니 너희들은 나를 따르라.’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진정한 붓다가 아니다. 교단을 권력화하여 교단의 힘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도 불교가 아니다. 불교는 초인적인 지도자를 추종하는 종교가 아니라, 먼저 깨달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각자가 스스로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열반을 성취하는 종교라는 것을 이 경은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붓다는 각자가 주인으로서, 평등한 존재로서 평화롭게 사는 법을 가르쳤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주인으로 사는 것인가? 진정한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이 될 것인가? 무엇을 소유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은 탐진치에 속박된 삶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이다.
내 주변의 환경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삶 속에서 ‘아상我想’이라는 망상을 제거할 때 우리는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맹목적으로 붓다를 추종하기보다 삶의 주인이 된 사람에게는 붓다의 가르침마저도 강을 건넌 후에는 버려야 할 뗏목이다.
자신이 세운 원(願)을 실현하기 위하여 지혜로써 무아를 자각하고 자비로써 자타의 구별이 없는 동체자비를 실천하는 삶이, 자신이 스스로 세운 원을 실현하는 삶이기 때문에, 주인으로 사는 삶이다.
(2)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는 주역이 된다.
원은 스스로 세우는 삶의 목표로 불자는 사성제의 원리에 따라 자신이 처한 사회의 문제를 바르게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원을 세워 살아감으로써 주인으로서의 삶을 성취할 수 있다.
산업자본주의로 인한 물질만능주의로 변질된 사회에서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삶이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산업시대는 결국, 이 위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데 실패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1)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안녕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그것은 또한 행복의 길도 아니며,
최대의 쾌락으로 가는 길조차도 못된다.
(2) 우리 삶의 독립적 주인이 된다는 꿈은 우리의 사상, 감정, 취미가 정부와 산업,
그리고 이들이 지배하는 매스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조종되며,
우리는 모두 관료적 기계장치 속의 톱니바퀴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우리의 눈이 뜨이기 시작하면서 끝나 버렸다.
(3) 경제적 발전은 부국에만 국한되어 왔고, 부국과 빈국 사이의 간격은 계속 넓어져 왔다.
(4) 기술적 발전은 생태학적 위기와 핵전쟁의 위험을 만들어 냈으며, 이 중 어느 하나,
혹은 이 둘이 합세하여 모든 문명, 어떤 경우에는 모든 생명에 종지부를 찍게 할지도 모른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현대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전제하고,
나아가 새롭게 출현해야 할 새로운 인간의 성격구조를 열거하며 인류는 ‘사성제’에 의해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 완전하게 <존재하기> 위하여 모든 형태의 소유를 기꺼이 포기할 것.
(2) 지금 존재하고 있는 곳에 완전히 존재할 것.
(3) 탐욕과 미움, 환상을 될 수 있는 한 줄이도록 노력할 것.
(4) 비판적이고 냉철한 사고 능력과 더불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킬 것.
(5)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현실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
(6) 자기 자신을 알 것. 알고 있는 자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는 자아까지도 알려고 노력할 것.
(7) 모든 생명이 자기와 하나임을 인식할 것.
프롬이 원하는 인간은 불교에서 지향하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는, 어느 곳에서나 주인으로 존재하며, 탐(貪)․진(瞋)․치(癡)를 여의고,
지혜와 자비를 성취해 가는, 끊임없이 정진하는, 참된 자기를 찾는,
자타불이(自他不二)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이 프롬이 기대하고 있는 새로운 인간인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많은 선각자들이 인류가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이 불교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제 불교는 인류 생존의 희망으로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3) 역사창조 주역이 된다.
역사는 흐른다. 우리의 삶은 다음세대에 의해 이어진다.
불교가 역사 속에서 지속되기 위해서는 다음세대에 불교를 전하는 일이 필수적이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불교를 다음세대에 전하기 위해서는 절에 가서 불상 앞에 절하고 복을 비는 법회가 아니라
현대사회에 걸맞도록 불교사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공부하고 수행하는 법회가 요청된다.
(1) 이와 같은 법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불경(佛經)>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불경이 없다. 따라서 불경의 번역과 편찬에 힘을 모아야 한다.
(2) 새로운 형태의 법당(法堂)이 있어야 한다.
불상 중심의 법당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법문을 듣고, 수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법당이, 우리의 삶의 주변에, 마을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법당이 만들어져야 한다.
(3) 법회를 봉행할 수 있는 법사(法師)를 양성해야 한다.
승려만이 아니라 재가자 가운데서도 불교를 전공하고 수행을 익혀서 대중을 지도할 수 있는 법사를 양성하는 불교대학을,
정부의 인가와 상관없이, 우리 불자들이 인정하고 재가자들이 할 수 있는 불교대학을 만들어야 한다.
(4) 고령화 사회에 노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노인복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 자신이 늙어서 가야 할 양노원이나 요양원을 우리가 힘을 모아 우리의 마음에 맞는 형식으로 만들어서 행복한 노년을 준비해야 한다. 요양원은 노인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면서, 가족들이 찾아오는 공간이기 때문에 요양원을 통해서 폭넓은 포교가 가능할 것이다.
*출처: 이중표 교수와 함께 하는 '불교의 이해와 실천' 자료집 pp.73-78 및 강의 내용 참고
불교개혁행동 담마발전소 ‘참아카데미’에서 2019년을 여는 첫 강좌로 ‘이중표 전남대 철학과 교수와 함께하는 불교의 이해와 실천’이 개강했습니다. 우리함께 빌딩 2층 문화살롱 기룬에서 1월 15일부터 3월 26일까지 설연휴를 제외하고 매주 화요일 저녁 7시에 열립니다.
이중표 교수는 초기불교 전문가이면서 대승불교 경전을 바탕으로 다양한 강의를 통해 붓다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열린 토론과 함께 소중한 도반들과 만나는 뜻깊은 시간을 가집니다.
총 10강으로 마지막 강의까지 빠지지 않고 참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부득이하게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서
불교아카데미 / 불교개혁행동 영상을 업로드할 예정이니 지속적인 관심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
강의 공지 ▼
http://cafe.daum.net/bsge/dyOX/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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